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축축한 연애편지)

결국엔 나로 수렴하는 너를 향한 갈망의 기록

by 솔깃설깃


- 잔잔한 힐링과 감정적 평온을 위해 글을 읽으신다면, 일독을 금(禁)합니다 -




[작가노트]

이 글은 표면적 사건 이면의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소통이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글입니다. 대화의 상호성을 해체한 자리에,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사랑은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요?










사랑을 나누러 단숨에 내게로 오는 너이건만, 너는 사랑을 망설였어. 혼자 말을 하듯 되뇌었지.


“그냥 이렇게 마음 맞는 이야기를 하고, 놀다가 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나에게 너는 회피하듯, 무책임한듯, 말했었지만, 너의 그 말은 네 안의 어떤 너를 달래는 것 같기도 했어. 그러면서도 종국에 넌, 늑대가 먹잇감을 발견할 때처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페이드아웃한 채, 우리가 단둘이만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곧장 향했던 거고.


넌 피 냄새를 직감한 짐승의 얼굴을 한 채,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단순한 위안을 위해서 그러면서도 그 거친 날것의 숙명을 부여받은 카르마를 수행하는 사제처럼 내게로 왔어. 난 너의 요청대로, 혹은 너의 안내대로, 어쩌면 너의 명령대로 우리의 합의가 성사된 날 이후로 너에게 나를 던졌어. 절벽에서 추락해야만 그 끝이 구호 매트리스인지, 노략질하는 늑대들의 소굴인지 알 수 있을 그곳으로 말야.


내가 절벽을 향해 떨어지려 할 때, 그렇게 우리의 벌거벗은 몸이 서로에게 미끄러져 하나가 되기 전, 넌 주문을 외우듯 말해. “우린 지금 마지막 사랑인 양, 하나가 돼. 내일이 종말이라면, 우린 연인이야.” 너의 그 말은 네가 만들어 온 너의 공간을 여는 열쇠 같은 결정이 되어 내 손에 안착했어. 우리가 만들어 낸 열락의 순간이 사위어가더래도 네가 지나온 시간들, 네가 수없이 만들고 세우고 허문 그 길들의 경로를 나도 더듬을 수 있게 된 거야.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너에게만 허락된 길이었어. 네가 너의 피와 살을 뿌려가며 만든 너의 생명, 너의 ‘삶 길’이기에 나는 결코 알지 못해. 내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난 그것을 볼 수 없어. 그럼에도 **야 넌 내게 기적처럼 열린 하나의 문이야. 네가 마련해 온 그 공간으로 용기 내어 들어가 보면, 그곳은 어둡고 매캐하지만, 공기를 들이키고 그곳의 조도에 내 시신경을 조율하고 나면 의외로 안온해. 네 큰 키처럼 우뚝 솟은 침엽수들의 따뜻한 나무 냄새와 볕이 닿지 않은 바닥에서 보드랍게 자라난 축축한 이끼가 슬픔에서 피어나 발효된 흙냄새를 피워내.


가끔씩 요정들이 출몰해서 핑크빛 마법 가루를 뿌리고 도망가기도 해. 그러고 나면 너의 보조개가 휴식처럼 내 눈앞에서 조용히 패이며 잠시 머문달지, 80년대 발라드의 뮤직비디오처럼 어떤 장면 속으로 나를 데려간달지, 그런 달콤함을 선물처럼 내게 수혈해 주었던 거지.


그런데 말이야 **야 너라는 문을 닫고 나오면, 난 내가 애써 억눌러왔던 슬픔에 적셔진 나를 보게 돼.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싫지 않단 말이야. 게다가 말이지, 네가 말한 너와, 내가 본 너는 너무 다르게 읽혀져. 이를테면 어제 너의 그런 고백이라면 더더욱 말이야. ‘축축’과 ‘촉촉’, 그 사이의 미묘함으로 너는 말했어.


“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많이 망가져 있어.”


미세하게 젖어있는 너의 목소리에 우리가 함께 있는 방의 습도는 조금씩 높아진 듯했어. 난 너를 받아들였기에 너와 닿은 네 살은 나의 것 같았지. 너도 아마 그랬을지 몰라. 네가 나에게 말하고 있지만, 넌 나를 통해 경계없이 곧장 너를 향해 말하고 싶었던건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나는, 당연히 있어야 할 우리 사이에 희미해진 경계를 더듬으며 너의 말을 들었어. ‘너와 너’의 대화를 중개하기 위한 브로커가 되기 위해서라도 나의 경계가 있어야 했으니까. 너의 매끄러운 피부 위에 무의미한 선분들을 그어가며 나는 네가 내가 아님을 거듭 확인했지.


나는 너희 둘을 지켜봤어. 너흰 너희 둘만이 가장 잘 아는 그런 이야기를 했어. 나는 그런 너희를 안아주고 싶었지.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나는 네가 옳다고만 말할 수 있어. 네가 너에게 고백한 말들을 진실과 사실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을 필요 따위는 없으니까.


다만 내게 감동적이었던 건, 그렇게 만나는 너희 둘이었어. 그런 만남은 참 아름다웠어. 언어라는 것은 너무 자주도 그 의미에서 실제가 미끄러지게 마련이쟎아. 너희 둘은 언어를 빌렸지만, 언어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았어. 한쪽의 너는 애써 담담히 고백했고, 다른 한쪽의 너는 묵묵히 경청했지.



