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좋아 - 5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난했던 자리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자잘한 고비에도 늘 든든하게 마음을 지켜주던 박 대리가 정 주임의 기분을 싸늘하게 식히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우와, 여기 이거 진짜 맛있다.”
후식으로 나온 수정과와 바람떡을 먹던 김대리가 이미 비어버린 본인의 그릇을 가리키며 크게 감탄했다. 여기 떡 맛집이네. 더 달라고 해도 안 주겠지? 인원에 맞춰 정식으로 차려지는 식사다 보니 일반식당처럼 추가 요청하기가 어려워서 김대리는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김대리와 마주 앉아 있던 성준은 무심코 자신의 바람떡 그릇을 김대리에게 밀어줬고 소윤이 엄청난 떡순이라는 걸 꿈에도 알 리 없는 김대리는 고맙다며 성준의 남은 바람떡을 마저 냠냠 먹어버리고 말았다.
순간 소윤은 정말 머리가 차갑게 얼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떡을 다른 사람한테 줄 수가 있어? 다른 것도 아니고 떡을... 너무 갑작스럽게 또 너무 극심하게 서운한 마음이 든 바람에 눈가가 다 떨렸다. 이대로 성준을 쳐다봤다가는 험악한 눈빛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그저 떡을 찍어 먹던 작은 포크를 내려놓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기서 표정관리 못하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거다. 나는 사회화된 직장인이다. 앞에 있는 사람들도 마침 다 회사 사람들이니까 난 할 수 있다.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나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자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식사 내내 소윤의 기분을 살피던 성준은 순간 굳어버린 소윤의 분위기를 눈치챘지만 곧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띤 얼굴로 대화하는 소윤을 보며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결국 한입 베어 먹어 반달 모양 잇자국이 난 바람떡 하나를 덩그러니 남겨 놓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윤을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성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동기들과 인사를 나눴다.
소윤의 집 앞에 멈춰 선 차 안은 여전히 적막했다. 돌아오는 길엔 이렇다 할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말주변이 없는 성준을 위해서 소윤은 좋아하는 음악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잔잔하게 대화의 물꼬를 터주곤 했는데 오늘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보이는 소윤의 옆얼굴은 그 온도가 차가워서 성준을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무섭게 화를 내거나 따져 물어준다면 싹싹 빌고 사과할 텐데 꽝꽝 언 호수의 표면처럼 미동 없는 얼굴은 뿌연 얼음에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용기를 내서 소윤 씨, 하고 불러봐도 네,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기계음만큼 낯설어서 평소 소윤의 다정함에 푹 잠겨있던 성준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였다. 그렇게 짧은 대답으로 대화들이 뚝뚝 잘려 나간 후로는 조용하게 운전해서 집에 도착한 참이었다. 차가 멈춰서 비상등을 채 켜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풀고 문손잡이를 잡는 소윤을 성준이 가까스로 붙잡았다.
“소윤 씨, 미안해요. 제가 생각이 없어서… 아니 생각을 못했어요.”
“대리님.”
급하게 잡느라 소윤의 코트 소맷자락만 겨우 붙든 성준의 손을 내려다보며 소윤이 입을 열었다.
“제가 내일 대리님 퇴근하실 때쯤 연락할게요. 그때 얘기해요.”
말을 마친 소윤은 넋을 놓은 성준의 손에서 소매를 가볍게 빼고는 훌쩍 차에서 내려 건물로 들어갔다. 소윤 씨 걸음이 저렇게 빨랐었나. 한 번도 돌아봐 주지 않고 손도 흔들어주지 않는 소윤의 뒷모습이, 눈도 마주쳐주지 않는 소윤의 가라앉은 얼굴이, 대리니임-이 아닌 대리님. 이 되어버린 자신이 몽땅 다 눈물 날 만큼 낯설어서 성준은 그대로 핸들 위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봄날의 고드름처럼 눈물을 떨구던 성준을 달래 거실 소파에 앉힌 소윤은 얼른 물 한잔을 떠 와 성준의 옆에 앉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도 않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길래 잔잔한 줄 알았던 눈가는 밝은 거실에 나와 보니 꽤 붉어져 있었다. 울음을 삼켜내느라 입이 말랐는지 소윤이 물을 건네자 작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바로 목을 축였는데 크게 일렁이는 성준의 울대가 촉촉이 젖어든 속눈썹과 대조되어 꽤 자극적으로 보였다.
“대리님, 많이 서운했어요?”
찬바람에 조금 거칠어진 성준의 손등 위로 소윤이 손을 얹으며 물었다. 민망한지 물컵이 놓인 테이블만 보고 있던 성준이 그제야 소윤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근데 왜 그렇게 울었어요. 나 화도 못 내게.”
울음을 삼키는 건지 크게 한번 울대를 넘긴 성준이 여전히 물기 어린 눈으로 말할 채비를 했다. 소윤은 그 축축한 눈이 평소처럼 건조한 성준의 얼굴과 만드는 조화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서운하지 않았어요. 그냥 미안하고… 무서워서요.”
“뭐가 무서워요. 내가 막 화낼까 봐?”
“아뇨. 소윤 씨가 이제 저한테 다정하지 않을까 봐요.”
그러니까… 성준이 잠시 말을 멈추고 손을 뒤집어 소윤의 손을 잡았다.
“내가 뭐 잘 못 하면 말해주세요. 그냥 가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성준은 잡혀있는 소윤의 손을 남은 손으로 덮으며 시선을 떨궜다. 원래 소윤도 기분 상하는 일이 있으면 오래 끌지 않고 솔직히 말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아무래도 그러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뿐이다. 속이 아플 정도로 화가 난 건 맞았지만 대체 뭐라고 말하면 좋았을지. 어떻게 다른 사람한테 떡을 줄 수가 있어요? 다른 것도 아니고 떡을, 심지어 바람떡을? 자신의 분노는 심각할 정도로 진지했는데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뭔가 우스워질게 뻔했다.
그렇다고 소윤이 제일 좋아하는 바람떡을 다른 사람, 그것도 멋진 ‘누나’에게 선뜻 주는 모습을 보고도 넘어가기에는 너무너무 서운하고 화가 났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금 가벼워진 분위기에서 말하는 수 밖에는. 안 그래도 성준보다 나이도 적고 직급도 낮은데 그런 부분에서마저 어리게 보이기는 싫었다.
생각보다 더 마음고생을 한 것 같은 성준의 모습에 괜히 마음이 약해진 소윤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살며시 성준의 볼을 쓸었다. 알겠어요. 울지 마세요, 대리니임. 고개를 든 성준은 다정한 소윤의 말투에 울컥했는지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볼 위에 얹어진 소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싼 채로 볼을 비비고는 소윤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살짝 고개를 틀어 소윤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눈물이 반쯤 고인 눈으로 시선을 맞춰오는 성준을 보던 소윤은 결국 참지 못하고 앓는 소리가 섞인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성준의 어깨를 밀고 무릎 위로 올라타 마주 앉았다. 갑작스럽게 입술을 붙여오는 소윤에 성준은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바로 소윤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성준의 눈에 고여있던 눈물이 굴러 떨어지면서 소윤의 손가락을 적셨다. 소윤은 숨을 들이마시면서 허리를 곧게 폈다. 떨어지는 입술에 반쯤 눈을 뜬 성준이 다시 입 맞춰오자 소윤은 성준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조금 거리를 벌렸다. 입을 열면 곧바로 입술이 스치는 가까운 거리에서 소윤은 성준의 깊어진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리님, 이제 내 앞에서만 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