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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노동자의 식솔

홍콩에서 혼자 놀기

by 작은별

“언니 한국 사람? 시계 살래? 롤렉스? 까르띠에?”


2017년 5월. 마치 서울의 명동 같은 침사추이 번화가 한복판에 숙소가 생겼다. 남편의 홍콩 회사에서는 한 달간 머물 레지던스 하우스를 제공해주며 홍콩 생활에 적응하고 집을 구할 여유를 주었다. 방 한 개에 작은 거실이 딸려있던 레지던스 하우스에는 생활에 필요한 가구와 부엌살림이 다 있었다. 호텔처럼 매일 꼼꼼히 청소도 해 주었다. 근처에는 적당한 크기의 마트가 있어서 장보기가 좋았다. 한국 식품도 자주 보였다. 네이딴 로드(Nathan Road)라는 큰 길가에 숙소가 있어 사람 구경하며 혼자 다녀도 위험하지 않았다. 길 건너에는 산책하기에 좋은 넓은 공원이 있었다.


침사추이의 길거리에는 가짜 시계 판매상들이 여럿 있었다. 깊은 대화를 해 보지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중동이나 북아프리카계의 젊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을지 딱 보면 척하고 맞추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시아인들이 지나가도 한국 사람, 중국 본토 사람, 일본 사람을 어찌나 잘 구분하는지. 나를 보면 늘 한국말로 인사해서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로도 척척 말을 건네는데 인사를 받은 쪽들이 나처럼 웃으며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홍콩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말을 걸지 않는 센스도 발휘하고. 어쨌든 그들이 실제로 가짜 시계를 얼마나 많이 판매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이 복잡하고 치열한 도시에서 나에게 매일 말을 걸어 주는 그들을 보며 반가움과 생동감을 느꼈다.


홍콩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홍콩 지명을 서울에 빗대어 말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아도 우선 내가 이해하는 데 편했고 홍콩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하기도 좋았다. 일단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가로지르는 바다를 한강처럼 생각하면 아래의 홍콩섬은 강남, 구룡반도는 강북 지역이 되었다. 홍콩섬에서도 센트럴역과 홍콩역이 있는 곳은 강남-역삼지구, 셩완역과 사이잉푼역이 있는 쪽은 경리단길 느낌이랄까? 아이들 학교 보내기가 좋아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타이쿠역 쪽은 내게 대치동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홍콩의 8학군은 강북에 있는 카우룽통(Kowloon Tong) 지역이라 타이쿠역 쪽은 반포주공에 더 적합할 수도 있다)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리펄스 베이는 청담이라고 불렀다.

강북으로 올라와서 침사추이는 딱 명동이었다. 남편의 회사가 있는 구룡역 일대를 나는 편의상 여의도라고 불렀다. 사실 강남인 홍콩섬 전체가 거대하고 빽빽한 여의도의 분위기이긴 했지만 - 진짜 금융 중심가는 그중에서도 센트럴과 어드미럴티역 정도 - 서울에서 남편이 일했던 곳의 이름을 홍콩에서 일하는 곳에 붙여주며 친밀감을 느껴보고자 했다. 구룡역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올림픽역이 있었다. 비교적 신축 아파트와 오래된 ‘로컬 동네’가 함께 있는 곳이어서 딱 우리의 신혼집이 있던 공덕-마포의 기분이 들었다. 이 외에 녹지가 가득하지만 도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완 또는 북쪽의 샤틴은 일산, 남쪽의 오션파크(Ocean Park) 놀이공원은 용인 에버랜드, 도심과 달리 주택이 많은 여유로운 해변 동네 디스커버리 베이는 파주 타운 하우스에 한남동을 섞어놓은 것 같다고 생각하곤 했다.



홍콩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남편은 회사에 출근했다. 서운하기도 아쉽기도 했지만 그는 그의 일을 하러 온 것이었으니.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외국인 노동자의 식솔’에 심지어 ‘소수민족’이라고 생각하면 내 처지가 쓸데없이 안쓰러운 듯 느껴져서 그냥 발걸음 가벼운 여행자쯤으로 여기고 마음 내키는 대로 다니기로 했다. 여행자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 사회를 대할 수 있어서 좋고,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며 새로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으니 또 좋다고 생각했다.


