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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예사로운 접촉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각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5



11시 20분. 아직 이태현과 약속한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더 남았는데 도저히 업무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오늘 난 평소의 출근용 와이드팬츠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어제의 모습과 너무 다른가 싶어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근데 이태현도 뭐 어제처럼 쫙 빼입고 오진 않을 거 아냐. 의자에 푹 기대앉아서 쭉 내민 입술 위로 만년필을 올리며 생각했다. 신고 있는 흰색의 투박한 운동화가 키높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어제 신었던 하이힐만큼은 아닐 것이었다. 난 작지도 크지도 않은 키였지만 이럴 땐 더 키가 크고 싶었다. 주실장만큼만 커도 훨씬 만만치 않아 보일 텐데. 어제부로 약혼자가 된 사람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한 건데 뭔가 기선제압이 필요한 경쟁자를 만나는 것처럼 비장해졌다. 왜 혼자 오버지. 나는 찌푸리고 있는 미간을 문질러 피면서 만년필을 테이블 위로 굴렸다. 아, 엄청 긴장되네. 괜히 입술을 푸르르 풀어보고 있는데 스케줄러 위에 올려놓았던 업무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네, 주실장님.”

[이태현 팀장님 도착하셨습니다.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네?”


벌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사무실 안은 언제나처럼 허전할 만큼 깔끔했다. 지금 바로 즉시 퇴사 가능을 목표로 정리해놓은 사무실은 집기가 느는 일이 없었다. 나는 나동그라져있는 만년필을 집어 펜꽂이에 꽂았다. 그때 이태현이 사무실로 들어왔고 나는 본인 사무실에서 애매한 각도로 자리에 우뚝 서있는 모습으로 그를 맞았다.


“어…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네. 업무에 방해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마무리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태현은 마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업무는 무슨, 그쪽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무리할 게 뭐가 있겠어요.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이태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아니에요. 일단 앉으세요. 마실 것 좀 드릴까요?”

“네, 그럼 물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탕비실에서 생수 두병을 가져와 이태현에게 하나를 건넸다. 이태현은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꽤 제대로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진한 네이비색 수트에 붉은빛이 도는 실크 넥타이를 한 그는 어제보다 조금 더 어려 보였다. 나보다 두 살 어리댔나. 아무튼 디자인팀을 맡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고려해보면 다소 경직된 스타일링이었다. 뭐 트렌디하고 젊은 이미지의 기업이라면서 마냥 그렇지도 않나 보네. 나는 너무 빤히 살피는 티가 나지 않게 적당히 눈길을 돌렸다. 그가 물을 마시는 동안 나는 보고 있던 문서와 PC를 정리했다. 예상보다는 일렀지만 그래도 점심을 먹으러 가지 못할 시간도 아니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그 앞에 서자 이태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위 쪽을 보느라 드러난 흰자위가 하얗고 맑았다. 나는 괜히 입 안이 마르는 것 같아서 일부러 더 가볍게 말했다. 


“가시죠.”


이태현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웬 직육면체 모양으로 포장된 종이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일하시는 곳에 처음으로 오는 건데 빈손으로 오기 그래서요.” 

“그럼 선물이네요?”


뜻밖의 선물이 꽤나 반가웠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열자 안에서 연보라색 꽃이 핀 작은 화분이 나왔다. 싱그러운 향기가 퍼져 나오는 화분 앞 쪽엔 ‘프리뮬러 말라코이-’라고 쓰인 자그마한 이름표가 꽂혀 있었다. 


“와, 너무 예뻐요.”

“물은 겉흙이 마를 때쯤 주면 된다고 합니다. 꽃잎에는 닿지 않게요.”

