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
이제 막 정오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이런 대낮에 주실장이 운전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늦은 밤이라던가 정말 경호가 필요한 자리가 아니고서는 혼자서 잘 다니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운전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뒷좌석에 앉은 채로 핸드폰 화면 대신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초조함에 손톱을 만지작 거리는데 어색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언제나처럼 짧게 깎인 맨 손톱 위로 차분하면서도 은근히 화려한 누드톤의 젤 네일이 꾸덕하고 매끈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손톱 끝까지 신경 써야 하는 자리라니. 정장 블라우스 넥라인을 매만지면서 답답함에 목을 한번 쭉 늘려보았다. 핸드폰 액정에 비친 내 얼굴은 상견례 자리에 가는 사람치고는 무덤덤해 보였다. 상견례. 언젠가 이 집안의 담보로 쓰일 정략결혼을 하게 될 줄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막상 닥치고 보니 기분이 이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리에 가기로 한 건 나 스스로도 좀 의외였고. 하긴 말이 상견례지 사실상 기업 간 프로젝트 회의나 다름없는 자리였다. 어른들과 식사자리가 끝나면 결혼상대와 차를 마시는 시간을 가져야 했는데 그건 마치 실무자들끼리의 업무 협의 자리 같을 터였다. 큰 계약을 앞둔 것처럼 피곤이 섞인 긴장이 밀려와서 그냥 숨이나 가만히 내쉬었다.
똑똑. 먼저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실장이 창문을 두드렸다. 주실장은 함께 차 안에 있으면 됐을 텐데도 굳이 밖으로 나가서 차 옆에 곧게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상황은 이상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주 실장의 그런 모습이 신뢰감을 주는 정석적인 모습이라는 걸 이론적으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괜히 책 잡히지 않는 게 좋긴 하지. 나는 크림색 정장에 티끌이 묻은 곳이 없는지 확인하며 툭툭 털고는 차에서 내렸다.
“일찍 도착했구나. 올라가자.”
김중호 부회장,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나에게 손짓했다. 옆에 있는 어머니는 오늘따라 유독 고상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내 눈엔 여느 때만큼 당당해 보이지는 않았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방금 마주했던 아버지의 미소가 애석하게도 나와 꽤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난 여전히 낯설고 어색했다. 이제 아버지와 함께 산 시간이 아버지 없이 살았던 시간보다 더 길어졌는데도 여전히 아버지는 나에게 모르는 아저씨 같을 때가 많았다. 이래서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부모와 유대를 쌓는 게 중요한 건데. 열네 살까지 아예 한 번도 인식한 적이 없었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무리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내 안에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 아, 노력은 그다지 들인 것 같지 않으니 그냥 시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아무튼 난 나의 침묵이 그저 상견례를 앞둔 긴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길 바라면서 조용히 엘리베이터 버튼만 응시하고 있었다.
식사 장소에 들어서니 미리 도착해 있던 상대 쪽 사람들이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얼마 뒤면 아마도 나의 시부모님이 될 중년 부부 옆에는 이태현이 서 있었다. 이태현은 어둡지 않은 진회색 수트를 베스트와 넥타이, 커프스 버튼까지 신경 써서 갖춰 입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게 몹시 잘 어울려서 나는 눈앞이 조금 어질 했다. 늙은이 아니면 망나니뿐인 이 바닥에서 이태현은 독보적으로 멀쩡한 인물이었다. 그의 외모가 곧 명성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재벌 사교 어쩌구에 관심이 없는 나라도 이태현은 모를 수가 없었다. 부모의 기업이 서열을 정하는 이 사교판에서 이태현은 그저 잘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특채 취급을 받을 정도였으니까. 나도 절반의 학창 시절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교습소 같은 곳에서 이태현을 몇 번 마주치곤 했다.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냥 존재 정도는 알고 있는 정도? 하지만 스무 살 이후로는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태현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내가 이 쪽 사람들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내가 아는 선에서 이태현은 마약이나 음주 문제가 없었고 갑질이나 행패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난달 우리 갤러리에서 열린 아트페어 VIP 프리뷰 행사에 참석한 망나니들이 ‘이태현 그 선비새끼. 완전 샌님이야. 존잘이라 좀 데리고 다닐랬더니.’라고 욕하던 걸 보면 적어도 이 쪽 세계에서는 요란한 파티나 문란한 생활을 즐기는 것도 아닌 듯했다. 뒤에서 뭘 하고 다닐지는 몰라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뭐 그 대신 다른 얘기가 들린 게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였다. 마주 앉기도 역겨운 사람과 결혼이 결정되면 집안이고 나발이고 그동안 모아놓고 꿍쳐놓고 빼돌려놓은 명품과 현금을 들고 외할머니와 살던 바닷가로 도망갈 생각이었는데 상대가 이태현이라는 말에 일단은 탈출을 잠시 보류해놓은 상태였다.
