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행은 둘째 날부터 시작되었다. 여러 번 홍콩에 다녀간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야기이지만 처음 또는 두 번째 놀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홍콩섬과 딤섬이 중요했다. 홍콩섬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 일대의 주요 관광지 - 셩완역에서 센트럴역 사이의 동네 - 는 ‘올드타운 센트럴(Oldtown Central)’이라고 불린다. 서울의 인사동과 이태원, 홍대 입구가 여의도 근처에 섞여 있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올드타운 센트럴이라는 작명은 참으로 적절해 보였다. 세련된 홍콩섬 중심의 오래된 홍콩. 나는 주로 방문객들을 (영화 등에 나와서 유명해진)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로 안내해 소호 지역으로 데려갔다. 부산처럼 홍콩섬도 경사가 심하다. 경사면에 사는 사람들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고안된 것이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재미있게도 출퇴근의 시간대를 반영해서 에스컬레이터 - 사실은 마트에 있는 긴 무빙워크가 몇 개 - 방향이 바뀐다.
마치 남대문 지하상가 같은 길을 지나서 긴 무빙워크를 몇 번 갈아타고 소호 지역으로 들어가면 인테리어 소품 가게, 갤러리, 그리고 무엇보다 할리우드 거리(Hollywood Road)의 여러 이름난 벽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벽화 앞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세계 곳곳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은 눈치껏 알아서 순서대로 벽화와 함께 추억을 남겼다. 부끄러워하던 나의 고객들도 막상 그림 앞에서는 어찌나 신나게 자세를 잡는지. 역시 여행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렇게 소호 이곳저곳을 산책하다가 피곤이 몰려올 때쯤 에그타르트로 유명한 타이청 베이커리(Tai Cheung Bakery)나 새콤달콤한 사탕과 초콜릿이 가득한 예쁜 군것질 가게에서 (Mr Simms Olde Sweet Shoppe) 무엇인가 하나씩 사 먹으며 품평회를 했다. (홍콩 시위와 그 이후 지속되는 코로나 사태로 타이청 베이커리는 문을 닫았다고 한다. 아쉽다.)
달콤한 간식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인사동 쌈지길 같은, 과거에는 기혼 경찰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는 PMQ로 갔다. PMQ에 있는 작은 공방에는 가끔 혼자서도 구경 가곤 했다. PMQ 부지는 꽤 큰 편이어서 마당이나 옥상에서 종종 플리마켓이나 전시 행사도 열렸다. 다리가 아플 때는 마당의 벤치에 앉아서 쉬었다. PMQ에서 나와 한결 한적해진 길가의 카페와 골동품 가게를 힐끔힐끔 구경하다 보면, 19세기 중반에 세워진 홍콩의 가장 오래된 도교 사원이라는 만모 사원(Man Mo Temple)에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처음 도교 사원에 들어갔을 때, 천장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대형 향들과 그 향들이 피워내는 온몸을 휘감는 냄새에 깜짝 놀랐었다. 불교 사찰과 비슷한 듯 매우 다른 도교 사원이 신기했다. 만모 사원은 무예의 신 관우와 학문의 신 문창제군을 모시는 사원이라고 했다. 나는 ‘관우라니, 삼국지에 나오는 그 관우의 이름을 실제로 만나다니’ 하며 흥미로워했다. 만모 사원은 규모가 상당히 작은 편이고, 구룡반도에 있는 웡타이신 사원은 홍콩의 도교 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산책로도 잘 되어있는 사원이라 두 사원을 비교하며 다녀보기도 했었다. 홍콩 사람들은 자녀의 학문적 성공을 기원할 때는 만모 사원을, 걱정을 덜어내거나 병을 낫게 하고 싶을 때는 웡타이신 사원을 찾는다고 했다. 하지만 아마도 마음 내키는 곳으로 가지 않을까. 두 손 가득 향을 흔들며 피우는 모습은 (한 번에 하나의 향을 꽂는 모습만 봤던 내게) 매우 낯설었다. 그래도 본인 또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담는 마음은, 유럽의 성당에서나 우리나라의 절에서나 다 비슷할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여러 가지의 선택지가 생겼다. 딤섬, 완탕면 등 전형적인 홍콩식 음식을 먹을 것인지.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많다는 훠궈나 운남식 쌀국수, 또는 사천 음식을 먹을 것인지. 아니면 네팔이나 중동 음식점에 가볼 것인지 등등. 소호에는 다양한 음식점들이 있었지만 나의 고객들은 주로 딤섬이나 완탕면을 먹어보고 싶어 했다. 딤섬이 먹고 싶을 때에는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고 비교적 저렴한 팀호완(Tim Ho Wan)을 선택했다. 여러 체인점 중 동선에 맞게 IFC 지하에 있는 팀호완에 들러 적당히 골라 포장했다. 그리고 맞은편의 도시락 가게에서 몇 가지를 추가 구매하고 편의점에서 음료 몇 개를 더해 IFC 몰의 야외 옥상정원으로 나갔다. 바다를 보며 소풍을 즐길 수 있는 현지인들의 장소라고 거창하게 설명하면서. 사실은 '미식의 도시 홍콩'에 즐비한 고급 식당에서 한 끼를 대접하지 못해 못내 미안했다. 고맙게도 오랜만에 만난 내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는 고층 빌딩에서의 소풍도 즐겁게 받아들여 주었다.
