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나로 수렴하는 너를 향한 갈망
문 앞 나무를 보며 깊이 생각하노니
새가 깃들어 머물게 할 수 있음은
오는 것 애써 불러들이려 않는 마음이며
가는 것 돌아옴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네
만일 사람의 마음이 나무와 같다면
도가 이와 같아 어긋남 없겠네
나무에 새가 깃들어 살게 하는 의지는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나무의 의지에서 온다.
오고 감에 집착없는 나무의 무심(無心)이 도와 같아서
자연의 이치로서 새를 이끈다.
나무는 기대어 질 뿐, 의도하지 않는다.
선인들의 삶의 지혜는 어디서 왔던가?
주어진 하루 안의 모든 자원들을 공부거리 삼아,
진솔하게 삶을 숙고했던 삶에 대한 헌신에서 나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내고 다시 거둬들이며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만큼
기꺼운 일도 없는듯하다.
그것이 기꺼움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발로 걸어서는 닿을 수도 없는 거리를 소요(逍遙)하며
자기를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헤메임 가운데서 우리는 자신이라고 생각해 본 적없는
생경한 자신을 만나 그것을 품어안고 그것 역시
자신이었음을 알아보고 반갑다! 널 만나 기쁘다!
고백할 것이다.
상실을 충분히 잘 경험하는 것 중의 한 가지는
대상은 사라졌어도 여전히 대상과 상호작용하며
작동했던 무엇이 여전히 자신을 추동하고 있음에 대한 이해이다.
그 작동과 움직임은 어떤 생명력이다.
삶은 불가해한 생명력이지 않을까?
그러한 불가해함을 이해해보려는 것 역시 생명력이다.
이러한 이해는 목적없는 움직임이다.
이 이해는 무수한 인연으로 일어난다.
이러한 중중무진의 인연 가운데서
여전히 고독한 자신을 직면하는 것 또한
깊은 이해일 것이다.
<자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기에 본전 이상인 것이다.
만나지는 모든 것들이 인연이다.
인생은 무결의 빈공간이 아니다.
시끌벅적한 장터거나, 시루속 콩나물 이거나
아무렴!
결국엔 정겨웠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상실하고, 그렇게 떠나 보내는 일을 '해프닝'으로 일갈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다. 이별은 그 대상의 감정적 무게의 크기에 상관없이 원래 우리의 가슴에 항상 품고 있던 분리감, 즉 상실의 감정을 마주하게 한다. 상실은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소화하며 입장 정리를 해야 하는 근원적인 문제다.
우리는 상징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매순간 상실하고 있다. 자신의 젊음, 계절, 한편의 가능성, 이뤄지지 않은 갈망의 무한정한 지연 등 우리의 일상은 일면 살펴보면 연속적인 상실이다. 그러한 상실마저 그저 놓아둘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을 것이지만, 그런 상태로 곧바로 나아갈 수 없는 우리이기에 우선은 상실의 의미를 사려깊게 살펴봐야 한다.
상실이라는 이름에 가리워진 저편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림으로써 얻어지는 대극적(對極的)인 삶의 다층적 구조>를 얼핏이라도 꿰뚫어 볼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이다.
그 경험의 내용들은 걸어봐야만 알 수 있는 정경같은 것이라서 어떤 마음과 무의식의 풍경이 그려질지 알 수 없다. 모름의 길이다. 두렵지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을 이기는 숱한 방법 가운데서 나는 호기심을 택해본다. 호기심으로 내 삶을 탐험하다보면, 이 추구가 쉬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과정을 삶으로 산다면 적어도 허망하지는 않지 않을까?
그러니 나로서는 더더욱 상실의 이면, 상실의 저편으로 나가보는 선택에 주저함 없어야 한다고 마음먹는 것인지 모르겠다.
융은 인간 정신의 집단무의식 영역에서 아키타입(원형)이라는 개념으로 인간 정신의 유형을 특징지어 분류했다. 내 아웃사이더 기질과 가장 유사한 <현자와 마녀> 유형을 보면, 이 아키타입은 '상실과 이별을 고독 속에서 성찰하며 영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한다.