숙소에서 바다가 보이는 페리 터미널(Star Ferry Terminal)까지는 큰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이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길은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였고 활기가 넘쳤다. 과거에는 해군 요새로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명품 가게와 식당이 자리 잡은 1881 헤리티지(1881 Heritage) 건물과 우리나라의 예술의 전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홍콩문화센터(Hong Kong Cultural Centre) 건물 앞 시계탑은 필수 관광코스였다. 활짝 웃는 사진 속 주인공들을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페리 터미널 근처에는 하버시티(Harbour City)라는 홍콩 최대의 복합쇼핑몰이 있었다. 하버시티가 자리 잡은 캔톤 로드(Canton Road) 또한 유명 관광지여서 그 길은 평일에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의 목적지는 주로 홍콩문화센터의 시계탑 앞이었다. 관광객들 사이에 앉아 같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홍콩섬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곤 했다. 신기한 것은 매일 보아도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앉아서 책을 읽기도 하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서 있기도 하고, 지난 일들을 괜스레 곱씹어보기도 하고,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때로는 페리 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홍콩섬으로 건너갔다. 홍콩의 바다는 배나 지하철, 버스, 택시, 자동차 등으로 건널 수 있다. 그중 배가 가장 느려서 가장 저렴했다. 하지만 가장 운치 있고 인기 많은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도시 내 일상적인 이동수단으로 배를 타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배를 탈 때면 언제나 설렜다. 배는 두 개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옛날 영국 식민지 시절의 중국인들은 아래층에만 탈 수 있었다고 했다. 오늘날에는 아래층 운임이 조금 더 싸서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여행자들은 배의 위층 왼쪽 앞자리를 선호했다. 홍콩섬의 멋진 모습이 가장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자리는 좁고 긴 벤치형의 의자로 되어있어 그다지 편하지는 않지만, 또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흥미로웠던 점은 배가 도착하거나 출발할 때 세일러복을 입은 선원들이 나와서 밧줄을 던지고 감고 풀고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세일러복을 입는구나 하는 호기심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점점 더 자동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옛날 방식 그대로 교통수단을 운행하는 모습이 뭔가 정겨웠다.





배에서 내리면 버스정류장도 보이지만 나는 주로 거대한 파란색 육교를 따라 왼쪽의 대관람차가 있는 공원을 구경하다가 복잡하게 연결된 고층건물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홍콩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라는 국제금융센터(two International Finance Centre: two IFC) 안으로 들어가면 특유의 향과 함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좋았다. 잊을 수 없는 홍콩 첫 방문 때,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은 자신의 첫 직장이 있던 이곳이 ‘다크 나이트(The Dark Night, 2008)’에도 나온 곳이라며 흥분해서 이야기했었다. 남편도 나도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영화시장을 뜨겁게 뒤흔들었다던 ‘영웅본색’ ‘중경삼림’ ‘천장지구’ 등등 네 글자 제목의 ‘홍콩 누아르’ 영화를 직접 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나 삼촌들은 내가 홍콩에 가게 되었다고 했을 때 자신들의 먹먹한 청춘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홍콩 영화들을 신나게 말씀하셨지만.

1997년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면서 경제체제 변동 등 여러 가지를 우려한 많은 홍콩 사람들과 자본이 캐나다나 호주 등 영연방 국가로 떠났고, 이때 영화 산업계도 큰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내가 신나게 영화를 보았던 2000년대 이후에는 할리우드 영화와 우리나라 영화들이 주로 걸려 있었다. 나는 홍콩에서도 ‘촬영’했다는 ‘도둑들 (2012)’, ‘닥터 스트레인지 (Doctor Strange, 2016)', ’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 (Transformers: Age of Extinction, 2014)‘ 등에 나온 곳을 찾아보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의리를 지키던 홍콩 영화의 세대보다 어쩌면 배고픔도 감성도 부족한 세대이려나. 하지만 각 세대만의 젊음은 나름의 고민과 추억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모든 세대의 젊은 추억은 소중한 것으로 정리하며 발길을 재촉하곤 했다.


