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립나 Oct 22. 2023

조금 특이한 눈을 가진 사람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7



식사 장소로 들어오는 김정연을 보았을 때 그 여전한 눈빛에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결혼이 결정된 이후로 멈추지 않고 득달같이 쏟아지는 아버지의 여러 당부들에 점점 숨이 막히고 있을 때였는데 김중호 부회장 뒤로 들어오는 김정연의 모습은 내 주변 공기를 조금이나마 환기시키는 것 같았다. 김정연은 순순히 자리에 앉아 협조적으로 대화에 참여했지만 눈빛은 그 어떤 일탈을 하는 사람들보다 가장 반항적으로 보였다. 무겁게 달구어지고 있는 그 눈빛은 꼭 재규어 같았는데 새카만 머리카락 때문에 그중에도 흑재규어와 닮은 모습이었다. 따뜻하고 온화한 색으로 빛나는 크림색 정장과는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그의 아버지가 뿜어내는 근엄하고 용맹한 카리스마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김정연은 그 방 안의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세가 있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할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삐져나오려고 해서 접시에 고개를 박아 얼굴을 숨겨야 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사업적 결혼이라면 김정연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근거도 사유도 없는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아버지는 이 자리가 조금 버거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저쪽 회사가 엄청난 거물이긴 했지만 우리 사업 스타일을 따져봤을 때 그리 꼭 맞는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를 가교로 삼아 이어질 수 있는 다른 회사나 집안들 중에 더 간편하고 유용한 상대들이 많았다. 형이 이미 평범하고 정상적인 집안의 사람과 결혼을 한 이상, 아버지에게 희망은 나뿐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최대한 나의 협력을 끌어내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나는 마치 나의 배포와 야망이 그만큼 큰 것처럼 부풀려서 김정연과의 결혼을 선택했다. 그건 나로서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최악의 경우 엉망으로 실컷 이용만 당하다가 신경쇠약을 견디지 못하고 팽 당할 가능성도 충분히 높았지만 나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었다. 그냥 느낌이었다. 내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마주쳤던 그 형형한 눈빛은 적어도 비겁하거나 영악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버지의 회사가 안정적으로 재계 순위에 머물게 되었을 시기에 나는 초등학생이었고 형은 이미 청소년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의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을 각오를 하고 계셨다. 사립 초등학교에서 사귄 친구를 통해 ‘하이클래스’ 자녀들만 다닌다는 학원과 교습소를 알아낸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나의 모든 시간표를 그것들로 채웠다. 그렇게 다니게 된 미술 회화 교습소에서 난 김정연을 만났다. 수많은 학원들 중에 내가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좋아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미술이 무슨 도움이 되냐며 교양이나 친분을 위해 몇 개월만 다니고 말라고 못마땅해하셨지만 난 그곳에 갈 때나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도 난 김정연을 이용했다. SH그룹 딸도 다니는 곳이라는 말에 아버지는 중학교 3년 동안은 그 교습소에 계속 다니게 해 줬다.

그때 김정연은 나와 시간표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겹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었다. 그냥 그는 언제나처럼 뜨끈하게 달구어진 눈을 하고 이젤 앞에 앉아있거나 복도에서 화구 가방을 들고 걷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못마땅함과 언짢음을 뿌연 물길 아래로 감추고 있는 모습은 확실히 인상적이었다. 저 누나가 그 누나야. 갑자기 나타났는데 게다가 1년 꿇었대. 헐, 그럼 사생아 그런 거야? 근데 김준경 형이랑 동갑이라던데. 모든 게 부모가 세워놓은 계획대로 오차 없이 진행되는 삶을 사는 이곳 애들은 자신과는 달라 보이는 김정연을 궁금해하고 신기해하고 약간은 불편해하면서 동시에 조금 두려워했다. 김정연은 자신과 같은 학년의 친구들과 문제없이 이야기했고 가끔 웃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내 눈엔 그 모든 게 그냥 봐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난 화가 났지만 너네한테 화난 건 아니니까 괜찮아, 같은 느낌. 2년 정도 같은 교습소에 다니다가 김정연이 먼저 그만두면서는 그렇게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사교클럽에서 큰 행사를 열 때나 볼 수 있어서 1년에 한두 번 겨우 마주칠까 말까였다. 그때는 김정연이 내 인생과 어떻게든 연관될 일은 전무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특별한 감상은 없었다. 그냥 조금 특이한 눈을 가진 사람.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나와 부부가 되기로 협상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나와 마주 앉은 김정연은 식사 때보다 한결 부드러운 눈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마치 사냥감이 될 만한 소동물을 앞에 둔 너그러운 맹수의 눈 같았다. 자신의 결벽적인 조건을 계약 사항으로 풀어내면서도 나에게 무례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 와중에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도 보이는 아주 친절한 맹수였다. 김정연이 왜 나랑 결혼하겠다고 결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이 상황이 꽤 맘에 들었다. 이 바닥 인물들을 생각해볼 때 김정연이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었고 내가 그 조건에 맞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연에게 자세히 말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최대한 요란하고 로맨틱한 결혼이 필요했다. 아버지가 대표로 있는 회사지만 거의 공동 설립에 준하는 역할을 한 이사들이 3명이나 있었고 그들의 자녀들도 각자의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형이 이 회사를 이어받고 나도 대주주가 되어 우리 집안이 주식의 과반 이상을 차지하려면 수익성이 확정된 사업이나 압도적인 외부의 지지가 필요했다. 효용 있는 사업 대신 이미지와 권력의 지지를 선택한 결혼이 된 이상 나와 김정연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관계라는 공표가 필요했다. 기업 이미지 브랜딩이 중요한 시대에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업가를 선호했고 러브스토리는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주제였다. 난 이 결혼에서 그 두 가지를 모두 보여주어야 했다. 아마도 그게 내 사명일 것이었다.



