어푸어푸, 상급반까지
“웬 케이크야?”
“연말이잖아. 미리 예약하면 할인해 준다기에 샀지.”
그 케이크는 사실 6개월간 수영을 열심히 배운 나에 대한 보상이었다. 결석은 딱 두 번. 폭우가 내리던 날, 그리고 여행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빠진 날. 그만하면 성실했다, 중급반까지 아주 잘했어, 이제 강습 끝! 자축하는 의미에서 12월 31일에 달콤한 케이크를 먹겠다고 예약해 뒀다.
그때만 해도 상급반은 내 계획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 반이 어떤 반이냐면 30명 중에 상급반에 올라간다고 신청한 사람들이 무려 23명이다. 물론 그중에 나도 있다.
수영 친구들의 권유와 질책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마지막으로 우리 반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저.. 상급반 갈 수 있을까요?”
“올라가셔야죠.”
“체력이 안 돼서….”
“열심히 하셔야죠. 요즘 자유형 좀 된다고 발차기 연습 안 하죠?”
“네….”
역시 선생님. 내가 발차기 잘 안 되는 건 예리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같이 올라가자고 한 것 같으니 조금 마음이 놓인다. 선생님이 던진 한 마디에 우리가 이렇게 일희일비하는 걸 알까. 얼마 전에는 갈수록 퇴보하는 것 같다고 해서 한동안 침울했다. 하느라고 하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왜 잘 안 되는 거지?
그런데 까칠한 선생님이 더 잔소리 안 한 거면 양호하다. 오케이!
사실 그냥 상급반 신청해도 누가 뭐라 안 하는데 굳이 선생님 입장 곤란하게 묻기는. 이 나이에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나 보다. 아니면 오랜만에 배우는 사람이 되니 선생님한테 검사 맡던 그 시절 학생이 되고 싶은 걸까. 아무튼 그게 뭐가 됐든 내겐 중요했다. 선생님의 표정과 반응이.
연말 즈음 근 3개월 만에 수영반 회식을 했다 중급반에서 합류한 분들도 보인다. 역시 회식. 워낙 초급반부터 올라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데면데면했는데 이제야 좀 친해진 것 같다. 자유형이 안 돼서 늘 뒷줄로 물러나던 R씨가 술김에 한마디 한다. 토요일 자유수영 시간에 자기도 누군가한테 배우고 싶은데 다들 남자는 안 가르쳐 준다고 투덜댄다. 모두들 까르르 웃는다.
그게 아니라 가르쳐 달라고 말해야 하는 거거든요, 누가 가만있는데 알아서 가르쳐 줘요? 나 혼자 속엣말을 한다. 모르긴 해도, 나이대로 보아 직장에 가면 아랫사람이 알아서 자기를 보필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젖어 있으면 혼자 외따로이 있는 수영장이 어색할 수도. 그래도 끈기 하나는 인정한다. 될 때까지 열심히 하겠단다. 나도 그 결심에 함께 하려 한다.
상급반 수영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수영복을 장만했다. 역시 장비빨? 아니다. 중급반에선 평형을 배운다고 다들 3부나 4부 수영복을 사야 한다기에 만만한 저가 수영복을 골랐는데 거의 매일 수영하니까 살짝 탈색이 된 것 같고, 조금 질리기도 했다. 연말에 아레나에서 세일을 한다기에 근사한 명분을 무기 삼아 사버렸다. 처음엔 그동안 입던 검은색, 남색 수영복이 지겨워서 밝은 색을 골랐다가 결국 또 무난한 브라운 계열 컬러를 선택했다.
수영복을 받아 보니 문득 엄마 생각이 난다. 언제였을까. 엄마가 당신의 옷가지들을 정리하시던 때였다. 미국에 놀러 갔을 때 늬 오빠가 사준 거라고, 몇 번 안 입었다고 이거 너 입으면 안 되냐고 건네주던 그 수영복. 맞지도 않는 걸 내가 어떻게 입느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사실은 엄마가 느닷없이 옷을 정리하는 게 싫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엄마도 참, 당신이랑 나랑 키가 20cm도 더 차이 나는데…. 아마도 아들이 사준 거라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좋아하던 색깔은 이상하게 나에게 그대로 전해진 듯하다. 짙은 브라운색 수영복을 보다 그 생각이 났다.
엄마는 귓병을 앓아 평생 수영이란 걸 해보지 못했다. 늦게라도 배웠으면 참 좋았을 텐데. 수영장에서 연세 드신 어른들을 만나면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 몫까지 열심히 배워볼게요. 두려움을 걷고 어푸어푸 헤엄쳐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