IFC 건물에서는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Mid-Level Escalator)를 타고 소호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지하철이나 트램에 올라타 홍콩의 주요 행사가 열리는 완차이(Wanchai) 지역의 홍콩 컨벤션센터(Hong Kong Exhibition & Convention Centre)로 갈 수도 있었다. 이 컨벤션 센터에서는 홍콩 반환 기념일 행사가 개최되고,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하는 '아트 바젤 홍콩(Art Basel Hong Kong)'이 매년 3월에 열리는 등 행사가 가득했다. 완차이 지역은 컨벤션 센터뿐만 아니더라도 세련된 카페나 음식점, 재미있는 골목, 유명 인테리어 가게 등을 찾는 발걸음에 늘 분주한 곳이었다. 코즈웨이 베이(Causeway bay) 지역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는데 나는 가성비 좋다는 가구점 이케아(Ikea)에 갈 때면 이 동네로 향했다. 어드미럴티역(Admiralty station)에 있는 퍼시픽 플레이스(Pacific Place) 또한 유명 쇼핑몰이자 사무지구로, 나는 이곳에 있는 큰 서점에서 책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퍼시픽 플레이스에서는 홍콩 공원이 가까워서 도심 속 공원으로 종종 나가기도 했다. 한편 IFC는 쇼핑몰(IFC mall)만으로도 흥미로운 곳이었다. 두 개의 층에 걸친 커다란 애플 센터(Apple Centre)가 있고, 관광객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식당도 많았다. 다양한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고급 슈퍼도 있어 가끔 들렀다. 지하철, 버스, 도심공항터미널까지 이용할 수 있는 교통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홍콩에서 혼자 놀기의 진수’를 찾는 사람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어느 날, 문득 이 소란스러운 도시가 내게는 참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20년. 이제 홍콩의 길거리에서는 영어보다는 광둥어와 북경어가 훨씬 많이 들렸다. 중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내게는 일상생활에서도, 텔레비전에서도, 버스에서 나오는 라디오에서도 아무도 아무런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간혹 지나가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말소리 정도나 다른 누군가의 영어로 된 대화 정도만 지나갈 뿐이었달까. 처음에는 낯설고 외로워 남편의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온갖 소리로 가득한 홍콩에서 머무는 동안 내 머릿속은 오히려 덜 복잡했다.


언어가 부족해도 장보기나 식당가기와 같은 과업을 수행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스마트폰의 번역 앱을 이용하면 물건의 정보를 확인하는 일이든,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든 모두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가족들과 매일 얼굴을 보고 친구들과는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홍콩 생활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들은 홍콩에 살고 있는 수많은 한국인 선배들이 만들어 둔 온라인 ‘카페’, ‘블로그’, ‘카톡방’ 등에서 얻을 수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불특정 다수를 위한 선의는 감동적일 정도였다. 자세하고 친절한 정보가 사진과 함께 눈앞에 펼쳐졌다. 이 모든 일을 나는 ‘고요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범죄와 연결되기도 하지만 친절과 선의를 더욱 많은 사람에게 베풀어 줄 수도 있으니, 결국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어쨌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그래도 누군가와의 시답지 않은 수다가 그리웠다. 내가 속한 사회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회 안으로 한 발짝도 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것도 느꼈다. 그때쯤 드디어 내게도 친구가 생겼다. 바로 매일 우리 방에 청소를 해 주러 오는 ‘만티’라는 네팔인 아주머니였다. 만티는 남편이 영국인인 덕분인지 매우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처음에는 인사 정도만 나누고 그녀가 일하는 동안 혹시나 불편해할까 봐 밖에 나가 있곤 했지만, 점차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그녀가 오는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당시 나의 주요 과제 목록에는 홍콩에 익숙해지기 외에도 괜찮은 동네에 적당한 집을 구하기가 있었다. 홍콩에서 20년째 살고 있다는 ‘네팔에서 태어난, 지금은 홍콩인인’ 만티는 강북 번화가 조던역(Jordan station) 근처의 유주택자였다. 집 구하기를 위한 수다 떨기에 좋은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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