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새댁의 하루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by 작은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고기를 이렇게 팔다니. 깜짝 놀랐다. 세련된 대형 마트도 근처에 있지만, 재래시장의 식품들이 신선하고 저렴하다는 소문을 듣고 집 근처 재래시장에 처음 가본 날이었다. 타이콕추이 재래시장(Tai Kok Tsui wet market)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광둥어를 못 하는 내가 발걸음을 옮기기까지는 용기가 좀 필요했다. 만사형통의 길로 이끌어주는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쥐고 시장 문을 열었다. 재래시장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네 노량진 수산시장처럼 깔끔한 대형 건물 내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함께 있었고 건물 위층에는 지역민들을 위한 도서관과 체육관 등의 시설도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홍콩 특유의 냄새에 재래시장의 향기가 더해져서 훅 들어왔다. 1층에는 생선가게와 정육점, 냉동식품 가게 등이 있어서 더욱 다채로운 향기가 났다. 한 층 올라가면 채소와 과일가게가 있었다. 수조 속에서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는 물고기나 큰 게, 조개류 등 수산물은 우리나라에서 보던 것과 종류가 조금 달라도 낯설지는 않았다. (수산물 가게 구석의 새장 같은 곳에 들어있던 두꺼비 친구들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정육점 앞에서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덜 손질된 고기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고 한쪽에서는 아직 피도 흐르고 있었다. 아, 고기 부산물도 걸려 있었다. 살림 내공 제로인 왕초보 새댁의 눈에는 너무 무서웠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태연한 얼굴로 삼겹살 한 근을 무사히 주문하여 값을 치렀다. (혹시 몰라서 남편의 회사 동료에게 ‘삼겹살 한 근’을 광둥어로 써서 사진 찍어 보내 달라고 부탁했었다) 참, 홍콩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기 때문에 '고기'라고 하면 대부분이 돼지고기였다. 신선한 고기를 바로바로 손질하기 때문에 상온에서 그렇게 판매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났다. 어쨌든 두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날의 시장 방문은 무사히 고기를 산 것으로 위안 삼으며 서둘러 마무리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그다음부터는 심심하면 시장 구경을 갔다. 홍콩의 대형 마트에서는 전 세계 곳곳의 음식 재료와 주류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물건의 종류도 서울의 마트보다 훨씬 많았다. 의외로 시장에서 구하기가 어려운 대파나 상추는 마트에서 샀다. 시원하고 익숙하며 쾌적한 마트. 그런데 뭐랄까, 역시 사람 사는 에너지는 시장에 있는 것 같다고 할까. 재래시장에 가면 홍콩 사람들의 일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고 재미도 있었다. 가격은 여느 시장처럼 모두 상인들이 손으로 크게 써 두었다. 나는 원하는 것을 고르고, (내가 외국인임을 눈치챈) 상인과 함께 계산기를 들고 숫자를 더해 값을 매겼다. 그들은 친절했다. 때로는 사소한 가격 흥정조차 못 하는 외국인이 안타까웠는지 과일가게 상인은 과일을 한두 개 더, 수산물 가게 상인은 조개 몇 개를 더 넣어 주었다.


과일과 채소를 파는 곳에는 건어물과 두부, 달걀을 파는 가게도 있었다. 신기했던 것은 향과 부적을 파는 상점도 시장에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는 홍콩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풍수나 미신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길을 걷다 보면 건물마다 가게마다 매일 향을 피우는 조그만 공간이 길가에 있었다. 해가 진 후 가짜 돈을 태우는 날도 있었고. 지난번에 만난 부동산 직원 말에 따르면, 풍수와 관련된 이유로 홍콩인들이 선호하지 않는 동네가 있다고 했다. 자살 등 흉사가 있었던 집은 반드시 집을 구하는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장을 보고 매일 세 끼 식사를 차렸다. (성실히 살림을 수행했던 돌아오지 않는 신혼 시절이여) 도무지 식단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가끔 ‘싱가포르식 닭 덮밥 요리’를 한다는 곳에서 세트메뉴를 주문했고, ‘태국식 똠얌꿍’ 국물을 포장해 오기도 했다. ‘사천식 탄탄면’을 맛있게 하는 집도 찾아서 종종 남편을 데려갔다. 남편은 매우 놀라워했다. 자기는 예전에 일 년을 살았지만 홍콩에 대해서 여전히 아는 것이 없는데 나는 두 달 만에 재래시장에 단골 가게도 만들고 로컬 동네의 맛있는 식당을 찾아낸다고 했다. 나는 이게 다 홍콩 관련 책을 부지런히 읽고 홍콩 살이 선배들이 온라인에서 전파해주는 소중한 정보들을 열심히 확인하는 덕분이라며 으쓱으쓱하다가, 아니다, 바로 주부의 힘이다, 라며 거만하게 웃기도 했다.


사실 사람들은 나를 걱정했다. 바쁜 일상을 살던 사람이 말도 안 통하고 친구도 하나 없는 타지에 가서 혼자 있으며 우울해질까 봐 염려해서였다. 친정엄마는 (의외로) 매일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늘 잘 지낸다고 말했다. 이러쿵저러쿵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려고도 노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걱정대로 멍하거나 우울한 날도 많았다. 혼자 놀기도, 온종일 잠자기도 며칠이면 되었다. 참, 그즈음 얼굴도 모르는 대학 선배의 소개 덕분에 어느 영국 회사의 프리랜서 일을 시작했었다. 한국의 공정거래법과 관련된 자료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소중한 용돈 벌이가 되어주었지만 일이 많거나 매일 하는 것은 아니어서 좋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했다. 아이를 갖기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매번 뜻대로 잘되지 않아 속앓이 하는 중이기도 했다. 흠, 도대체 임신이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방법론까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남편은 본인을 도구로 사용한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기대하고 기다리다가 아직은 찾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몸을 움직여야 잡념이 덜하니까. 홍콩에서 가장 크다는 요가 체인점으로 상담을 받으러 갔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홍콩의 남대문 시장 정도 되는 몽콕 시장 근처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한 번에 다닐 수도 있었고 삼십 분 정도 걸어서 갈 수도 있었다. 올림픽 역에는 상당히 큰 쇼핑몰이 있었다. 역은 여러 건물과도 잘 연결되어 있어서 그쪽으로 지나가면 길도 쾌적했다. 우리나라와 달리 연간 멤버십으로 등록한다고 했다. 한 번에 큰돈을 쓰는 일이라 망설여졌지만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멤버십 등급에 따라 전 지점의 요가 스튜디오를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냥 가는 곳만 가기로 했다. 가장 큰 요가 체인점답게 스튜디오와 샤워 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프로그램도 다양해서 좋았다. 강사들이 광둥어와 영어를 모두 사용하며 수업을 진행해 주어서 그다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참여할 수 있었다. 요가 스튜디오까지 운동 겸 걸어 다니며 구경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종종 장을 보았다.


요가를 시작하니 시간도 잘 가고 한결 마음이 나아졌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