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둘이 어떻게 만났냐면

네가 나 때문에 우는 게 좋아 - 2

by 립나




고된 취준 시기의 끝에 차순위 기업의 인턴이 된 소윤은 배정된 팀으로 출근한 첫날 마주친 박성준 대리를 보고 생각했다. 어 왜 멀끔하지? 취업한 선배들이 회사에 저런 사람 없다고 했는데. 사수인 김 주임이 친언니처럼 살뜰하게 챙겨주고 많이 도와주는 걸 비롯해서 좋은 동료들도 많았지만 그만큼 끔찍하고 진절머리 나는 사람들도 많은 게 직장이었다. 그런 곳에서 박 대리는 사람이 참 곧고 괜찮았다. 조금 내성적이고 조용해서 가끔은 차가워 보였지만, 쓸데없는 소리로 질척거리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암묵적으로 캐주얼 비즈니스룩이 복장 규정인 회사다 보니 다들 정돈된 차림으로 다니기도 했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건지 정소윤 인턴 눈에는 박 대리가 유독 더 단정해 보였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인상에 훤칠하고 조금 마른 몸은 평범한 셔츠에 슬랙스 차림도 유독 금욕적으로 보이게 했다. 캐주얼 셔츠에 윗단추를 두어 개 푼 모습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박 대리가 넥타이를 하고 오는 날이면 정 인턴은 늘 업무 중 허튼 생각을 하지 않도록 애쓰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 인턴의 설레는 마음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업무 수행하면서 서로 정도 떨어지고 그래야 되는데 같은 팀이지만 업무를 같이하는 사이는 아니다 보니 자꾸 정이 붙기만 하지 떨어질 틈은 없어서 죽을 맛이었다. 사수 김 주임이 ‘박 대리님 참 괜찮은데, 숫기가 없어서 여자 친구가 없으신가 봐.’라는 말을 할 때마다 회사 선배고 뭐고 입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박 대리님 괜찮은 사람인 거 안 그래도 더 알려질까 봐 무서우니까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주임님. 처음 김 주임이 그런 말을 꺼냈을 때 소윤은 혹시 김 주임님도? 하고 심장이 철렁했었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사귄 ‘사교성 넘치는’ 남자 친구와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었다.


정 인턴이 바쁜 회사생활과 예상치 못하게 치여버린 짝사랑에 허우적거리는 와중에 박 대리는 그렇지 않아도 활짝 열린 정 인턴의 마음을 무자비하게 두드려댔다. 입사 초반엔 따뜻한 차만 마시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에 천불 터지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돌아섰을 때, 불쑥 ‘오늘은 차 안 드시네요.’라고 말을 건네면서 똑똑, 우연히 둘이 야근하는 날 샌드위치를 사서 말없이 책상 위에 올려두면서 쾅쾅, 다른 야근 날 ‘오늘도 저녁 안 드세요? 저 지금 나갈 건데 혹시 같이 가실래요?’ 하면서 쿵쾅쿵쾅, 소윤이 일을 마무리할 때쯤이면 비슷하게 정리하고 지하철역까지 데려다주면서 쿵기덕쿵덕.


인턴기간 동안 작성해야 하는 과업 수행 보고서와 최종 기획안 때문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초과근무가 기꺼워질 정도로 소윤은 박 대리와 함께 하는 야근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부서 특성상 월말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정시퇴근을 하는 와중에 박 대리는 유독 성실하고 꼼꼼한 건지 매일같이 야근을 해댔고, 피곤한 박 대리가 걱정되는 와중에도 내심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최종 기획안을 정리하느라 마지막 야근을 하는 날. 하필 그날은 박 대리가 칼퇴근을 해서 소윤 혼자 마무리를 했고, 불 꺼진 사무실을 둘러보며 괜히 아련한 마음이 들었다. 3개월 동안 오지게 힘들었지만 그래도 박 대리님 덕분에 야근도 할 만했지. 다음 날 마무리한 자료들을 제출하고 짐 정리를 한 다음, 작은 송별회를 마치면 이 사무실도 정말 마지막이었다. 인턴기간이 끝난 후 정직원으로 전환이 되더라도, 팀은 재배정되기 때문에 다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할 가능성은 아주 낮았기 때문이다.


복잡한 마음으로 회사 정문으로 나오자 마주 세워져 있던 SUV 한대가 비상등을 깜박였다. 어느새 차에서 내려 소윤 앞으로 다가온 박 대리는 마지막 날까지 야근하느라 고생했다며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소윤을 차에 태웠다. 6시 땡 치자 마자 퇴근했던 사람이 왜 다시 회사에 와있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던 소윤은 아 네네. 같은 얼떨떨한 소리를 내며 차에 탈뿐이었다.


집 근처 골목에 도착해 내리기 전, 몇 번 목을 가다듬은 박 대리가 뻣뻣한 동작으로 뒷좌석에서 꽃다발과 떡케이크를 꺼내 소윤에게 안겨주면서 인턴생활 고생 많으셨다며 꼭 다시 회사에서 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윤은 너덜거리는 마음의 문짝이 내는 큰소리에 정신이 팔려 ‘이렇게까지 인턴을 챙겨주시다니.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셔도 속정은 많으신 타입인가 봐.’ 같은 뻘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소윤이 설레는 마음을 꾹꾹 눌러대느라 바빠 감사하다는 인사 외에 별말 없이 넋을 놓고 있자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래서 많이 놀라셨을 텐데 죄송하게 생각하며, 당장 내일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어쩔 수 없었고, 괜찮으시다면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싶다는 말을 무슨 거래처에 요청 메일 보내듯 읊어댔는데 태연한 그 태도와 다르게 자동차 실내등 아래서도 또렷이 보이는 벌게진 목덜미가 결국 소윤의 마음에 달린 문짝을 다 부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인턴기간의 마지막 날 알고 보니 쌍방이었던 짝사랑의 결실도, 정직원 자리도 모두 얻은 소윤이 성준과 같은 회사 다른 층에서 일한 지도 10개월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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