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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별 Dec 19. 2021

06. 눈이 내려서 낮잠을 잘 수가 없어!

기가 막힌 타이밍

눈 내리는 밤이다.


오늘 서울에는 오후 세 시가 되기 조금 전부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주말 맞이 기념으로 낮잠을 미루고, 미루고, 미루던 꼬미 앞에 나타난 마법! 아, 눈님, 반갑긴 합니다만, 이제 드디어 방 문을 닫고 낮잠을 재우려고 하는 기가 막힌 타이밍에 놀러 오시는군요. 꼬미는 외쳤다. '엄마! 눈이 내려서 낮잠을 잘 수가 없어!'  펑펑 쏟아지는 눈을 태어나서 처음 본 또미도 '꼬꼬꼬꼬!' 외치며 누나 옆에 자리를 잡는다.



'엄마! 눈사람 만들러 나가야 돼! 지금 가야 한다구!'

'꼬미야, 낮잠을 자고 나야 눈이 쌓인대. 그래야 눈사람을 만들 수 있어. 낮잠 자고 장갑 끼고 나가자.'

'눈이 꼬미 자는 동안 쌓여서 기다려 준대?'

'당연하지!'


나는 애써 이들을 방으로 몰아넣고 겨우겨우 재우기에 성공했다. 애매한 시간에 잠이 든 아이들을 보며 고민이 생겼다. 너무 늦게 깨면 추워서 나가기 힘들 텐데 깨울까? 또미는 아직 몸 상태가 안 좋은데 어떡하지.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낮잠 자고 나면 까먹겠지.


오후 다섯 시. 햇님이 집에 가려고 가방도 다 챙기고 옷도 다 입었는데 이제 깬다. 제발 잊어라, 제발 잊어라.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꼬미가 맑은 눈으로 말했다. 엄마! 장갑 어딨어? 당근도 챙겨! 눈사람 코라구!


남편과 나는 서로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신속하게 두 아이를 입히고 또 입혔다. 앞쪽, 뒤쪽 창문을 모두 살핀 남편은 뒤쪽 언덕에는 조금 더 큰 아이들이 벌써 신나게 썰매를 타고 있으니 -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썰매 구비 못함) - 앞쪽 조용한 구석에 가서 눈사람을 만들자고 나직이 신호를 보냈다. 접수 완료. 매서운 칼바람을 고려하여 최대한 빨리 고객을 만족시키고 돌아와야 한다


비장한 각오로 출정


이런 웬걸. 눈밭에 나가니 꼬미보다 남편이 더 신났다. 사정없이 눈싸움을 걸어오다가 나에게 잔소리 듣고는 본분을 깨닫고 눈사람용 눈을 굴린다. 꼬미도 신나고. 또미는 유모차에서 탈출하고 싶은데 꺼내 주지 않는다고 난리가 났다. 어쨌든 매우 추웠으므로 상당히 신속하게 눈사람 1을 완성하고 이제 집으로 가자며 겨우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할 건 다 해서, 우리 눈사람 1은 눈, 코도 있고 팔도 있고 모자와 장갑도 있었다. 이제 아파트 현관을 통해 쏙 들어가면 된다! 삐비빅. 예상치 못한 상황 발생. 현관 앞에서 다른 '친구'가 친구 아빠의 비장의 무기 - 눈 오리 만들기 집게 (이것도 구비 못함) - 로 만들어진 오리들을 한 마리씩 늘어놓고 있다. 꼬미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또미의 상태가 염려되는 엄마의 마음은 바쁘다. '죄송하지만 오리 한 마리만 얻을 수 있을까요?'


내 눈빛의 간절함을 육아 동지인 친구 아빠는 금세 이해해 주셨다. '친구 오리 한 마리 주자~' 아. 4세들은 욕심이 많다. 안된단다. 아줌마는 이해한단다. 다만 따님이 이해를 못 하신다. 육아 동지께서는 몇 차례 더 설득을 해 주셨고 우리는 감사히도 한 마리 얻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꼬미는 오자마자 베란다로 직행하여 오리님 보금자리를 꾸며드렸다. 그 모습을 보던 꼬미 아버님께서는 눈사람 1호도 데려오고 싶으셨던지 다시 나가셨다. 지극정성이다 쯧쯧. 그는 들고나간 양푼이에 눈사람 1호와 눈 약간, 그리고 그들이 떠나고 없더라면서 오리 두 마리도 서리(?) 해 왔다. 꼬미는 한 시간이 넘도록 베란다에서 나오지 않고 눈사람과 오리들과 놀았다. 저녁도 늦게, 샤워도 늦게, 그래서 잠자리에도 늦게 누웠다. 꼬미야, 눈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라고 물었더니,


"엄마, 아빠가 눈사람 입을 안 만들어 줘서 눈사람이 말을 안 했어."


그.. 그랬구나.. 그럼 넌 한 시간 넘게 뭘 한 거니? 엄마가 내일 햇님 있을 때 다시 나가서 입도 있는 눈사람 2 만들어줄게. 내일도 부디 썰매의 존재는 모르고 지나가기를.



- 덧붙이기: 문득 2020년 2월 초. 코로나 초기에 어쩌다 후다닥 다녀온 잘츠부르크에서의 눈사람 친구들이 생각나서 사진을 찾아본다. 꼬미야 엄마랑 잘츠부르크에서도 눈사람들이랑 놀았던 거 기억나니. 그땐 다음번 여행이 이토록 기약 없이 멀어질 줄 미처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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