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트라우마는 있는 듯하다. 나의 의지, 나의 행동으로 비롯된 것이 아닐 경우는 더 얄궂고 더 애달프며, 발버둥 치려 해도 언제나 그 자리인 듯하다.
시댁에 가면 제일 듣기 싫은 말은 “신랑이 왜 저렇게 말랐냐” 하는 것과 “왜 그렇게 털이 많냐”라고 하는 것이다.
신랑의 키는 거의 180cm에, 몸무게가 60kg도 나가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아주 마른 체형이었으며, 성장기 때 키만 훌쩍 컸다. 결혼 생활 동안 늘은 것은 아저씨 배를 장착하면서 허리 벨트의 구멍 위치만 달라졌다고 하는 것이다. 신혼 초부터 시어머니의 관심사는 며느리가 아들을 잘 챙겨 먹이는지 하는 것이었다.
“왜 저렇게 말랐냐, 밥 안 챙겨주냐” 어머니는 매번 이렇게 말했다. 이런 말에 맞대응을 잘 못하는 나는 매번 버벅거렸다.
신랑 집안은 두 개의 DNA 줄기가 존재하는 듯한데, 한 줄기는 일반적인 남자 키에 통통한 체형, 다른 한 줄기는 멀대 같은 키에 마른 체형이다. 신랑은 후자였다. 그러니 살이 찔 리가 없는 것이다. 신혼 초에는 열심히 챙겨 먹인다고 우유랑 여러 가지를 챙겨 주었다. 우유를 먹고 설사하는 것을 보고, 우유만 소화를 못 시키는 줄 알았다. 몇 년 전 건강검진에서 밝혀진 사실은 몇 가지 성분을 분해하는 효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생적으로 그런 것이다. 두 개의 DNA 줄기가 교대로 4명의 남자 형제에게 퍼져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신랑을 통해서 어머니에게 얘기하고, 십 년의 수명을 가진 트라우마 하나를 처리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약간 편해졌다.
나의 DNA는 친정아버지의 DNA를 빼박 했다. 나의 성씨 쪽 딸들은 대부분 다 통통하며, 키도 아담 사이즈가 많다. 거기에 나는 친정아버지와 얼굴이 붕어빵이며, 털도 많은 편이다. 학교 다닐 때 생물시간에 배운 DNA 가계도는 너무 재미있어서 나의 털, 얼굴에 대하여 그냥 DNA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그냥 DNA의 영향이 아니었다. 신랑 쪽 DNA는 남자 치고는 거의 털이 없는 편이어서 더 그랬다. 시댁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왜 그렇게 털이 많냐”라고 하셨다. 이 부분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라, “그러네요”라고 나는 말하곤 했다.
친정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하게 되면, 더 복잡해지고, 더 얽히기에 내 선에서 끝나는 게 최선이었다. 여름에 반팔을 입으면서 십몇 년을 그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딸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제모, 화장 등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나도 조금은 혹했다. 오랜 트라우마를 버리고 싶어 졌다. 그전에는 여자들이 관심을 두는 화장, 패션 등 이런 것보다는 시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고, 지식을 채우는 것을 좋아했다. 화장, 패션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지만, 제모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게 되면서, 조금씩 팔에 난 털을 제모하기 시작했다. 그 후 어머니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반팔을 입고 시댁을 가는 것이 편해지는 것이 올해로 3년째였는데, 어머니는 최근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면서, 계속 내게 들린 말은 “왜 그렇게 털이 많냐”였다. 어머니가 올해 구정 때 나에게 해주신 단 한 번의 선물은 한 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선물은 “자식을 잘 키워놓았으니, 너의 인생을 살아”라는 얘기였다. 털에 관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생각난 것을 보면, 아직도 마음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는 듯하다. 장례를 치르고 3주가 넘어가지만, 아직은 털을 밀지 않았다. 어찌할지 결정을 못 했기 때문이다. 딸 덕분에 제모라는 신문물에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나를 곁눈질하는 시선이 없는 나만의 생각을 아직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DNA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수긍하는 방식인지, 아니면 타협인지 시간을 좀 더 들여 고민하고 싶다. 처음에는 제모 크림으로 하다가, 나중에는 면도기로 미는 방식을 취했다. 털이 조금 있는 경우에는 제모 크림을 쓰면, 깔끔하고, 피부에도 트러블이 적지만, 나의 경우는 점차 트러블이 많이 생긴다. 지금 팔의 상태를 보면 군데군데 쑹덩쑹덩 털이 나있으며, 깎여진 털이어서 팔을 스치는 순간 따갑다. 이제 나의 털은 온전히 나의 자유다. 아직 나의 털은 자랄 시간이 있으므로, 사유의 시간은 아직 더 있는 듯하다.
트라우마를 접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정면돌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니라고 우기면서 우물에 담아두는 것이다. 자존감이 높을 때는 정면돌파도 가능하지만, 자존감이 낮거나, 시댁에서 며느리라는 위치 등 조건이 더해지면, 우물에 담아두는 수 밖에는 없는 듯하다. 내가 시댁에서도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였으면, 십몇 년을 우물에 담아놓고 고생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다른 여러 일이 있어서 이 일은 신랑을 통해서도 말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이제는 우물에서 꺼낼 시기가 되었으며, 감정이 섞이지 않은 그냥 털, 그 자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가 우물에서 꺼내지는 시점은 아픔이 희석되어서 감정이 MIX 되지 않은 그냥 그 자체로 여겨질 때인듯하다.
최근 나는 블로그 지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브런치 글이 4번의 다음 메인을 가면서, 깊이를 알 수 없었던 우물의 깊이를 알았으며, 우물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돌이 하나씩 놓여 감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일의 아주 작은 성과가 구멍을 메우는 것을 보면서, 털은 그냥 털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너무 사랑에 빠진 나머지 상사병의 아픔으로 죽게 된 나르키소스처럼은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절제된 사랑은 자존감을 높여서 마음의 구멍을 메우기도 하고, 찢어져 있는 마음 사진을 희석시키도 하며, 우물에서 나올 수 있게도 하는 거 같다. 대단한 일, 거창한 일을 해야만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오늘 하루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순간이 반짝이다 보면 한 발 두 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