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3
햇빛이 들어오는 공간에서 본 이태현은 아까보다도 더 근사했다. 밖에서 뭔가에 반짝 반사된 빛이 그의 눈동자를 잠시 투명하게 만든 찰나에는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서 괜히 헛기침을 하는 척을 해야 했다. 저 수트를 만든 사람이 이 모습을 봐야 할 텐데. 뒤로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그를 보면서 나는 옅은 안도감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일단 심미적인 것에 예민한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라는 점에 안도했으며, 그런 사람을 이렇게 내 앞에 데려다 놓은 게 바로 내가 그렇게 외면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힘이라는 점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른이 되면 스스로 돈을 벌어서 다시 바닷가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했었는데 어른이 된지도 어느새 10년이 넘어갔고 나는 여전히 서울의 커다란 집에 살고 있었다. 이제 누가 봐도 어른인 나는 이 세계를 박차고 나갈 마지막 이유가 되어 줄 정략결혼마저 순순히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입 안이 써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셔 씁쓸함을 가렸다. 뭐 특별한 원두를 블렌딩 했다면서 오지게 비싸더니 향이 좋기는 했다. 무뎌지는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혀끝으로 나의 송곳니를 더듬었다. 이태현은 내가 커피잔을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결혼식 전에 몇 번 더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결혼을 할지 먼저 정해 본 다음에요.”
나는 내 목소리가 너무 고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도록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시대착오적인 결혼을 추진하는데 독단적으로까지 보이고 싶진 않았다. 이태현은 내 말을 듣고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도 있으십니까?”
“어떤 결혼인지에 따라서요. 그걸 이제 정해봐야죠. 녹음기에 들어갈 내용이 어떤 건지.”
내 말끝에 어쩔 수 없이 묻어난 피곤함을 그가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이태현은 양손의 손가락을 서로 엮어서 깍지 낀 채로 굳게 다문 입술을 잠시 내밀었다가 금세 다시 반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저는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가 연애해서 하는 결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연씨가 원하시는 결혼은 어떤 건가요?”
그래도 내 이름은 알고 있었네. 마주한 지 거의 세 시간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불린 이름에 괜히 어깨를 더 곧게 펴보았다. 내가 바라는 건 결혼생활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쉽게 무시되는 것들이었다. 누군가는, 이 쪽의 대부분은 우습고 촌스럽다고 말하는 것들.
“저는 일단 서로 몇 가지 확인하고 싶어요. 마약, 폭력, 도박. 다 저랑은 전혀 관계없는데 이태현씨는 어떠세요?”
이태현이 불쾌해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꺼낸 말이었는데 막상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옅게 웃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초조했다.
“저도 전혀 관계없습니다.”
“문서화된다고 하니까 당연한 것도 확인하는 거예요. 그래야 적어도 지금 말한 것들은 이혼 사유로 명백해질 테니까요.”
“결혼도 아직 확정하지 않으셨으면서 벌써 이혼까지 생각하시는군요.”
이태현은 이번엔 눈썹을 확연하게 찌푸리면서 소리 내 웃었다. 나는 조금 민망해서 혹시나 내 얼굴에 그게 티 날까 봐 걱정이 됐다. 참나, 본인이 이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건데. 사실 나는 그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때를 대비해서 내가 어려운 얘기를 먼저 꺼내 주고 있구만 타박하기는. 그가 정말로 타박한 것은 아니지만 괜히 의기소침해진 나는 퉁명스러운 내 기분이 눈빛에 섞일까 봐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이태현은 자신의 목 뒤쪽을 한번 쓸어내리더니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도 여쭤봐야겠네요. 평소 바라던 결혼 생활이 있으십니까?”
“......”
이건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고등학생 때처럼 한창 감성적이었을 시기에는 결혼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현재로서는 결혼을 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린 시절, 어떤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꿈꿀 때에도 상상이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나에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그런 좌절을 몇 번 겪고 나서는 아예 상상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꿈꾸는 것도 없었다.
“특별히 없습니다.”
“사소한 것도 없으십니까?”