아버지가 분위기를 나름대로 부드럽게 유지하고 있었지만 상대 쪽은 저자세를 숨기지 못했다. 그건 일단 아버지의 회사가 워낙에 손꼽히는 대기업이라서 그렇기도 할 것이고 저 쪽은, 굳이 단어를 빌리자면 신흥재벌이라는 쪽이라 그럴 것이었다. 20여 년 전 소프트웨어 회사로 시작해서 점점 다른 회사를 인수해가다가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한 IT 기업은 그 규모에 비해 명망과 권위가 부족했다. 굳이 이 쪽에 발을 들일 생각이 없다면 이런 건 눈곱만큼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동열 대표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회사를 재벌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잘 보일 필요가 있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아버지 집안의 체면도 있고 저 쪽에 대한 예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깨작거리지 않으면서 또 게걸스럽지도 않게 적당히 식사를 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너무 이태현을 힐끔거리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마주 앉은 상황에서 좀 쳐다볼 수도 있는 거겠지만 아무튼 나는 내 시선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태현은 얌전히 식사를 하다가 가끔 고개를 많이 숙일 때면 동그란 머리꼭지를 보이고는 했는데 나는 그 순간에나 그를 좀 빤히 쳐다볼 수 있었다. 차가운 얼굴을 한 사람 치고 단정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이태현의 태도는 정확히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처럼 사업 얘기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나의 아버지에게 서글서글하게 굴지도 않았다. 나의 환심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또 쌀쌀맞거나 딱딱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냥 그는 이따금씩 나에게 시선을 두었고 나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는 순간이 몇 번 있었을 뿐이었다. 나를 파악하려는 건지 아니면 어른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불쾌할 것은 없었다.
이 대표가 뭐라고 말하자 아버지가 호탕하게 허허 웃었다. 서른이 넘도록 결혼 얘기를 꺼내지 않길래 대체 어떤 기업에 볼모로 넘기려고 이렇게 시간을 끄나 걱정을 했었는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진심으로 나에게 괜찮은 사람을 붙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업 쪽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재벌들이 그렇게 따져대는 권위와 급을 따져보면 한참을 밑지는 장사였지만 이 바닥에서 하자 없는 인물을 찾을 수 없으니 외곽까지 나가서 사윗감을 찾아온 것이었다. 재작년에 김준경이 철저히 재벌 카르텔 유지를 위한 정략결혼을 한 것과 비교하면 꽤 특별대우였다. 물론 김준경은 본인도 그걸 원한 것 같았지만.
사실 아버지는 내가 그다지 쓸모 있는 패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런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것일 수도 있다. 게다가 사업면으로만 봤을 때는 꽤 유용할 수 있는 상대이기도 했으니 그렇게 아까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와 낳은 소중한 딸이라는 자신만의 해석에 도취되어서 이렇게 각별한 척 신경을 썼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무리 쓸모없는 패라고 해도, 김중호 부회장이 이득 볼 생각을 가진다면 얼마든지 더 값을 쳐서 가차 없이 팔아치울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본인에겐 그게 진짜 사랑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도 처음 아버지와 만나서 나를 가질 때까지는 정말로 아버지를 사랑했다. 어쩌면 그 이후에도 얼마 간은 깨진 마음을 붙들고 사랑했겠지만 그 뒤로는 아마 사랑은 아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