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썼던 잿빛의 뜸 이야기에 이어 이런 이야기가 생각날 때마다 써보려고 해요. 오늘의 이야기는 상자입니다.
상자는 자신이 왜 네모가 아닌지 생각했다.
처음 도화지에 그려질 때 연필이라는 녀석이 대충대충 그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연필을 찾아 따질 생각으로, 연필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상자가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드디어 연필의 꽁무니를 찾을 수 있었다.
연필은 새하얀 도화지에 신이 나서 꽃무늬 상자, 정사각형의 상자, 알록달록한 무늬 상자, 여러 상자를 자기 마음대로 그리고 있었다. 상자는 연필을 노려보면서, "날 왜 이렇게 그려 놓았어?"라고 따질 참이었다.
순간 연필의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비록 못난 연필이지만, 나의 정성을 담아 그리니, 예쁘게 태어나렴. 내가 부족해서 제대로 못 그려도, 나의 마음은 100점 만점에 200점을 담았어."
상자는 자도 없이 덤비는 연필에게 퍼붓고 싶었다. 연필의 중얼거림을 들은 상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으며, 그냥 뒤돌아서야 했다. 친구들에 비해 늦은 자신에 쓸쓸한 고뇌를 했다는 사실이 잠시 부끄러워졌으며, 연필에게 따지는 못한 이 선택을 또다시 후회할지도 몰랐다. 순간의 선택에 상자는 뒤로 또 밀린 것이 아닐까 자꾸만 갸우뚱거렸다.
상자는 틈새 시간을 노려 하얀 종이를 공략해 보기로 했다. 하얀 종이를 꼬셔, 다시 예쁜 상자로 태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 했던가, 상자의 마음을 눈치챈 희고도 흰 하얀 종이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얘, 나에게 잘 보이려는 이유가 뭐야? 난 알 거 같은데"
하얀 종이가 거들먹거리며, 상자의 붉어진 볼을 보며 약간은 놀리듯 한 말투로 상자가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말 한 마디면, 예쁜 상자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다른 이도 챙기는 너의 마음, 상자로서의 마음은 못 담을지도 몰라. 선택은 너의 자유야…….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와"
상자는 내일 이 시간까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걷는 것이 최고니까,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자가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꽃무늬 상자가 있었다.
꽃무늬 상자는 자신의 꽃그림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며, 징징거리고 있었다. 자신도 바다나 산 등 멋진 그림이 그려져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는 상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상자는 처음 꽃무늬 상자를 보았을 때, 그래도 꽃무늬니까 나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상자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내리는 비에 갈 곳을 찾아 헤매던 상자는 전봇대에 널 부려져 있는 종이도, 상자도 아닌 것을 보았다.
"왜 이렇게 젖었어요? 다시 일어날 수 있어요?"
"날 그냥 내버려 둬……. 나도 한때는 말이야……. 봄 햇살을 맞으며, 아주 잘 나갔지. 그러다 한 군데가 탈이 나고 조금씩 잊히더니 야밤에 여기에 던져졌어!" 그는 종이가 아닌 광채가 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모든 이삿짐을 다 부리고 다녔다. 그는 만능 박스라 불렸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짐을 하역했으나, 옆구리가 터지는 통에 그는 점차 힘을 잃어갔고 사람에게 이리저리 차이는 신세가 되었다.
상자는 아직 온전한 상자가 되지 못한 자신과 플라스틱 상자를 보며, 카멜레온을 떠올렸다. 주변 색에 따라 자신의 몸 색도 변화시키는 카멜레온처럼 생각의 보호색이라도 띠어야 하나 고민했다.
상자는 자신을 들어 올리는 손길에 숨을 삼켰다.
"음, 좋아 좋아……. 이 정도면 빈티지 느낌 물씬 나겠지"하며 소녀는 상자를 곱게 모셔가 그 안에 장신구와 애정 하는 인형을 넣었다.
소녀가 보기에는 상자는 딱 안성맞춤인 듯했다. 그리고 소녀는 물감을 가져와서 꽃도 바다도 예쁘게 그려주었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상자야 너도 마음에 들지? 나와 잘 지내보자."
상자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몸에는 소녀가 그려준 꽃도, 바다도 있었다. 자신이 부러워했던 꽃무늬가 그려진 상자보다 더 멋있었으며, 소녀가 장신구를 찾을 때마다 그 쓰임새를 다하는 듯하여 자신이 뿌듯하다고 여겨졌다.
살랑대는 바람 살이 상자의 얼굴에 와 닿았다. 예전에는 싱그러운 바람 살에 시리기만 했다면, 지금은 싱그러운 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온전히 바람을 느끼고 싶어 졌다. 소녀가 열어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바람에 꽃 냄새도, 따사로운 햇빛 향도 나며, 구름은 햇빛의 향을 따라 이리저리 떠도는 듯하였다. 상자는 한때 구름을 보며 유랑하는 인생이 되어볼까 했던 생각도 났다.
상자는 망상에 잠겨 있다가 창문을 통해 들려오는 새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창문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았다.
"앗, 큰일이다. 약속을 까먹었어"하며 상자는 중얼거렸다. 상자가 시간을 보니, 종이와 했던 약속시간은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상자는 발걸음을 떼기 전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면에서 일렁대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지금 행복하니?, 지금 모습에 만족해?" 마음은 상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상자는 뭐라도 대답해야 할까 생각하기 이전에 자신의 입에서 "응"이라는 소리가 먼저 나가는 것을 느꼈다. 상자는 자신의 생각보다 빠른 말에 한바탕 웃어젖혔다.
상자는 종이와의 약속이 아깝기는 했지만, 소녀의 웃음과 자신을 잘 알아봐 준 소녀의 마음이 좋았다. 상자는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 아깝지는 않았다. 기회는 또 올 수 있으니까……. 지금 행복하니까… 가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있으면 생각의 보호색을 쓰기로 했다.
상자는 바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때마침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춤이 눈에 들어오며, 꽃이 추는 춤이 저렇게 예쁠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람 살에 흩날리는 코스모스는 모든 춤을 섭렵한 것 같았다. 상자는 부러운 듯이 코스모스를 쳐다보았다.
코스모스는 상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코스모스의 엉덩 춤>
"얘, 바람에 박자를 안 맞추어도 돼. 그저 네가 느끼는 대로 느끼면 흔들면 돼? 알았지?"
"느끼는 대로?, 아……. 나 몸치에 박치인데……."라고 중얼거리며 상자는 코스모스를 보았다. 그때 상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저마다 다른 색을 가진 코스모스지만, 바람하고 잘 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끔 코스모스처럼 생각의 보호색을 띠고 바람에 엉덩이를 들썩 훗……. 너무 좋다. 바로 이거야"하며 상자는 엉덩이를 자꾸만 실룩거리며, 달이 떠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그랗게 떠오르는 달이 상자의 마음에도 온기를 전해주는 듯했으며, 마음도 푸근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