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맞춤형 여행으로 모십니다. 나를 만나러 홍콩으로 오세요.’
일상의 무료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요가 다음 단계로 추진했던 것은 한국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홍콩 여행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아직 아이도 없고 얽매인 조직도 없으니 여행 기간 내내 밀착 VIP 코스로 모실 수 있다며 지인들을 유혹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가이드를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시기인 것 같았다. 뒤돌아보니 실제로도 그랬다. 나의 연이은 임신, 출산, 육아뿐 아니라, 홍콩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전 세계에 신종 바이러스가 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행하기에 참 좋은 시기였다.
그렇게 2017년 여름부터 2018년 봄까지, 사촌 동생 부부가, 동생과 조카가, 고등학교 때의 단짝이, 큰이모네의 대가족이, 그리고 친정 부모님이 나의 ‘VIP 여행사’ 놀이에 동참해 주었다. 한 다리 건너서 알게 된 지인들 - 친구의 부인이나 사촌 동생의 회사 동료 - 에게는 추천 여행 코스나 나만의 맛집 목록을 정리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홍콩에서 지내보니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3월이나 4월, 또는 9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비교적 덜 덥고 덜 습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각자의 일정이 모두 다르다 보니 가장 덥고 태풍이 잦은 8월에 다녀간 팀도 있었고 (바닥 난방이 안 되어 더욱) 춥고 습한 1월에 다녀간 팀도 있긴 했다.
여행이 결정되면 나는 방문할 사람의 연령대와 (최연소 방문객은 35개월 조카였고 최고령 방문객은 62세 아버지였다)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의 취향 및 관심사를 반영하여 해당 기간의 여행 계획을 세워 보내주었다. 나의 제안서를 받은 사람이 크게 만족하기도 했고, 때로는 가보고 싶은 곳이나 먹고 싶은 음식을 알려주어 함께 수정하기도 했다. 나는 2박 3일의 짧은 여행은 추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3박 4일 일정으로 왔다. 마카오를 포함하려는 경우에는 4박 5일 이상으로 조정할 것을 추천했었다. 하지만 사촌 동생 부부는 신혼여행으로 유럽으로 향하던 길에 홍콩을 경유했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나름 유쾌하게 다녀갔다.
여행 예산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히 나누고 금액에 맞추어 세부 사항을 조정하면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 출발 전에 한 번 더 홍콩 날씨에 적합한 옷차림과 준비물을 알려주었다. 전압이 다르니 돼지코를 챙기면 좋다고 덧붙이곤 했다. 휴대폰 데이터 로밍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비행기 여행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입국 관련 서류 작성 방법과 수속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인터넷을 뒤적여보면 자세하게 설명된 자료를 쉽게 얻을 수 있어서 해당 링크만 보내주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도착 시각에 맞추어 주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마중 나갔다.
비행기에서 막 내린 그들이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주면, 그때부터 나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몇 번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아, 이 시는 어쩌면 이렇게나 기다림을 잘 표현하는 것일까. 드디어 게이트로 내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이 먼 곳까지 나를 믿고 여행길에 나서 준 그들의 얼굴을 보며, 다른 사람들의 눈은 신경도 안 쓰고 겅중겅중 뛰어가 두 팔을 벌렸다.
여행의 첫날은 가이드하기에 어려운 날이었다. 아침부터 공항으로 이동하고 비행기를 타느라 많이 고단할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도착 이후의 일정을 숙소에서 쉬는 것으로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호했던 것은 ‘근사한 에프터눈 티(afternoon tea)’ 마시러 가기였다.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는 예쁜 찻잔과 함께 스콘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층층이 쌓아 올린 삼단 트레이를 만날 수 있는 찻집이 꽤 많이 있었다. 홍콩인들은 일상 속에서 커피나 홍콩의 대표 메뉴 ‘밀크티(milk tea)’ 한 잔 정도만 간단히 마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거나 약속이 있을 때는 느긋하고 화려한 에프터눈 티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에프터눈 티는 여행 온 기분을 물씬 느끼도록 해 주어서인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는 내 고객들의 선호를 미리 조사해서 - 한두 시간 정도 앉아서 예쁘고 비싼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 의향이 있는지 등 - 적당한 곳에 예약해 두곤 했다. 영화배우 장국영이 생전에 좋아했다는 만다린 오리엔탈(Mandarin Oriental) 호텔의 클리퍼 라운지(Clipper Lounge)는 맛있는 스콘과 특유의 장미 잼으로 유명한데, 비운의 영화배우와 관련된 스토리가 얹어지니 만족도가 높은 편이었다. 페닌술라 호텔 더 로비의 에프터눈 티도 고전적인 맛과 멋, 분위기 등으로 매우 유명하지만 투숙객 이외에는 예약이 어려워 일정에 맞춰 방문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홍콩의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구룡역 국제상업센터(International Commerce Centre: ICC) 고층부에는 리츠칼튼 호텔이 있다. 호텔의 102층 라운지에서 즐길 수 있는 에프터눈 티는 맛보다는 ‘전망’ 덕분에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참, 리츠칼튼 호텔의 118층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바’라는 오존 바(Ozone Bar)가 있어 명성이 자자했으나 나의 건전한 고객 중 방문 희망자는 없었다. 이 외에도 현대적 감성의 찻집 체인인 드 조엘 로부숑(de Joel Robuchon)도 선택지에 있었고, 포시즌스 호텔의 라운지나 리펄스 베이에 있는 베란다(The Verandah)도 좋은 곳들이었다.
나의 고객들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 달콤하고 예쁜 디저트를 즐기며 여독을 풀었다. 그렇게 차를 마시며 밀린 안부를 주고받는 것은 나에게도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방문객을 맞이할 때마다 큰돈을 들여 찻집에 가는 것은, 솔직히 일상 속의 주부에게는 부담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나도 근사한 곳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날을 위해 번역 일을 더 열심히 했다. 내가 가끔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돌아오면 남편이 그렇게 부러워해서 아주 가끔 남편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참, 에프터눈 티를 거부한 사례는 두 팀 있었다. 당일치기로 다녀간 사촌 동생 부부는 ‘네 글자 제목의 홍콩 영화’에 대한 낭만이 가득한 제부의 취향에 맞춰 역사 깊은 로컬 카페인 미도 카페(Mido Cafe)를 선택했다. 엄마는 예전에 나와 함께 한 유럽 여행 때 런던에서 본고장 에프터눈 티를 경험했으니 이번에는 찻집에 돈을 쓰는 대신 여독을 풀기 위한 마사지나 받겠다고 했었다. 두 팀 모두에게 탁월한 결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