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4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차 문 손잡이에 손을 뻗는데 주실장이 한 발 빠르게 문을 열어줬다. 이런 것까지 혼자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비서와 동행하지 않고 혼자 서 있는 이태현을 보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미가 보이자 멀찍이 있던 주실장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이태현은 나에게 녹음기를 건넸고 왠지 나는 그걸 그가 보는 앞에서 주실장에게 전하고 싶지는 않아서 아직까지 가방 손잡이와 함께 손에 쥐고 있는 상태였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차에 올라타니 이태현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미 차 문을 열 때부터 시동을 걸어놓은 주실장은 뒷좌석 문을 닫자마자 재빠르게 운전석으로 돌아와서 순식간에 차를 출발시켰다. 우리 뭐 도망가는 거 아니죠? 내가 얼떨떨하게 말하자 주실장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실 것 같아서요. 고개를 돌려 차가 세워져 있던 곳을 돌아보자 이태현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우뚝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짙게 선팅을 해서 내 얼굴이 보일 리는 없었지만 난 괜히 목을 움츠렸다.
신호에 걸려 정차해있을 때 주실장에게 녹음기를 넘겼다. 대화가 마무리될 때쯤 이태현이 직접 저 녹음기를 들고 우리가 함께 정한 사항들을 녹음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의논된 내용을 읊는 목소리가 아주 깔끔하고 딱딱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이 결혼은 대외적으로 연애를 전제로 하며 이를 위해 양 측은 서로 협조해야 한다. 마약, 폭력, 도박은 무조건적으로 이혼의 귀책사유가 된다. 저녁은 항상 함께 식사하며 다른 일정이 있는 경우 미리 상대방에게 고지한다. 주말 중 하루는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자녀계획은 김정연의 의사에 따라 그 시기와 내용이 결정된다.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상대방 외에 다른 사람과 일시적 혹은 장기적 연애관계를 맺지 않는다. 이는 성관계를 비롯한 모든 외도의 요소를 포함한다.
이태현은 이 내용들을 말하는 내내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나만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느라 바빴다. 커피를 마시며 주의를 좀 분산시키고 싶었지만 진작에 커피도 물도 다 마신 나는 괜히 테이블 끝만 내려다보았다. 이태현의 커피가 처음에 입술을 댄 이후 그대로 남아있어서 저거라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업무적으로 그렇게 무른 스타일이 아니라서 이런 계약 자리에서 밀린다거나 기가 죽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자꾸 이태현에게 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이태현이 하는 거라고는 반듯하게 앉아서 날 쳐다보는 것뿐이었는데. 이래서 역사적으로 미인계가 있었던 건가?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었던 약점을 발견한 것 같아서 난 얼굴을 찌푸리고 짧게 혀를 찼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이태현이 차분하게 건넸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럼 결혼은 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대답했더라. 짧게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했다. 주실장이 내가 피곤할 것 같다며 도망치듯 차를 몰고 나온 게 이해가 갔다.
집에 도착해서 뜨거운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뛰어들었더니 그제야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지친 와중에도 나는 내 방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기 전까지는 집에서 어떤 기색도 띠지 않았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도 그랬다. 주실장의 보고를 받은 건지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었다. 대화는 잘 나눴는지 어땠는지 묻는 어머니의 말투가 다정했지만 나는 왠지 마음이 좀 그랬다. 지금 어머니의 진짜 마음은 어떨까? 내가 괜히 밖에서 이상한 놈을 만나느니 이렇게 부모까지 따져볼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실까? 아니면 내가 진작에 이곳을 박차고 뛰어나가서 자유롭게 원하는 사람을 찾기를 바라셨을까? 복잡한 마음에 나는 그저 같은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람 같아요. 네, 좋은 분인 것 같아요.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휘젓듯이 덜 마른 머리카락을 흩뜨리다가 희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초등학교 친구였던 희인이는 내가 마을에서 증발하듯이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연락을 해준 친구였다. 그 덕에 외할머니댁에 갈 때마다 만나면서 계속 가깝게 지냈고 같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나에겐 정말 둘도 없는 소중한 친구가 됐다. 정말 말 그대로 둘도 없었다. 좋은 사람들은 대학 동기나 우리 갤러리 직원들 중에도 있지만 그래도 희인이 만큼 내 모든 걸 보여줄 수는 있는 사람은 없었다. 희인이가 지원한 과에 예비번호가 떴을 때 나는 희인이보다 더 간절했었다. 막상 희인이는 가군에 쓴 학교에서 이미 합격통지를 받은 터라 ‘아, 추합 되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나는 진짜 유난스럽게 절박했었고 결국 추가합격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전화기를 붙들고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 덕에 내 20대는 한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희인이는 나에게 이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친구인 동시에 이 생활을 박차고 나가고 싶게 하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이 세계만의 기이한 과정을 겪은 날엔 걔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흰!”
