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좋아 - 8
소윤이 집에 돌아와 씻고 나오자 12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니 술도 꽤 마신 상태였고, 성준에 대한 얘기를 할 땐 너무 팔불출 같이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더 피곤한 기분이었다. 자기 전에 성준과 짧은 통화라도 하고 자고 싶었지만 성준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아직 안 들어갔나, 그러기엔 너무 늦었는데. 혹시나 고집스러운 상사한테 걸려서 술을 많이 마시고 뻗은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이 와중에 은근슬쩍 신경 쓰이는 부분은 따로 있어서 조금 민망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고작 하루짜리 출장에, 그것도 아무 관계없는 사람에 대해서 유난스럽게 생각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신경 쓰이는 건 신경 쓰이는 거였다.
아직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어쩌지. 혹시나 전화를 걸었을 때 주변에서 관심을 보이거나 자신인 걸 알아챌까 봐 조금 망설여졌다. 잠시 베개에 얼굴을 묻고 고민하던 소윤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흐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깍 전화가 연결됐다.
“어, 지금 내려가고 있어.”
입을 뗄 틈도 없이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소윤의 몸이 굳었다. 살짝 벌어진 입을 닫지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지금 엘베 기다려.”
평소보다 좀 잠기고 뭉개진 말투였지만 분명 김대리님의 목소리였다. 소윤은 놀란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손대면 안 되는 것이라도 만진 듯이 핸드폰을 멀찍이 던져놓고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린 채였다. 무슨 일인지 추측해보려고 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둘이 같이 있는 건가? 같이 있으면 왜 전화로 얘기하지? 아니 일단 왜 박 대리님 전화를 김대리님이 받지? 뜻밖의 상황에 뇌가 과부하 걸린 소윤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떨떨함이 조금 가시자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고작 하루짜리 출장에 내가 유난 떠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난이 아니었네. 왠지 가기 전부터 불안하더라니 떨어지자마자 이렇게 거슬리는 일을 만들고 말이야. 소윤의 눈이 한없이 뾰족해졌다. 소윤은 화날수록 싸늘해지는 스타일이었지만 이번엔 목 안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며칠 전부터 꾸준히 신경 쓰이던 부분이 이렇게 터지고 나니 은근했던 맘고생에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씩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겨우 삼키고 있을 때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화면에 덩그러니 떠오르는 하트가 무색했다. 번쩍거리는 핸드폰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이내 숨넘어가듯 진동이 멎었다.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어서 다시 전화가 들어왔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쉰 소윤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소윤 씨.”
“.......”
“소윤 씨, 아까 회식자리에서 핸드폰이 바뀌어서요. 지금 제 꺼 찾아서 호텔 돌아가는 길이에요.”
“.......”
“김대리님이 제가 연락한 줄 알고 전화받았다는데, 소윤 씨였던 것 같다고 해서요. 놀랐죠. 미안해요.”
하루 종일 듣지 못한 성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겨우 삼켜내던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소윤은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네, 갑자기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좀 놀랐어요. 음, 지금 그럼 밖에 있는 거예요?”
“... 네. 여기 사옥 근처라서 금방 가요.”
“늦게까지 회식해서 힘들겠어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소윤이 무던한 반응을 꾸미는 동안 성준은 잠시 조용히 있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또 연락했었어요?”
“네? 아니요. 회식 언제 끝났는지 몰라서. 옆에 다른 분들 계실까 봐요.”
“... 저 걱정했어요?”
조금은 굳은 말투로 물어보는 성준이 낯설었다. 걱정했냐는 말을 들으니 혼자 내심 초조해했던 시간이 생각나 심통이 났다. 걱정했으면요. 걱정하는 거 알았으면서 이렇게 늦게 연락을 해요? 물론 이 말들은 소윤의 입 밖으로 절대 나오지 못했다. 하루를 못 견뎌서 조급하게 구는 어린애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소윤은 목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걱정했죠. 누가 막 대리님 술 많이 먹일까 봐.”
“그것만요?”
“네?”
“... 아니에요. 소윤 씨도 늦었는데 피곤하겠어요. 얼른 자요.”
소윤은 널뛰는 대화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적당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라서 그쯤 끊길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기도 했다. 이 와중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게 분해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일 얼굴 보고 얘기하면 좀 나아질 거야. 소윤은 마음을 다독이고 잠에 들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