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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Nov 01. 2021

나와 비슷한 문장은 여운이 길다.

홍희정 장편소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를 읽고



※아래 글에는 소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의 내용과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 너무나도 나 같은 제목이었다. 표지에 적힌 제목은 '시간 있으면'과 '나 좀 좋아해 줘'가 나뉜 채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 쓰여있었는데, 그게 내가 언제나 듣고 있는 내 안의 두 가지 목소리를 나타낸 것만 같았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 난 늘 막무가내로 날 좋아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그러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나를 좋아해 달라고 조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움츠러드는 말을 한다. 시간 있으면, 네가 어렵지 않다면, 가능하다면, 나 좀 좋아해 줄래?


직접 책을 읽어보니 책에서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달라'는 문장은 내가 처음 제목을 봤을 때의 느낌과는 다르게 쓰여있었다. 모든 글은 읽는 사람에 따라 그 느낌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내 생각보다는 사뭇 희망차게 쓰인 문장이었다.


이렇게 나는 전체 내용에서 유독 내 마음과 비슷한 문장들에 얼얼하게 반응했다. 글을 읽은 후 남은 소감은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입으로 소리 내어 되새겨보았던 몇 문장들에 대한 감탄이었다.




문장에 대해 말하기 전에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보면서 나는 조금 곤란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글에 안정감을 느끼고 특히나 '결'부분에 따라 그 선호가 달라지는 나로서는 화자가 나열한 상황들이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하나의 전환점만을 암시하고 끝나는 글이 갑작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기승전결을 말하고자 하는 글이 아니고 화자이자 주인공인 '이레'의 삶의 한 부분을 서술해놓은 조각 그 자체의 글이었다. 글에 쓰여진 시기에 이레는 오랫동안 단둘이 함께 살아오던 할머니의 암 투병을 알게 되고,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생전 처음 알게 된 일을 하고, 슈퍼 알바를 하며 고객으로만 만나던 사람(칸트)과 처음으로 함께 걷고, 함께 카페에 가고, 그 사람의 집에 방문해 식사를 하게 된다. 또 오랜 친구(율이)를 짝사랑하는 일을 점점 견딜 수 없게 되고, 그 친구에게 일어난 일과 연락두절로 인해 마음고생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독자는 할머니의 병환이 어떤 차도를 보이는지도 알 수 없고, 임시로 하던 아르바이트를 언제까지 하게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칸트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이레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율이를 좋아할지, 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알지 못하고 글은 끝난다. 


물론 확실한 결말은 없을지라도, 그 삶의 조각이 담담한 문체로 내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져서 순식간에 이레의 동네 골목에 함께 서있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목격한 장면들 중에 특히나 나를 멈추게 하고 한번 더 되새겨 보았던 문장을 골랐다. 내가 그간 막연하게만 느껴왔던 추상적인 감정들을 나보다도 더 나 같은 말로 실체화 한 문장들이다.




글에서 문장 하나만 따로 떼서 감상하는 것은 그 문맥과 의도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올 문장들에 대한 감상은 그 표현이 나에게 어떻게 닿았는가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소감임을 밝힌다.



율이는 항상 대답을 잘했다. 마치 누가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이 문장은 소설에서 두 번 나오는데, 나는 그 두 번 모두 등이 저릴 만큼 공감했다. 내가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 일상에서 문득 쓸쓸하고 갑작스러운 고독을 느낄 때 늘 나는 속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냥 속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내 안의 내가 내 등을 쓰다듬는다고 생각하면 급한 대로 얼추 위로가 됐다. 사람은 그 존재를 증명받고 싶어 한다는 말처럼 누군가 불러주는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은근히 기다려지는 일이었다. 글을 읽으면서 딱히 단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왠지 율이가 묘하게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오히려 즉흥적인 행동을 하거나 자기주장이 뚜렷한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았는데도 나는 자꾸만 율이가 한 발짝 물러나 마냥 기다리는 인물로 느껴졌다. 그건 어쩌면 내가 너무 주인공인 '이레'에게 몰입해서 이레의 마음을 몰라주고 의도치 않은 상처를 안기는 율이에게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주의와 관심!


이레가 새로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바로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고객에게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걸어 약속한 시간만큼 통화를 하고 끊는 일이었는데 그 일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바로 '상대에 적당한 주의와 관심'이다. 난감하고 곤란한 통화를 하는 이레를 보면서도 '들어주는 사람'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지 못했던 나는 바로 저 '적당한 주의와 관심'에서 그 일의 까다로움을 느꼈다. 아마 내가 어떤 것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 때, 상대에게도 나에게도 불편하지 않은 '적당한' 지점을 찾는 걸 가장 어려워하기 때문 아닐까? 나는 매번 적당히 하기 위해서 내 주의와 관심에 브레이크 거는데 많은 힘을 쏟았고, 그래서 저 문장이 더 마음에 닿았다.