[응, 왜~]
“야, 나 오늘 결혼할 사람 만나고 왔어.”
[벌써? 아니 저번 주엔가 뭐 결혼 얘기 나온다더니. 어제 톡 할 때 왜 얘기 안 했어!]
“헤헤. 나도 실감이 안 나서… 오늘 상견례 가서 자리에 앉으니까 그제야 뭔가 하는 건가 싶던데.”
[히익, 상견례... 그래서 어땠는데? 혹시 오늘이 바로 탈출하는 날인가? 그래서 지금 우리 집 오겠다고 전화한 건가?]
희인이가 너무 진지하게 말해서 웃음이 터졌다. 하긴 내가 맨날 탈출할 거라고 입에 달고 살긴 했지. 상대가 이태현이라는 말을 듣기 전엔, 이런 결혼은 정말로 절대로 결코 할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고 정말 못 견디게 싫어서 할 수가 없는 거였다. 그런데 이태현이니까… 일단 소름이 끼치지도 않았고 몸서리가 쳐지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고 말했다.
“아니. 결혼할 것 같아.”
[뭐야, 진짜?]
“어, 되게 잘생겼거든.”
[그럼 해야지.]
“아, 뭐야~”
[근데 막 이상한 놈은 아니지? 하긴 그러니까 네가 결혼한다고 했겠지.]
“응. 일단 괜찮은 것 같아, 아마도. 사실 잘 모르겠는데 좀 봐야지.”
희인이에게 말하다 보니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좀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괜찮은 것 같으니까 좀 봐야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게 결론이었다. 희인이랑은 조금 더 통화를 하다가 끊었다. 희인이가 약간 캐물어서 나는 오늘 이태현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그게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좀 주책맞게 말했고 희인이는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식당 음식이 맛있다면서 다음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편안한 대화 덕에 나는 마음이 많이 느슨해진 상태였다.
그대로 잠깐 침대에 누워있는데 가방 안에서 짧게 진동이 울렸다. 하루 종일 업무용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주실장 통해서 연락이 왔을 텐데. 일단 핸드폰 충전도 해야 하니까 느적느적 기어서 가방에서 업무폰을 꺼내왔다. 화면에 뜬 메시지의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그 내용에서는 생생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태현입니다. 내일 일정 괜찮으시면 점심 같이 할 수 있을까요?]
헤어지기 전 서로 명함을 교환했는데 거기엔 업무용 번호만 적혀있어서 이쪽으로 연락을 준 것 같았다.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렇게 곧바로 또 만난다고? 급하게 다시 만나자고 하는 게 혹시 뭔가 오늘 다 하지 못한 말이 있는 건가 싶어 신경이 거슬렸다. 오늘 이태현도 꺼내지 않고 나도 모른 척한 얘기가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본인이 알아서 정리하면 될 일 아닌가? 나는 앞서서 뻗어나가는 생각의 가지를 가까스로 붙잡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내일은 절대 오늘처럼 말려들지 말아야지. 나는 굳은 결심을 되새기며 알겠다고 답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