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나만의 작은 우주를 가꾸는 일
집을 계약하자마자 내가 한 일은, 필요한 가전을 사는 일이었다.
입주일까지 한 달 정도 남은 상태였기에, 냉장고와 세탁기, 밥솥이 급했다.
당근마켓에 알림을 설정해두고 괜찮은 물건이 올라올때마다 매일 봤던 것 같다.
괜찮은 걸 발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 괜찮다 싶으면 금방 누군가에게 팔리거나, 가격이 너무 비싸곤했다.
그래도,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계속 기다린 결과 괜찮은 것들을 구할 수 있었다.
나만의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기에, 냉장고는 예산을 넘은 가격이었지만 예쁘고 새 것에 가까운 것으로 25만원에 구입했다. 세탁기는 운좋게 5만원에 샀고, 밥솥은 성능과 사용감 대비 가격이 저렴한 편에 속하는 10만원에 구입했다. 중고 물품을 구입할 때는 새 상품보다 절반이상 저렴하면서, 사용감이 크지 않은 것들을 구매하곤 하는데 이 기준에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세탁기는 사용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지만 가격이 저렴해서 일단 구매했다.
당근에서 가전을 사는 건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용달 업체에 연락해서 운반을 요청해야했고, 거기에 따른 비용이 또 들어갔다. 판매자와 용달 기사님과 시간을 맞춰야 했고, 혼자 살게 될 집이다보니 집에 외부인을 들이는 것이 반가운 일은 아니기도 했다. 그렇지만 첫 독립을 하며 비용을 최대한 아끼고 싶은 자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전을 구매하고 난 후에는, 커튼이 시급했다. 커튼을 달지 않으면 밤마다 창밖에 내 모습이 훤히 드러나게 될텐데, 혼자 사는 집이라는 사실이 그대로 노출될 것 같아 무서웠다.
원하는 내 방의 모습이 있었다. 밝고 하얗고, 아이보리 톤의 아늑한 집.
방마다 다른 느낌으로 꾸미고 싶었는데, 거실은 꼭 아기자기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하얀느낌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 집은 전체적으로 회색의 벽지를 가진 모던한 느낌의 집이었고, 원하는 모든 걸 충족할 수는 없으리란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색의 커튼이 가장 잘 어울릴거라는걸 알면서도, 내가 원했던 아이보리톤의 커튼을 사고 싶었다.
입주일이 겨울이었기 때문에 도톰한걸 구매해야 했는데, 암막커튼이면서도 색상이 베이지 느낌이 나지않는, 흰색에 가까운 아이보리톤의 커튼을 찾는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디자인 일을 하다보니 색상의 작은 차이에도 민감해진 탓에 온라인에서 사진만으로 원하는 커튼 색상을 고르는건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커튼을 달려면 공간을 실측해야 하고, 커튼 주름의 종류에 따라 치수를 어느 정도로 할지를 계산해서 결정해야했는데, 이걸 계산하는게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웠다.
겨우 구매해서 받아본 커튼은, 멀리서보면 회색의 빛깔이 살짝 도는 것 같긴 했지만 가까이서 볼땐 아이보리가 맞았다. 기대했던 색상보다는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그러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커튼을 다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커튼레일을 먼저 설치하고, 커튼을 달기만 하면 끝나는 일처럼 설명되어 있어서 충분히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역시 인생에 쉬운 일은 없다는 걸 다시금 알게 했다.
그렇지만 인생에는 때때로 찬스가 생기곤 한다. 우연치않게 친절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커튼을 설치하던 날, 인터넷도 함께 설치하려고 기사님을 불렀었는데 기사님이 커튼 다는걸 도와주실줄은 몰랐다...!
인터넷 설치를 완료하고 다음 약속된 집으로 가기까지 기사님은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셨던 상태였고,
커튼을 설치하느라 드릴을 붙잡고 낑낑대고 있던 엄마와 내가 아마도 기사님의 눈에 밟혔던 모양이었다.
그 친절한 분은 우리 아빠 나이쯤 되어보이는, 나이가 좀 있으신 기사님이셨다.
남의 집에 커튼을 다는 일이자 타인의 일을 대가 없이 돕는 것은 꽤나 성가시고 어려운 일이었을텐데, 그 분은 우리가 커튼을 설치하는 것을 끝까지 도와주셨다.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다 해주신 셈이었다.
어쩌다 도움을 받게된 게 감사하고 죄송하기도 해서, 사왔던 빵이라도 드리고 싶어 그렇게 감사함을 표현했다. 이렇게 때때로 만나게 되는 누군가의 상냥한 온기가, 나는 언제나 참 감사하다.
입주하기 전에, 꼭 필요한 것들을 사서 이사갈 집에 먼저 가져다놓았는데 모두 나의 아기자기하고 아늑한 집을 위한 꿈이 담긴 것들이었다.
물건을 사는 일은, 아기자기한걸 고르는 기쁨도 있었지만 로망과 현실사이에서 적당한 선을 찾아 타협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의 독립은 무미건조한 삶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생존만을 위해 그저 그런 무미건조한 색깔의 집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지내왔던 방 말고, 내가 가지고 싶었던 내 취향의 방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조금 비싸보이더라도 꼭 가지고싶었거나 필요한 것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마음이 원하는 것들로 구매했다.
아기자기하고 빈티지한 냄비와 접시들, 파스텔 톤의 소품들.
그리고 현실이 금수저가 아니라서 밥 먹는 숟가락이라도 금수저를 쓰고싶다는 마음으로 구매한 금색의 수저와 젓가락, 귀여운 수저받침들, 데코용 소품들...
늘 현실과 타협하느라 가슴에만 담아두고 지나치던 것들을, 참지않고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사보는 일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르게 했다. 나는 이 공간을, 내가 원하고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가고 싶었다.
이런 것들이 별거 아닐지는 몰라도, 조금씩 작게나마 일상의 한 부분을 예쁜 색으로 물들여준다는걸... 그리고 그 예쁜 색으로 물들여진 일상이 모여, 앞으로 나아갈 힘을 찾는데에 작은 숨을 틔워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가구들을 구입할 때는 신중하게 고민했다.
가구는 무거워서 이동도 쉽지 않은데다 집 안의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싸기도 했다.
살면서 필요한 가구를 하나씩 들이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꼭 필요한 가구만 구매했는데, 옷을 걸어놓을 행거와 화장대를 당근에서 각각 1만원, 3만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용달을 부르지 않고도 차로 옮겨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거실에 어항을 올려 둘 서랍장 하나정도는 예쁜 것으로 두고 싶어서, 연한 노란색의 귀여운 서랍장은 새 것으로 구매했다.
식탁과 의자는 당근에서 원하는 걸 구하기 애매해서 새 것으로 구매했는데, 나름 미드센추리 가구를 구매했지만 텅 빈 공간에 저것만 달랑 있어서 그런지 가족들이 편의점 테이블 같다고 놀려댔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침대와 책상, 나무로 된 가벼운 행거 두개는 본가에서 쓰던걸 그대로 들고오기로 했다.
추후에 이야기하겠지만, 가구를 한번에 사지 않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비용을 아끼려다보니 내가 상상하는 분위기대로만 방을 꾸밀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과의 타협도 어느정도는 필요했다.
나름 적당하게 잘 타협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내가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툴지만 나만의 물감으로 하나하나 색칠한 작은 우주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