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에 서서 바닥을 힐끗 쳐다본다. 오른쪽을 보아야 하는지 왼쪽을 보아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주는 표시를 확인한다.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다가 몇 번 사고가 날 뻔했다. 다시 겸손해졌다. 자동차의 운전석만 반대인 줄 알았더니, 오래된 도시의 복잡한 매력 때문인지 모든 것이 여전히 새롭다. 다행히 이 도시는 참으로 아름답다. 낮에도 밤에도 반짝이는 스카이라인이 바다 위에 펼쳐져 있는,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홍콩의 얼굴. 거기에 의외로 풍부한 녹지를 자랑하며 산과 공원을 종종 만나게 해 주니 이곳에서의 여행 같은 삶도 그리 고단하지만은 않다.
“홍콩에서 살아도 되겠어?”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말했다.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홍콩이라니. 당황스러워하는 나에게 덧붙이기를 만약 이직을 결정하면 한 달 반 후에 출국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 외국 회사는 절차가 오래 걸린다면서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남편은 미안해하며 그쪽 회사 사정상 서두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양가 부모님들에 대한 걱정과 이제 막 시작한 나의 대학원 박사과정이 생각났다. 지난 세월의 무게 때문일지 자식들의 불효 때문일지 양가 아버지들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나는 삼 대가 덕을 쌓아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주말부부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의 신혼집으로 들어와 대학원 새 학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콩이라니.
남편도 여러 번민의 밤을 보낸 후에 겨우 말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라는 뜻일 것이다. 금융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서울보다는 홍콩이 조금 더 다양한 자극을 제공하는 환경이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비행기 이륙 후 세 시간 반의 거리.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같이 가는 것과 남편 혼자 보내는 것 두 가지였다. 한국에 남아 계획했던 공부를 진행하고 양가 부모님을 살펴야 한다며 머릿속으로 정리했지만 결국 선택한 것은 요즘 새댁답지 않다는 함께 홍콩행이었다. 남편이 홍콩에서 몇 년을 보낼지 알 수 없었다. 겨우 주말부부 생활을 정리했는데 다시 월말 또는 분기별 부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깨소금 솔솔 볶아가며 신혼살림을 해 보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이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진지한 커리어 계획을 이겨버렸다.
홍콩은 낯설지 않았다. 우리의 오랜 연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홍콩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당시 ‘남친’이던 남편이 있다. 대학 졸업과 군 생활 내내 미래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에 시달리던 남자친구가 첫 직장을 홍콩의 금융회사에 얻었으니, 참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그는 일 년 동안 홍콩에서 일을 배우고 서울의 사무실로 돌아오게 되어있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겠다며 양가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고 2012년 겨울, 내 생애 첫 홍콩 방문을 실행에 옮겼다. 드디어 첵랍콕(Chek Lap Kok) 공항에 내려 두리번두리번 반가운 얼굴을 찾긴 찾았는데, 아니 왜지? 세상 불쌍해 보였다.
‘혼자 타지 생활을 하느라 많이 고단했나? 음식이 입에 안 맞나? 내가 유난인가?’
여러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함박웃음을 보여주는 그의 손을 잡고 일단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러 가기로 했다.
평소 말수가 적은 이 남자가 시끄러워진다는 뜻은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기도 하지만 무엇인가 염려되는 점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공항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은 공항철도이나 금액이 좀 비싼 편이니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좀 걷자고 했다. 아무렴 어떤가. 처음 이층 버스를 타본 나는 여행의 설렘에 더해 잔뜩 신났다. 낯설게 생긴 초고층 아파트를 지나며, 홍콩에는 집값이 너무 비싸서 ‘랙(lag) 걸린’ 건물이 많다고 그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컴퓨터 화면이 갑작스럽게 정지되거나 오류가 난 것처럼 건물이 계속 올라간다는 이야기였다. 한강보다 폭이 좁아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저쪽은 바다라는 그의 설명과 함께 멋진 다리를 건넜다. 바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버스가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다. 버스에서 내려 복잡하고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 바퀴벌레가 가끔 나타나는 거리를 이리저리 걸어 드디어 그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셩완(Sheung Wan) 지역이라고 했다, 홍콩섬 중심지에 있는 좋은 동네라고 했다.