모든 절정은 끝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 그날 이후로 나는 절정 이후엔 반드시 공포에 가까운 공허함과 슬픔이 따라온다는 나름의 법칙을 갖게 되었다. … 나는 가슴이 설레는 일이 생길 때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처참히 끝나버릴까 봐 불안해하곤 했다. 


이 문장들이 말하고 있는 절정의 끝이 나의 불안을 가장 정통으로 꿰뚫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행복한 순간에 상실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도저히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미련하게 앞서 나가는 걱정이 예방접종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라도 둥둥 떠오르는 심장을 붙잡아야지만 끝없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그래야지만 추락해서 박살 나는 걸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방접종이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늘 절정의 끝에 대해 불안해하는 습관이 있고, 나와 같은 마음을 말하는 이레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 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 그녀의 다정하면서도 은밀한 태도에 나는 애정의 맨얼굴을 본 것 같아 명치가 조여왔다.


이 작품에는 이레가 율이에게 품은 마음과 율이의 여자친구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 표현들이 요란하고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강하고 섬세했다. 짝사랑할 때 느끼는 서러움과 방향 잃은 질투, 원망, 분노가 생생히 담긴 묘사들이 많았다. 위 문장에 나온 것처럼 괴이한 감정도 가감 없이 쓰여있어서 그 노골적인 문장이 짜릿했다. 특히나 율이의 여자친구에게 느끼는 질투를 말할 때면 거의 내 마음이 다 따끔거릴 정도였다. 그 쯤 나는 이레의 짝사랑에 완전히 동화되어서 율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율이는 아무 잘못 없이 그저 본인의 연애를 착실히 해나갔을 뿐인데 나에게는 이미 배신자였다. 여자친구가 생겼을 때도 야속했는데, 이후에 이레 앞에서 여자친구에게 깊은 속이야기를 나눴을 때는 거의 내가 이레 대신 옆에 있는 물건들을 던져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심 나는 율이가 그래도 정신적, 감정적으로 깊게 교류할 수 있는 건 이레뿐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꼈던 낯뜨거움과 비참함, 소외감을 정확히 전해주는 문장이었다. 애정의 맨얼굴을 목격하고 명치가 조여오던 외로운 그 순간을.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 해


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같기도, 아니면 이제야 겨우 진정 혼자가 된 사람들 같기도 했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열렬히 납득한 문장이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에 대한 이레의 감상이었는데, 정말 그들은 저 문장처럼 보였다. 문장의 표현들은 모두 상실을 말하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아마도 상실해서 좌절했을 것이고 어쩌면 되찾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 역시 누군가의 부재를 겪고 있지만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일말의 희망을 지닌 일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제야 겨우 진정 혼자가 된 사람들은 '이제야 겨우'라는 표현이 말하듯 상실과 부재로 혼자가 된 그 순간을 인정하고 아주 조금은 반기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내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그 두루뭉술했던 느낌을 한층 구체화시켜주는 문장이었다.



나는 빈 터널처럼 그 말들을 통과시켜버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들으면서 어느 한 부분도 내 삶에 걸리지 않는 때가 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 말 중 나와 접점이 있는 부분이 전혀 없어서 도저히 내 삶에 걸릴 일이 없는 말들. 분명 의미 있고 중요한 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가 붙잡을 마음은 전혀 없는 말들. 단순히 무시한다거나 한 귀로 흘렸다고 하기에는 정확히 표현되지 않는 그 순간을 완벽히 묘사해준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빈 터널이 되어 말들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휘발성 있는 장면이 간결하고 속 시원하게 내 마음을 스치고 갔다.



"비가 내리려고 하자 강에 뛰어들어 홀딱 젖은 채 아, 그래도 비는 안 맞았다. 하는 꼴이네요."


외로워질까 봐 겁이 나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겠다는 이레가 들은 말이다. 이레의 상황을 명확한 하나의 상황으로 보여준 문장이었으며 그 상황에 대한 평가는 없어서 더 좋았다. 그래서 그 강에 뛰어든 사람이 한심하다던지, 미련하다던지 혹은 현명하다던지 어떤 평가도 없었다. 나의 의견을 밝히자면 강에 뛰어든 사람은 현명까지는 아니라도 스스로 꽤 확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비를 맞거나 강에 빠지거나 어쨌든 홀딱 젖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젖는걸 두려워한다면 강에 뛰어든 사람은 섣부르고 한심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젖는 것보다 비에 맞는 게 두려운 거라면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고른 거라고 생각한다. 젖는 게 똑같이 싫더라도 비에 젖는 것과 강물에 젖는 것 중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상황이 분명하게 구분될 수 있기 때문에. 비 맞기는 죽을 만큼 싫어서 자주 강물에 뛰어드는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굵은 글씨로 적힌 문장들은 모두 홍희정 장편소설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 줘>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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