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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지 Aug 08. 2023

내 인생 최고의 고백

“난 언니가 최고야!”

이사 온 집은 수납공간이 적다. 같은 평수 아파트니 비슷하려니 했는데 턱없이 부족했다. 매실청 담근다고 산 작은 항아리, 시어머니가 쓰시던 스텐대야, 에어프라이어에 밀려난 미니오븐, 빌트인 가스레인지 때문에 쓸모없어진 전기레인지, 어디선가 받은 소형믹서기 등을 이사한 뒤에 처분했다. 이사 견적차 왔던 이삿짐센터 직원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사한 뒤에 물건을 버린다고 해서 비웃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드레스룸은 더 심각했다. 수납할 서랍장이 없는 데다 이불 둘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 쓸모없어질 가구를 사고 싶지 않았다. 가볍고 버리기도 쉬운 수납상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철저히 공간에 맞추기로 하고 안 쓰거나 입지 않는 건 버렸다. 이제야 정리가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구석에 처박아둔 박스가 눈에 띈다. 저걸 어쩐다. 봉인을 해제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동안 모아둔 일기장, 그리고 편지들. 지퍼백에 담긴 편지를 꺼낸다. 그래, 추억여행을 해보자.


놀랍게도 이민 간 친구, 유학 간 친구들과 나눈 편지들이 많다. 한 친구와는 몇 년 전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났었다. 둘 다 조문객이었는데 타지에 사는 그 친구와 그 시각, 바로 앞 테이블에서 만났다는 게 놀라웠다. 또 한 친구와는 여전히 만나고 있다. 다음 모임 때 이 편지들을 갖고 가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 편지들 덕분에 이렇게 느슨하게라도 인연이 이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 때문에 또 정리하지 못했다. 버릴 수가 없었다.


편지 꾸러미 중에 유독 낡은 편지봉투가 눈에 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OOO 언니에게라고 씌어 있다. 아, 임실에서 만난 아이들!  

 



86년 여름, 나는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떠난다. 친구들은 고시공부를 하거나 취업 준비를 하는데 늦바람이 들었던 난 무엇보다 대학생활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농활 장소는 전라북도 임실군  골짜기. 계란 장사가 한번 왔다가 길이 하도 험해 계란이 다 깨지는 바람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던, 그런 마을이었다.


농활의 일과는 한결같았다. 밥 먹고 밭에 나가 일하는 게 다였다. 땅이 좋아서 그렇다던가. 호미질을 하면 엄청나게 큰 지렁이들이 튀어나왔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 해도 그게 맘대로 되지 않았다. 고된 노동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다음엔 평가회 시간이다. 다들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고 개선점을 얘기한다. 나는 내가 그렇게 부실한 인간인지 처음 알았다. 도대체 자기 강제력이라는 게 작동되지 않았다. 선배라는 사람이 매일 졸았다. 나는 잠 앞에 매번 굴복했다. 남들보다 노동시간이 적은데도 그랬다.

 

나는 동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밭에 있다가 오후에 마을로 간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는데  얼마나 멀고 낯설던지 튀어 오르는 생물체가 무엇이든 무서웠다.


마을에서 가장 시원한 정자나무 그늘에서 아이들과 놀았다. 특별한 학습 도구가 있을 리 없으니 색칠 공부하고 글쓰기 하고, 같이 노래하고 그랬던 것 같다.  

농활 마지막 날, 아이들과 발표회 준비를 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5학년 OO에게 얼마 전 쓴 글을 낭독하도록 했다. 왜 엄마만 하루 종일 일하느냐고, 밭일 하고 와서도 엄만 또 밥 준비를 해야 한다고, 아빠를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기특해하며 웃는다. 그 아이 아버지가 머쓱하게 머리를 만졌던 장면이 기억난다.


농활이 끝나고 우리는 굽이굽이 길을 되돌아 서울로 왔다. 아이들의 편지는 86년 7월 30일부터 87년 4월 21일까지 이어진다.

그 짧은 기간에 얼마나 정이 들었던지, 아이들은 보고 싶다고, 다시 오면 알밤이랑 감을 따주겠다고 편지에 적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A는 소소한 일상을 얘기해 줬다. 엄마 따라 밭도 매고 방학인데도 수학경시대회 준비로 학교에 나간다고. 그리고 아르바이트 하는 내가 힘들진 않은지 걱정해 줬다.


B는 우체부 아저씨가 혹시나 내 편지를 가져다 주지 않을까 매일 기다렸다고 전한다. 우린 서로의 장래희망도 공유했던 모양이다. 나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했고, B는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우린 서로의 꿈이 실현되길 빌어주기로 했다. 생각이 많았던 녀석은 서울보다 시골이 좋긴 하지만 시골 사람들이 더 고생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고 했다.


아이들 편지를 통해 나는 마을 소식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C는 아빠가 계신 곳으로 멀리 떠났고, 그새 A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이들 학교 건물이 태양열 주택으로 새로 지어졌고 D는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6학년이 된 아이들은 9시 10분부터 5시까지 학교에 있느라 무척 피곤하다고도 전한다.


1월에 태어난 A에게 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책을 보냈고, 4월 내 생일엔 곶감을 선물로 받았다. 정성껏 보내준 그 곶감 꾸러미를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쑥스러워서 사진도 같이 못 찍었던 아이는 나처럼 긴 머리를 하고 싶다며 머리를 기르고 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낼 때마다 민망할 만큼 내가 좋다는 고백도 한다.

“언니 고마워. 난 언니가 최고야. 언니 난 왜 언니에게 그 많은 정을 쏟았을까. 아마 언니가 좋았나 보지.”

내가 언제 이런 고백을 받아 봤을까.


그때 5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올해 마흔일곱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커 보였던 언니를 지금도 기억할까. 다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산골짜기 임실 그 마을은 여전할까. 아이들의 쉼터였던 그때 그 정자나무는 얼마나 더 울창해졌을까.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잡초를 베어 마을길을 넓혀 주셨던 그 어른들은 여전하실까.

아이들 편지 속 주소를 검색해 본다. 굳이 도로명주소가 필요하지 않은 곳. 그 주소 그대로다. 여전히 오지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시외버스에서 농어촌버스로 갈아탄 다음 40분 남짓 걸어야 한단다.    

다시 그곳에 갈 날이 있을까. 혹시 몰라 길찾기 맵에 표시해 둔다. 86년의 추억이 담긴 곳. ‘최고의 언니’로 기억해 준 아이들이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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