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꼬마마녀 Aug 29. 2020

조개 까는 남자



  딸이 해물 부침개가 먹다는 얘기에 바지락을 뿌라야로 까면서, 본인은 딸 바보가 아니라는 신랑 말에 그냥 웃는다. 아니기는 무슨~. 딸이 용돈 없다면 지갑도 그냥 열어젖히면서....      



  “아빠, 아빠 나 아빠표가 먹고 싶은데....? 음 해물이 가득 들어간 부침개... 해줄 거지?” 라며

딸은 아빠에게 애교를 떨고 있다. “귀여운 딸이 먹고 싶어 하는데.... 알았지? 아빠?”하며 딸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거실에 남겨진 신랑과 나는 서로 눈치만 보다 나는 재빠른 협상을 한다.     



  “음, 나 글 쓸 거 있는데, 블로그 브런치 양쪽 다 써야 하고, 오늘은 시도 한편 써야 함... 자기가 장 봐오면 내가 할게”라며 신랑을 꼬신다. 마트에 갔다 오는 시간이면 어느 정도 글을 쓰는 나로서는 최선의 마지노선이며, 블로그를 시작한 후로 가끔 신랑은 나를 그렇게 도와준다.  최근 인터넷 주문을 하면 집 앞 배송을 해주는 곳이 없어져서, 조금씩 장을 보기에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한다. 신랑은 블로그 때는 사진도 찍어주고, 신랑 폰 화질이 더 좋아 그것으로 찍기도 하고, 사진 배경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방법도 알려주며, 작가가 된 후는 가끔 밥도 직접 차려 먹고, 퇴근하다 몇 가지 필요한 물건을 사다 주기도 한다. 이럴 때 나는 진짜 작가, 시인이 된 듯하다. 밖에서는 브런치 작가, 시인이라고 불리지만 집에서는 그냥 엄마, 아내이기 때문이다.     



  신랑이 봐온 장바구니를 보니, 오징어, 바지락, 깐 새우, 쪽파, 부침가루 등이 있었다. 나는 바지락을 보고 기겁을 했다. “바지락 살 없었어?. 이걸 어떻게 까?”라며 툴툴대니, 신랑이 자신이 해결한다고 뿌라야를 가지고 열심히 바지락을 살과 껍질을 분해해 주었다. 이 날따라 바지락살이 없어 바지락을 사 왔던 것이다. 바지락 까는 전문가에게는 쉽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 자신이 묻힌 길에 한다고 반죽까지 쓱쓱 해서 부침개 한 장을 해서 딸을 부른다. 딸이 얘기하는 해물에, 본인이 좋아하는 김치도 넣어서 항상 해물 김치 부침개가 되곤 한다. 딸은 “해물 부침개에 김치가 왜 들어가?”라고 하는데, 신랑은 “김치 들어가야 맛있어”하며 딸의 입에 한 점을 넣어준다. 신랑은 부침개를 먹는 딸을 보며 한참 웃는다. 딸이 집이 없으면, 장부터 부치는 것까지 나의 독차지인데, 이런 상황에는 딸바보인 신랑에 픽픽 웃음이 난다. 이랬던 신랑도 연애시절 신랑집이 빈 틈을 타서 비 오는 날 부침개를 해 먹었고, 나는 귀부인처럼 앉아 먹기만 했다. 결혼 후에는 가끔 볶음밥이나 자기 입맛에 당기는 것만 본인이 한다.     





  딸이 아빠표를 찾는 메뉴는 초밥도 있다. 초밥이 우리 집 메뉴가 된 것은 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 왔을 때다. 겨울 끝자락에 초밥이 먹고 싶다는 얘기에, 그날따라 심한 눈보라를 뚫고 회를 떠 오고, 단촛물을 처음 만드는 신랑은 인터넷을 뒤져서 만들었고, 겨자를 얹고 회를 살포시 놓아 초밥을 만들었다. 가끔 나의 간장새우로도 초밥을 만든다.

(초밥 단촛물은 식초, 설탕, 맛소금의 비율을 2:1:1로 하면 되고, 초밥을 해먹을 경우는 회를 떠주는 곳에 얘기해서 초밥용으로 얇고 길게 썰어달라고 하면 된다.)     



<단촛물 밥과 초밥>



   신랑이 딸을 위해 요리해주는 것처럼,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도 옛말이며, 지금은 요리하는 남자, 딸 바보의 개념이 많이 퍼져있다. 캠핑을 가거나 여행 가서 해 먹게 되면, 남자가 요리하는 것도 드라마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나의 간장새우로 만든 새우초밥>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를 너무 가고 싶었지만, 여자가 이과를 가서 무엇을 하느냐는 아빠의 말에 문과를 갔다. 나의 성향, 취향은 고려되지 않았다. 그랬던 아빠도 내가 대학교에 가서 컴퓨터가 필요하니 과감하게 사주셨다. 나는 초등 저학년 때 친할머니의 남존여비 사고방식 때문에 야반도주하듯 서울 변두리로 올라오면서 나에게도 배움의 기회는 열렸고, 대학도 갈 수 있었다. 할머니의 첫 손녀지만, 제대로 된 귀여움을 받아본 적도 없고, 첫 딸을 낳았다고 구박해서 친정엄마는 미역국조차 제대로 못 드셨다. 그랬던 할머니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하셨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에는 여자도 자유롭게 친정을 오가며,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할 권리가 있었고, 제사도 돌아가면서 지내는 윤회 봉사였다. 유교 윤리가 점차 정착되어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장자나 장손을 세우면서 여자는 점점 출가외인이 되었다. 현재는 조선 초기로 돌아가려 하며, 여자에게도 점점 여러 길이 열려있다. 시대는 변해가지만, 자신의 커온 방식이나 집안 분위기에 따라 성 역할 관련해서 양육하는 방식은 시대에 부응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아들을 중히 여기는 엄마 손에 커와서 나는 딸을 다른 방식으로 키웠다. 신랑은 우리 시대에 비하면 딸 바보라 불릴 만하지만, 지금의 아빠들만큼은 아니다. 가끔 딸은 아빠에게 “아빠는 왜 성 차별해?” 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딸을 사랑하는 표현법은 많이 바뀌었으나, 사고방식은 고리타분할 때도 있다. 그래서 나도 가끔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야?”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나하고 4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도 그러는 것을 보면, 자신이 커온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딸이 면허를 따고는 신랑은 딸에게 종종 차 열쇠도 주며, 가장의 허물어진 모습을 자식에게 보이지 않던 시절과는 다르게 자신이 아플 때는 딸에게 얘기한다. 나의 작가 생활을 도와주려는 것을 보면, 신랑도 변화의 물살을 탄 듯하다. 오늘 내 집에서는 남자, 여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생활하고 싶으며, 자신감도 하나씩 채워나가 가족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자기야, 자기가 장 보러 갔다 와? 알았지?



---------------------

대문사진 출처 : pixa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