“네. 특별히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이태현씨는요?”
이태현은 다시 한번 또 그 뚫어질 것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보더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는 말하자면 너무 구체적이라서요. 앞으로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자리에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많은 그의 기대를 충족할 자신이 나에겐 없었다. 내가 조금 시무룩해지려고 하는 사이 이태현이 말을 이었다.
“하나 먼저 말해보자면,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게 아니면 함께 식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말 중 적어도 하루는 같이 있는 것도요.”
외로움을 타는 타입인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나는 뭐에 홀린 것처럼 네네, 대답하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가 각오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요청사항이었고, 그 말을 하는 이태현의 얼굴은 차가워 보일 정도로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아서 어떤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대체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그 누구도 이런 게 달갑지는 않을 텐데 저런 제안을 하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지.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한쪽으로 치워놓으면서 또 다른 준비한 말을 꺼냈다.
“저 그리고… 혹시 아이를 원하시나요?”
“예?”
이런 얘기가 부끄러울 나이도 아니었고 이런 얘기를 못할 자리도 아니었는데 나는 뭔가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그건 아마도 그냥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몇 마디 나눠보지도 않은 사람과 출산에 대해 말하는 건 나도 싫었지만 그래도 그놈의 ‘계약 문서’에는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할 얘기였다. 누가 그러라고 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해서 명시해놓을 필요가 있었다. 전혀 생각도 없는데 결혼 후에 내 인생과 크게 연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매번 임신 여부를 확인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그러니까… 음… 임신은 최소한 3년은 지나고…”
“상관없습니다.”
“......”
“그건 김정연씨가 원할 때 얘기해보면 됩니다.”
딱딱하고 단호한 말투였지만 나는 왠지 크게 안심했다. 그 확고한 태도에 은근히 내 경계심이 낮아지는 게 느껴졌다. 이태현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한쪽 팔을 자신의 상체 앞에 둔 채 다른 팔을 그 위에 올려 가볍게 턱을 굈다. 넓게 펼친 손바닥이 그의 입을 가리고 있어서 살짝 치켜뜬 두 눈이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이태현은 그 상태로 잠시 나를 보고 있다가 내가 별말이 없자 다시 반듯하게 몸을 세우면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지금 만나는 사람 있으십니까?”
“어… 아니요.”
뜻밖의 질문에 나는 조금 어리숙하게 대답했다. 그가 물었으니 나도 확인을 하는 게 맞는 순서였겠지만 나는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자존심이었다. 일부러 그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누그러졌던 경계심을 다시 끌어올리고 말했다.
“그리고 결혼 기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 만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런 거 신경 쓰는 스타일이신가 보네요.”
이태현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아까 말했던 ‘이 쪽의 대부분이 우습고 촌스럽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쪽 사람들은 외도를 아주 가볍게 여겨서 내가 보기엔 그냥 아예 외도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은커녕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태현은 그래도 평범한 어린 시절이 조금은 있었을 테니 다를지도 모르겠다고 아주 약간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비슷한 관념을 가진 모양이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전 기만당하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기만이라면 속이는 걸 싫어하시는 거군요.”
저 뻔뻔함은 뭐야. 웃음이 가신 얼굴로 느긋하게 말하는 태도가 역시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쓸데없이 목소리가 좋아서 더 약이 올랐다. 속이는 걸 싫어하면 속이지 않고 대놓고 하겠다 이건가? 다시 한번 ‘계약 문서’ 장치를 설치해야 할 순간이었다. 상대방의 계약 파기로 이혼하게 되면 위자료를 든든히 받을 것이고 그럼 그건 지금까지 내가 꿍쳐둔 현금이나 명품보다는 훨씬 든든한 탈출 자금이 될 것이었다.
“그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하고 자는 사람이랑 부부인 건 싫어요.”
“그 말은. 김정연씨와 저는…”
이태현이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진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건조하기 그지없는데도 난 묘한 긴장감을 견뎌야 했다. 나는 최대한 여유로운 미소를 걸고 그의 말을 대신 마쳤다.
“차차 생각해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