건물 입구는 매우 작았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해 주는 것으로 보아 보안은 괜찮은 것 같았다. 전차가 다니는 길옆에 건물이 있어서 다소 시끄러웠으나 덕분에 교통이 편리하다고 했다. 작은 엘리베이터는 의외로 잘 운행되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커다란 철문이 현관문 앞에 있었는데 그는 열쇠를 주섬주섬 꺼내서 두 문을 순서대로 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손바닥만 한 그의 아지트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었다.
분명히 월세가 백오십만 원쯤 된다고 했다. 백오십만 원이라니. 아무리 홍콩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금융회사 초년생에 걸맞은 좋은 숙소를 얻었나 보다고 생각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서울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으니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금 다른 느낌일 수도 있긴 하겠다) 그런데 일곱 평 남짓한 이 원룸은 뭔가. 미닫이문으로 구분된 화장실에는 변기 하나와 샤워부스 하나가 겨우 달랑 앉아있었다. 부엌으로 추정되는 공간은 매우 아담한 냉장고 한 개와 내 두 손을 모아서 펼치면 꽉 차는 싱크대 하나, 인덕션 한 구로 가득 찼다. 방인지 거실인지 알 수 없는 곳에 옷걸이와 일인용 침대, 작은 탁자, 의자 두 개 정도가 있었다. 여유 공간은 전혀 없었다. 189센티의 거구가 편히 누울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천장에는 곰팡이가 가득했고 바닥 곳곳에는 바퀴벌레약이 보였다. 며칠 전에는 지갑에도 곰팡이가 펴서 버려야 했다는 슬프고 해맑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부엌을 조금 더 자세히 점검하기로 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홍콩의 집은 대부분 좁고 부엌 크기도 작아서 많은 사람이 세 끼를 밖에서 해결한다고, 그가 설명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럼 그동안 뭘 사 먹었냐고 물었더니 쭈뼛쭈뼛 대답하기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아침은 회사에서 주는 과일을 먹었고 점심 저녁은 주로 맥도널드나 시리얼을 애용했다며, 일주일에 여덟 번은 햄버거를 먹었다고 솔직히 답했다. 말문이 막혔다. 집에서 달걀프라이라도 해 먹고 고기라도 구워 먹지 그랬냐며 다그쳤다. 그랬더니 홍콩의 여름은 너무나 덥고 습해서, 겨울은 너무나 춥고 습해서 집에 물기가 있으면 안 되는데 싱크대가 매우 작다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물바다가 되어 또 곰팡이가 번지기 때문에 요리를 자제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공항에서 만난 불쌍한 몰골의 사내에게 나는 화를 냈었다.
“아니 미식의 도시라는 홍콩에서 왜 이러고 살고 있어? 건강 다 잃으면 어떡하려고?”
오랜만에 만난 지 두 시간 만에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나에게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러나 너무나 황당한 프러포즈를 했다.
“홍콩은 물가가 너무 비싸. 내가 이곳에 숙소를 정한 이유는 회사가 있는 센트럴에서 삼십 분 정도만 걸으면 출퇴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어. 그렇게 교통비를 아끼고 맥도널드 덕분에 식비도 아끼고 있어.”
(삼십 분을 걸으면 와이셔츠가 비 맞은 것처럼 흠뻑 젖게 되어 회사에 갈 때는 운동복을 입고 도착해서 갈아입는다는 부연 설명은 며칠 후에 했다.)
“아니 왜 그렇게 미련하게 아끼는 거야? 도대체 왜?”
“하루라도 빨리 돈을 모아야 결혼해서 함께 살 수 있잖아.”
세상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이처럼 어이없는 프러포즈라니. 그의 미련함에 화가 나고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뭉클했다. 나도 여자인가 보다 싶었다. 어쨌든 하루라도 빨리 좁고 습하고 벌레 가득한 홍콩에서 이 남자를 탈출시켜 데리고 살겠다고 다짐했었으니, 결국 그의 승리였나.