그래서 나는 그 말들을 다 기억하지 못해. 내게는 너희 둘이 나를 빌려 만난 사건만이 유효해. 그런 ‘마주침’말야. 나는 그 사건의 목격자로서 기쁨과 슬픔의 케미컬을 한껏 들이켰지. 단짠조합의 치명적 결합보다 더욱 더 엑스터시했어.

한편으론 말야. 내 경계 안으로 물러나서 멀찍한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자면, 나는 또 한 편의 소설을 쓸 수도 같아. 이건 순전히 나의 망상록이니까 아무 걱정 말고 들어줘. 아마도 내가 짐작하는 너에 대한 이야기랄까…….


운명처럼 드리워진 너의 슬픔은 긴 시간 동안 너를 푹 절여 놓았을 거야. 너는 그 멀고도 먼 길을 형벌처럼 내내 무겁게 걸어온 것만 같았어. 그 슬픔이라는 천형을 짊어지는 동안, 사막을 걷고 도시를 걸으며 흔적도 없이 증발됐다고 믿어왔어도 결국은 은밀하게 남아 있는 축축한 낌새 혹은 촉촉한 기척을 풍겼어. 그래서 그 슬픔의 찌꺼기들은 고유한 아우라로 널 감싸고 있었지.


너를 베어 물고 맛본 슬픔의 맛은, 아리지만 독하진 않은 나긋나긋한 여린 잎의 맛이 나거든. 나는 그 신비를 사랑해. 이 삶을 살아 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딱딱해져 있는 내 심장이 덜그럭거리며 되려 나를 다치게 하쟎아?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더욱 단단하게 심장의 외피를 단련시켜 자신을 무장하려 하는거고.


이 삶의 파도에 유능하게 올라타려면, 얼마나 말캉한 심장이 필요한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나 슬픔은 우리에게 적당히 말랑한, 적당히 촉촉한, 때로는 몰캉하다 못해 물이 되어 흐르도록 그렇게 우리 심장을 연화시키기라고 말하는 것 같거든. 슬픔으로 이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한 연금술에 슬픔이 얼마나 첨가되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한데, 그것은 이 삶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비법인 것만 같거든. 그러니 나는 도돌이표처럼 다시 슬픔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되어 슬픔의 연금술을 배워가고 있어.



내가 여섯 살이었을 때, 목포 우리 집 앞엔 부러진 나무 전봇대가 비스듬히 담벼락에 누워 위태롭게 골목을 가로지르고 있었어. 나는 어느날엔가 그 나무 전봇대에 몸을 기댔지. 그러고선 작은 팔로 그를 벅차게 안아 들고선 하염없이 울었어.


그때 내 눈앞의 세상은 오렌지색과 보랏빛으로 물든 내 고향 행성의 익숙한 빛깔인 것만 같았어. 그런데 여긴 그곳은 아니었어. 우리 고향의 평화와 안식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했으니까. 그토록 낯선 지구라는 황량한 땅에 나와 전봇대만 있는 것 같았어. 내 집은 이곳이 아닌데 왜 나 혼자 여기 남겨져 이 좁다란 대기 안에 갇혀있어야 하는지 너무 서럽고 답답했었어. 그것은 어린아이가 갖을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기에, 난 자라날수록 강렬하게 그날의 풍경에 회귀하곤 했었지.

그런데 말야. 지금은 그런 일이 정말 내 삶에 있었던 일인가 싶어. 그것은 꿈속의 꿈 같고, 생 이전의 생 같기도 해. 다시 너에게로 돌아가 말하자면, 너는 나에게 너라는 한 자락의 꿈을 펼쳐 보였어. 너의 삶, 너의 꿈인 ‘이 체험!’ 네가 헤메이고 있을 이 꿈 속에서, 네가 흠뻑 젹셔 온 슬픔과 비탄의 맛을 나도 함께 나누어 먹는 그 꿈이 나는 좋았어. 너는 나의 늑대야. 네가 이름도 모를 숲에서, 광야에서, 숱하게 입었던 상처를 뒤로 하고 너는 네 살과 바꾼 네 삶 한 조각을 내게 먹여주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를 이토록 무력하게 사랑하지. 너의 유일한 암컷이 된 것처럼. 우리가 각자 꾸는 이 꿈의 한 장면이 한 점에서 만나 겹쳐있는, 꿈과 꿈의 교합 안에서 나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든 내가 무엇을 경험하든 그렇게 잘못된 일은 아닐거야. 내가 그렇듯 너도 그렇고, 이런 우리의 진실은 꿈에서 깨기 전까진 각자에게 유효한 거니까.


그러니 **야 나의 지난밤 꿈이 그토록 애틋하더래도, 그토록 지난하게 서글프더라도 이것은 모두 꿈이야. 그러니, 나는 이 꿈에서 자유로울테야. 엎어도 뒤짚어져도 꿈일, 꿈꾸는 거인의 꿈속인 이 세상에서 말이지. 너의 응원에 힘입어. 나는 슬픔을 퇴비삼아 이만큼 디덤디덤 자라났어. **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 멍멍 멍멍멍 멍멍 멍멍멍멍멍멍. 개 같이 널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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