한편, 자아의 통합적 방향의 특성을 띠는 <SELF 유형>은 고통을 성장의 재료로 사용하여 충분히 경험하며 상실 속에서 인격적 확장을 한다고 한다. 나는 인생의 환난과 내리막, 막힘과 상실, 정지와 분리 등의 부정적 상황 가운데서는 의도적으로 통합적인 SELF의 방향성을 지니고자 한다.
나는 '성숙한 인격'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인류 공통 이상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 선택하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하나일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실을 통과하며 인간이 되어가기도 하고, 인간이 아닌 것이 되어가기도 한다.
상실은 빠른 전환으로는 치환되지 않는 경험이다. 그것은 블랙홀같은 무거운 중력과 자장을 지닌다. 그것이 원래 그러하다. 겪어본 자라면 알지 않는가? 그것의 색채가, 그것의 구조가 그러하다.
그럼에도 상실은 마주해야 할 국면이지 인간에게 부여된 잔혹한 굴레는 아니다. 그러나 때론 죽음보다는 상실이 더 절절하고 더 아리며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드는 족쇄가 된다.
다만 위로가 되는 지점을 찾자면, 상실의 무거운 중력이 붙드는 동안 우리는 좀 더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끝을 모르고 가라앉아 자신의 심부에 닿을 수 있는 환경, 납을 차고 깊이깊이 잠영해 심연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상실은 차마 두려워 하지 못한 숙제를 기어이 해내게 하는 호랑이 선생님이다. 자기가 미룬 숙제를 붙잡게 하는 힘(외부적으로 가해졌지만 내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그것이 상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군가가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허구를 믿지 않는다. 그 누가 이런 무겁고 치열한 자기탐구의 길을 매일매일 오롯히 걸었단 말인가? 그 누가 이런 짓누르는 진실 앞에서 더낫고 덜하고의 대차대조표를 써낸단 말인가? 다만, 나는 내 스스로의 자족의 길을 찾기 위해 진심의 솔기가 틔여지길 바랄 뿐이다. 그러니 상실이 왔다면, 지금의 시간표는 <심연과의 대화>라는 전공수업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루터파 신비주의자인 야콥 뵈메(Jacob Böhme)는 “하나님은 심연이며, 영혼도 심연이니 두 심연이 서로를 부른다.”라고 말했다. 삶에 찾아온 비일상적인 부정적 정서는 자신의 심연 안에서 큰 존재의 기척을 탐구하고 자신의 가리워진 미지의 황무지를 개척하도록 인도한다.
인간은 통합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존재이며, 성장에 대한 열망으로 살아간다. 이는 생래적인 조건으로서 인간의 영혼에 심겨진 지침이기도 할 것이다.
인생의 문제로 꼽히는 이른바 남탓, 투사를 내려 놓는 일은 <상실>이라는 이벤트를 통해서 엉겹결에 내려놓아 볼 수 있다. 투사는 남탓을 통해 자신의 그림자를 회피하는 핑계로서 활용되기도 하지만, 그 반대인 <투사적 기대>로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하고, 결국 자신에 대한 것이었을 자신에 대한 그의 열망과 기대를 가리우기 때문이다.
위의 게송에서 나무가 보여주는 무위(無爲)로서의 무심(無心), 오고 감에 대한 전적인 수용 역시 우리가 곧바로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상실을 발판삼아 이런 정지 가운데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궤적을 보이며 살아왔는지를 되돌이켜 살펴보아 하는 것이다.
이 상실의 국면에 몰아치는 모든 감정의 다채로운 빛깔들을 그대로 경험하며, 감정적 감각을 길잡이 삼아 자기 심연으로 내려가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을 만나고 오는 일이면 남는 장사다.
누군가와의 인연의 끝에서 무감각으로 자기계발로, 긍정적 자기기만으로 태세를 전환하려는 얕은 수를 내려놓고 옴팡 아프고 옴팡 원망하고 미워해보자. 그 끝은 언제나 당혹스럽게 생경해도 뜻밖에 반가운 나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