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아름가운가?
표현이 애매하지요?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키 크고, 잘생기고, 옷도 잘 입는, 그래서 대중에게 인기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야 하는지 고민해봤던 적은 없습니다. 저는 인기를 누리고 싶다는 그 ‘갈망’을, 마치 태아가 어머니 몸 밖으로 나오자마자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숨을 들이마시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인기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지금은 부족한 인기 때문에 메말라 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제가 노인이 된다면, 아무도 저의 외적인 모습을 멋지다고 칭하지 않을 것이며, 그때는 정말 저 자신이 ‘죽은 사람’처럼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게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지 않더라도 잘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귀여움’ ‘예쁨’ ‘멋짐’과 같은 단어들은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암묵적이고 상대적인 규칙이 있기는 합니다. 어떤 사람은 눈의 지름이 2.5cm가 넘는 사람이 예쁜 사람이라 하며, 또는 얼굴이 대칭을 이루고 황금비율을 지녀야 아름다운 사람이라 하고, 또는 키가 185cm는 넘어야 훈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앞선 규칙은 절대적입니까? 또는 정답을 정해주는 법칙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눈이 작아도, 비율이 맞지 않아도, 키가 170cm가 안 되거나 2m가 넘더라도 예쁘고, 멋지고, 훈훈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아름다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크게 다르지 않은 기준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말이 가능할 정도로, 우리는 ‘아름다운 여성’ ‘아름다운 남성’ ‘아름다운 사람’등 아름다움에 대해 서로 반박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암묵적인 기준이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연예인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겠지요?
자, 여기에서 문제제기가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워 보이는 것’에서 말이지요. 글의 첫 부분에서 저는 멋있는(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기가 있으려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제가 지니고 있어야겠지요.
이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 그 자체’는 사실 문제라 보기 어렵습니다. ‘오드리햅번’이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같이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들의 아름다움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아름다움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의도적으로 그들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만들고, 대중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매체가 있다면, 돈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모든 것을 계획적으로 주관하는 사람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의 행위를 문제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왜 연예인을 좋아하는지 아무런 기준 없이 감정에만 이끌려 돈과 시간과 열정을 과하게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또한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는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문제는 ‘인기 있으려 하는 것’ 즉,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의도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하는 것에 있습니다.
러시아의 천재 작가 체호프의 소설 중에 <<Душечк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직역하면 ‘귀여운 사람’ 또는 ‘사랑스러운 사람’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작중에서 주인공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아리따운 처녀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삶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 또는 ‘주관’이 없습니다.
주인공은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자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게 연극의 중요성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하고 다니기 시작합니다.(전부 다 남편이 했던 말들) 그 후 안타깝게도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사람과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목재상이었습니다. 그 후 주인공은 옛 사람들을 만날 때면 연극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목재에 가격과 시장상황에 관한 이야기들만 하게 됩니다. 새남편이 주인공에게 연극을 보고 오라고 하자, 연극은 봐서 좋을 것이 없다는 말까지 하며 이전에 지녔던 연극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일절 없어 보이는 모습을 보이죠. 안타깝게도 주인공은 새로운 남편까지 여의고, 다시금 비탄에 빠집니다.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지요. 끝에는 또 새로운 사람을 사랑하게 되며 거기서 무한한 가치를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체호프의 소설이야기를 한 것은,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삶의 모든 가치를 타인에게, 특히 자신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찾았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그나마 그녀가 저보다 나은 것은, 사랑을 갈구하지도, 인기를 얻기 위해 발버둥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주인공이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인기’란 것은, 그 인기를 누리게 만든 특정 요소가 대중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의미를 뜻합니다. 인기를 가져온 그 모습이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기를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대중의 입맛에 맞추는 쪽으로만 집중하게 되고, 대중이 싫어하는 특정 모습이 있다면 그 모습을 버리고, 대중이 좋아하는 특정 모습이 있다면 인기를 가져오는 그 모습만을 신경 쓰는 그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면 더 치명적인 기질을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계속해서 ‘인기’를 누리려 하게 되는 것 말이지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 내 곁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사랑하게 된 그 모습(나 자신이 대중적인 것에 신경 쓰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도 대중적인 모습만 보는 것) 외에 그 사람에게서 다른 가치를 볼 줄 모르는 상태는, 글쎄요.. 혹자는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서로만이 누릴 수 있는 여러 모습들(심지어 처음에는 단점으로 보였지만 이제는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개성으로 변모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들 까지)을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할 것이고, 그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며, 그들은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워질 테고, 그 외로움은 밑 빠진 독이니, 결코 채울 수 없을 테니까요.
바야흐로 SNS의 시대가 도래 하면서 우리는 수많은 낯선 사람들에게서 애정과 관심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낯선 사람에게서 받는 애정과 관심, 짜릿합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 짜릿함을 계속해서 갈망하게 되며, 낯선 이들에게 더 잘 보이기 위해,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 겉모습과 내면과 말과 행동에 덧입히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내가 정말 누구인지, 이제는 인기가 없어져버린 거울 속에 비친 저 존재에게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게 되는 혼란이 어두운 해일처럼 갑자기 스며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중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것을 옳은 것이라 여기고, 사랑하는 유일한 한 사람이 아닌, 자신과 취향이 맞는 여러 사람과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봅시다. 그들은 정말 진정한 의미로서의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서로 오랜 시간 만나게 되면서 드러나게 되는 대중적이지 않는 모습들, 즉 자기 중심적이고, 특정 부분이 지저분하고, 생활습관이 뒤죽박죽이며, 때로는 과격한 언어를 행사하고, 때로는 쉽게 토라져버리는 그런 모습들을 마주하게 된다고 해봅시다. 그럼에도 서로 대중적인(아름다운 얼굴, 몸, 패션, 취미 등) 것들만 바라보면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메인이미지 - Pixabay로부터 입수된 Mabel Amber님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