홍콩에 머무는 동안 남자친구는 관광지로 나를 안내했다. 물론 본인도 초행길이었다. 그동안은 결혼자금 모으느라 일만 했다고. 향기로운 항구라는 근사한 이름을 가진 홍콩. 홍콩섬과 구룡반도, 그리고 란타우섬, 라마섬 등 여러 섬으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했다. 흔히들 생각하는 홍콩이란 그중에서도 홍콩섬의 모습인 것 같았다. 이층 버스와 트램이 소란스럽게 다니는 길에는 곧 쓰러질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건물과 최근에 만들어진 높은 빌딩들이 묘한 조화 속에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은 신기하게도 지하와 지상에서 서로 잘 연결되어 있어서, 홍콩섬의 중심지인 센트럴역(Central station)에서 대표 관광지인 소호(Soho)까지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덥고 습한 홍콩에서 시원한 실내로만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만들었다는 고층 빌딩들은 관리인들이 잘 지키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도 유리로 된 육중한 문도 모두 깨끗하게 반짝반짝 빛났다. 온도는 쾌적했으며 화장실은 훌륭했다. 게다가 마침 12월에 방문한 덕분에 어디를 가든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가득 담은 화려한 장식이 반겨주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축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여행자의 눈으로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 홍콩은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멋진 도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홍콩에는 그 이후에도 두어 번 더 갔다. 늘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랬던 홍콩에 오 년 만에 다시 간다니. 반가움과 설렘보다는 각오가 앞섰다. 스무 살 이후로 배낭여행이다 출장이다 해서 비행기를 꽤 많이 탔었다. 한 해를 채 못 채운 짧은 시간이었지만 파리에서 지내본 경험도 있었다. 그래서 외국살이에 대한 두려움은 적은 대신 걱정이 많아졌다. 북경어, 광둥어, 영어뿐 아니라 인도네시아어, 타갈로그어에 아랍어까지 섞여 정신없이 말을 걸어오는 홍콩에 대한 지난 경험이 떠올랐다. 남편은 그때보다는 조금 더 좋은 대우와 월급을 받고 이직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홍콩은 녹록지 않았다. 따로 주거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 사이 월세와 물가는 더 많이 올랐을 것이다. 멀찍이 떨어져서 아름다운 홍콩의 얼굴을 보았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아쉬워하셨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흔쾌히 보내주셨다. 시어머니께서는 시아버지의 잦은 입·퇴원과 통원치료로 많이 지쳐계셨다. 출국일이 정해지자 종종 눈물을 보이시면서도 아들 앞날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시는 눈치셨다. 남편은 외동아들이라 어머님께서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으셨음에도 그분의 결정은 단순했다. 엄마의 마음이란 그런 것일까. 가까운 곳이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반나절 만에 달려올게요, 요즘은 영상전화도 쉽게 하니까 한결 나을 거예요, 라며 말도 안 되는 위로만 드렸다.
엄마는 결국 된장, 고추장에 간장까지 모두 손수 담그고 보내주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서울에서, 파리에서, 세종시에서도 내가 혼자서 잘 살았으니 당신은 딸 걱정 안 한다면서. 대신 나중에 홍콩 놀러나 한 번 가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내 얼굴을 보러 오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병원을 핑계로 상경하신다길래 나는 큰마음을 먹고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을 받았다는 강남의 어느 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아버지와 둘이 오붓이 앉아 식사하고 전날 꾹꾹 눌러 담았던 엽서 한 장을 드린 후에 서울역에서 이별했다. 동대구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아버지는 내 엽서를 읽고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한편 나는 새 학기를 준비하며 같은 연구실 학생들과 여러 스터디에 참여하고 있었다. 연구실의 새 사업 마련이라든지 교수님의 수업 자료 준비 등에도 도움을 드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공부를 중단하고 남편 따라 홍콩에 가겠다고 말씀드렸을 때, 교수님께서는 내 마음이 이미 정해진 것을 눈치채시고는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길에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했다. 지금 나는 평생 후회할 짓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이렇게 얄팍했었나. 수업을 더 듣고 나중에 홍콩에 있는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갈 걸 그랬나. 이렇게 나는 스스로 '경단녀'를 선택하고 다시는 사회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등등. 지난 시간 동안 나름 모범생으로, 정해진 듯 보이는 길 위에서 앞만 보며 달렸던 나는 무엇인가 막막한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의 이삿짐은 단출했다. 남편도 나도 옷이나 물건에 욕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 가진 것이 많지 않았고 전세 기간이 남은 서울의 집은 고민 끝에 일단 그대로 두기로 했다. 막상 홍콩에 가서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고 한국에 자주 들어와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홍콩에는 외국인이 많은 편이라 기본 가구와 집기가 설치된 집을 찾기가 쉽다고 했다. 남편의 이직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홍콩에서의 근무 경험이 있어서인지 남편과 나의 비자도 신속하게 발급되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주변 사람들과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며 인사를 나눴다. 어떤 이는 나의 여정을 부러워했고 어떤 이는 나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했다. 그 모든 말이 다 맞는 말일 것이었다. 나는 그저 새로운 여행을 나선다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