완탕면은 침차이키(Tsim Chai Kee Noodle) 같은 유명 체인점에서 먹었다. 고객들이 딤섬과 완탕면, 콘지 등을 함께 맛보고 싶어 할 때는 IFC 몰이나 구룡역 ICC의 쇼핑몰에 있는 정두로 갔다. 운남식 쌀국수는 탐자이삼거(TamJai SamGor)가 대표적인 체인점이라 믿을만했다. 매운 사천지방 음식은 ICC 쇼핑몰에 있는 답파(Dab-pa Peking & Szechuan Cuisine)나 완차이 지역에 있는 유촨클럽(Yu Chuan Club)이 실패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함께 이곳, 저곳에서 식사해 보니 완탕면이나 운남 쌀국수 등은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강했다. 사천 음식은 매운맛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역이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 입맛에는 잘 맞았다.
오전 일정을 무사히 끝내면 방문객들의 연령대와 몸 상태에 따라 숙소에 한 번 들어가서 쉬다가 다시 나오기도 하고,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를 기준으로 지도에서 왼쪽인 란콰이퐁(Lan Kwai Fong)과 홍콩 프린지클럽 쪽으로 가기도 했다. 란콰이퐁은 클럽과 술집으로 붐비는 곳이므로 해가 진 후에 방문해야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홍콩 프린지클럽 주변은 홍콩섬의 오래된 건물과 갤러리를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미술에 관심이 있는 경우 좋은 산책로였다. 홍콩섬의 트램을 타보고 싶어 할 때는 함께 트램을 타고 완차이 쪽으로 이동했다. 느리고 작은 교통수단이지만 트램 위층에 타면 다들 즐거워했다. 완차이의 카페에서 - 커피아카데믹스(Coffee Academïcs)나 르빵쿼티디엥(Le Pain Quotidien) 같은 -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예쁜 길거리를 걷다가 인테리어 가게에 들어가 구경했다.
홍콩섬에서 가장 높은 곳인 빅토리아 피크(Victoria Peak)에 오르고 싶어 할 때에는 피크트램으로 갔다. 여행 시기에 따라 피크트램에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때에는 버스나 택시를 타고 정상에 올라가서 구경하고 내려올 때 피크트램을 타거나 버스를 탔다. 빅토리아 피크에서 내려다보는 홍콩의 전망은 시간대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랐지만 내 눈에는 모든 모습이 좋았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가끔 홍콩대학교 쪽의 길을 따라 걸어서 올라갔다가 걸어서 내려왔다.
참, 빅토리아 피크는 가고 싶지 않지만 멋진 전망을 보고 싶을 때는 two IFC의 55층에 있는 화폐박물관으로 향했다. 홍콩 통화청(Hong Kong Monetary Authority)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으로, 홍콩과 관련된 화폐와 금융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방문의 진짜 이유는 전망. 홍콩섬과 구룡반도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신분증만 맡기면 무료라는 점도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