“고맙습니다. 진짜 맘에 들어요. ”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게 불쑥 선물을 받는 것도 좋은데 이렇게 예쁘고 잔잔한 화분이라니.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가져가려다가 아직 날씨가 좀 쌀쌀한 것 같아서 커피 테이블 위에 그대로 놓고 생수병을 열어 화분 위로 물을 부었다. 흙이 아직 촉촉한 것으로 보아 이미 물을 준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분을 내고 싶어서 꽃이 상하지 않을 만큼만 아주 조금 물을 조르륵 흘렸다. 그동안 이태현은 뒷짐을 지고 가만히 서서 시선을 조금 내리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내 행동이 마무리되길 기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얌전한 태도 때문에 그가 약간 쑥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태현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근처에서 중요한 미팅이 있을 때 때때로 예약했던 한식당이었다. 입식 좌석에 메뉴도 적당히 현대화되어서 연령 구분 없이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나는 특히나 이곳의 채소튀김을 좋아했는데 단호박과 고구마를 포함한 여러 채소들을 큐브 모양으로 자른 다음 튀겨서 맛탕처럼 달콤한 소스에 졸인 요리였다. 난 메인 요리보다도 사이드로 나오는 그 요리를 더 좋아했다. 산뜻하고 깔끔한 맛이지만 그래도 그 요리는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께서 간식으로 종종 만들어주셨던 고구마 맛탕을 떠올리게 했다. 이미 화분 선물로 마음이 풀어져있던 나는 어제의 비장함은 뒤로 미룬 채 설레는 허기를 안고 예약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드시고 싶은 게 있는지 미리 물어봤어야 됐는데, 급하게 예약하려다 보니까 일단 무난한 곳으로 정했습니다.”

“괜찮아요. 여기 자주 오는 곳입니다.”


이태현은 나를 무슨 거래처 임원 대하듯 했다. 물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래처의 임원이긴 하지. 그래도 뭔가 이런 관계의 구도는 좀 불편했다. 그냥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확실히 뭔가 목적성이 없다고 하긴 어려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서야 오늘 만남의 목적이 떠올랐다. 


“그래서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식당 직원이 전채 요리들을 세팅해주고 나간 후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태현은 내 질문에 잠시 나를 가만히 보다가 자신의 접시로 시선을 옮기며 무던하게 말했다.


“어제 다음에 또 뵙자고 했잖습니까.”

“그것 때문에요?”

“네.”

“그래도 너무 바로… 예약을 급하게 하시면서까지 만나자고 하셔서 무슨 용건이 있나 했어요.”


말을 돌리려는 것 같은 태도에 한 번 더 캐물었는데 이게 잘하는 건가 싶었다. 오늘 이태현이 말하려는 게 내가 예상한 내용이 맞다면 오히려 내가 말을 못 꺼내게 방어적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이 갈팡질팡하는데 그 와중에 혀 끝에 닿은 채소튀김 소스에서 고소하고 달콤한 풍미가 퍼졌다. 이태현은 천천히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했다.


“용건도 있기는 합니다.”

“말씀하세요.”

“다음 주 금요일에 저희 회사에서 사업 설명회가 있는데 와 주실 수 있을까요? 브랜드 디자인 리뉴얼 관련된 발표라 제가 메인 프레젠터로 진행합니다.”

“아, 제가… 제가 그냥 참석하면 되나요?”

“네. 이달 말이면 저희 결혼 기사도 나갈 텐데 그전에 공식적인 자리에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나는 좀 얼빵하게 대꾸했다. 이태현과의 대화는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아니 그럼 보여주기 위해서 날 초대하는 건가? 와, 티 내는 거에 진짜 진심이네.


“급하게 연락드려서 죄송하지만,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일정이 다 차있어서요. 그 이후에 말씀드리기엔 너무 늦을 것 같아서 불가피하게 오늘 만나 뵙자고 하게 되었습니다.”


사업 설명회가 바로 다음 주면 한창 바쁠 텐데 뭐 그럴 수 있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결혼하기로 한 건데 이왕이면 협조적인 게 서로 편할 것이었다.


“일정 괜찮으신가요?”

“다음 주 금요일… 괜찮습니다. 정확한 시간이랑 장소는 메시지로 전달해주세요.”

“네.”


이태현은 짧게 대답하며 옅은 미소를 띠었는데 그게 왠지 좀 안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본인에게는 꽤 중요한 일인가 보네. 다시 속눈썹을 내리깔고 묵묵히 식사를 하는 그를 잠깐 보다가 겨우 시선을 끊어냈다. 나는 어제 단단한 결심을 한 사람 치고 너무 무르고 다루기 쉬웠다. 본 식사가 나오기 전에 전채 요리 그릇을 치우러 직원이 들어왔다. 이태현은 직원이 자리를 뜨기 전에 가만히 손을 들어 채소튀김 그릇을 가리켰다.


“이 메뉴 하나 더 주세요.”

“네. 본 식사랑 같이 드릴까요?”


이태현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이태현이 짧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직원은 조리되는 대로 가져다 드리겠다고 말한 후 그릇을 챙겨 나갔다. 지금 나는 점잖은 모드라서 나름대로 차분하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이태현은 어떻게 내 기호를 알아챈 건지. 생각보다 이태현은 섬세하고 예리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지만, 금방 다른 직원이 본 식사를 세팅해줘서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십니까?”

“저요?”


그럼 나지, 누구겠냐. 여기에 나 말고 누가 있다고. 나는 자꾸 멍청하게 행동하는 내가 답답해서 스스로 무릎을 꽉 쥐었다. 다행히도 이태현은 나의 어리버리한 태도에도 자신의 눈빛을 잘 숨겨주고 있었다.


“글쎄요. 딱히 하나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고. 그때그때 달라지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이태현씨는요?”

“저는… 저도 뭐 딱히 없습니다.”


금세 방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하, 나는 이런 고요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딘다. 차라리 업무적으로 딱딱한 얘기를 할 때는 괜찮은데 사적인 자리에서 침묵이 흐르면 난 왠지 자꾸 초조해졌다. 그럼 이 자리는 사적인 자리인 건가? 그놈의 공사 구분에 머리가 또 복잡해지려고 해서 나는 갈비찜을 조금 깨작거리다가 그냥 되는대로 말을 꺼냈다.


“저는 너무 많아서 하나를 못 고르는 것 같아요. 그냥 지금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베이글이랑 크림치즈 같이 먹는 것도 좋아하고요. 치즈케이크도 좋아해요. 음, 커피도요.”


내가 주절주절 얘기하자 이태현이 입꼬리를 일자로 꾹 누르며 웃었다. 나는 그 얼굴에 마주 웃고 있다가 이번엔 그쪽 차례라는 눈빛을 보냈다. 주고받아야 대화 아니겠습니까? 어느새 그 무감한 얼굴로 돌아온 이태현은 내 눈빛을 읽은 건지 냅킨으로 입가를 한 번 닦고 말을 꺼냈다. 


“저는 과일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오, 특별히 좋아하는 과일이 있으세요?”

“그냥 달고 시원한 느낌이 좋은 거라서요. 배나 수박처럼.”

“저는 자몽 좋아하는데.”

“자몽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에이. 그럼 체리는요? 저 체리 엄청 좋아해요.”

“저도 체리는 좋아합니다.”


이태현이 살짝 소리 내서 웃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숨을 돌리고 있는데 때마침 직원이 채소튀김을 가져다줬다. 갓 튀겨서 따끈한 단호박을 베어 먹으면서 나는 예상했던 것보다 이 식사자리가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사적인 자리가 맞는 것 같았다. 이 결혼에 대해 자꾸만 나쁘지 않고, 괜찮고, 그럭저럭 맘에 든다고 느끼는 순간이 생겼다. 이건 썩 좋은 징조만은 아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방에서 계산까지 끝낸 다음 자리를 나섰다. 이태현은 직원들이 드나드는 사이 계산서에 카드를 끼워 적당한 타이밍에 주고받았다. 그 흐름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서 약간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지금까지 본 이태현은 모든 게 물 흐르듯 매끄럽고 침착하고 능숙해 보였다. 아직까지는 수상하거나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자꾸 불안감이 불쑥 솟구치곤 했다. 모든 거래에서 이유 없이 좋은 조건은 없는 법이었다. 이 결혼이 그렇게까지 이태현에게 이득이 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미묘한 불안은… 좀 더 개인적인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31살의 나는 24살의 엄마보다는 순진하지 않아야 했다. 




문을 열고 방을 나서려는데 이태현이 조금 가까이 붙어 나오며 내 옆으로 섰다. 나란히 서니 생각보다 눈높이 차이가 많이 났다. 내가 그를 올려다봤지만 그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 이태현은 내 오른쪽 허리 뒤쪽에 아주 살며시 손을 올렸다. 좁은 복도를 지나면서 그가 나를 자기 쪽으로 감싸는 듯한 모양이 만들어졌다. 지나는 손님과 직원은 물론 옆의 통창을 통해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눈에 띄기 좋은 위치였다. 참 디테일하게도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구만. 유별나다 싶었지만 별로 기분 나쁜 것도 아니라서 말없이 그냥 그대로 걸었다. 차에 도착하자 이태현이 차 문을 열어줬고 나는 얌전히 조수석에 앉았다. 차 앞유리를 통해 운전석으로 돌아오는 이태현을 보는데 그의 손이 닿았던 곳에 남은 온기가 느껴졌다. 넓은 면적으로 아주 가볍게 올라가 있던 그 체온이 은근했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나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예사로운 접촉에 대한 새삼스러운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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