김정연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갤러리로 가면서 그쪽 직원들에게 나눠 줄 쿠키와 음료를 구입했다. 평소라면 비서 역할을 해주는 피터가 선물 픽업부터 운전까지 담당해줬겠지만 당장 다음 주에 있는 사업 설명회 때문에 그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리고 어차피 나도 김정연과 단둘이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스스로 운전해서 피터가 미리 주문해둔 것들을 가지러 카페에 들렀다. 쿠키와 음료를 받아 밖으로 나왔는데 카페 옆 화원이 미니 화분들을 잔뜩 내놓은 게 보였다. 봄을 맞아 꽃들을 많이 들여온 모양이었다. 그중에 색에 예민한 편인 나의 시선을 끄는 꽃이 하나 있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라벤더색 꽃잎이 팍팍한 기분을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화분을 하나 사서 차에 탔다. 다시 갤러리로 운전하면서 저 작은 꽃잎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을 김정연을 상상해봤다. 초원에 핀 들꽃 향기를 맡는 재규어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김정연의 사무실은 내 생각만큼이나 차가웠고, 내 생각보다 황량했다. 과시하는 성격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사무실에서 직급이 반영된 위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들어갔을 때 김정연은 미리 서서 나를 맞아줬는데 어제보다 훨씬 자유로운 복장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뭐 낯이 익을 만큼 본 사이는 아니긴 했다. 그리고 김정연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게 선물을 반겼다. 그냥 예의상으로 하는 말이라기에는 눈이 너무나도 반짝거렸다. 고여있는 용암처럼 무거운 눈빛을 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말 눈앞의 그 꽃을 닮은 눈빛을 보였다. 어쩌면 그는 달구어진 쇠나 뿌연 물길이 아닌 거울 같은 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연은 사업 설명회에 참석해달라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그건 친절이나 예의라기보다는 지극히 사업적인 선택으로 보였다. 알아본 바로는, 김정연은 효율적인 업무 처리 방식을 선호했고 비즈니스에서 망설임도 없는 성격이었다. 젊은 나이에 큰 갤러리의 총괄 디렉터를 맡다 보니 그쪽 업계에서는 은근히 얕보는 시선이 있었다고 하는데 예술 기획 쪽은 전문 디렉터에게 맡기고 경영 전면에 나서서 꽤 큰 건들을 성사시켰다고 했다. 여전히 부정적인 말들은 많았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권력에 아예 무임승차한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여론이 생겼으니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는 신속하게 우리의 안건을 처리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교양 있고 점잖게 식사하는 와중에도 그 눈에 비치는 기분은 가려지지 않아서 그건 좀 신기했다. 진지한 얘기를 하다가도 채소를 튀긴 요리를 먹을 때면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 나른한 눈을 했는데,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김정연은 그의 표정으로 방 안의 분위기를 모두 바꿀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혼과 관련되지 않은 일상적인 대화는 김정연이 주도했다. 한참 전이긴 하지만, 예전에 봤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무난하게 대화를 하고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저 그게 그다지 진심이 아닌 것처럼 보였을 뿐.


식사를 마무리하고 나오면서 김정연의 허리에 손을 얹고 어색하지 않을 만큼 붙어 섰다. 앞쪽에는 갤러리들이 모여있고 뒤로는 부촌을 끼고 있는 위치상 이 한식당에는 나와 김정연을 알 만한 사람들이 많이 오는 편이었다. 프라이빗한 구조 때문에 연예인이나 유명인들도 자주 왔는데 그만큼 소문이 잘 흘러나오기도 하는 곳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방에 출입했던 직원들이 우리를 주의 깊게 보는 눈치였고 통창 밖으로 보이는 주차장은 만차에 사람들이 오가고 있어서 친근한 장면을 연출하기에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우리가 누군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적거나 없을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저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그때 봤던 커플 있잖아. 그 사람들이 누구랑 누구였대. 오히려 기억이 흐릿할수록 이야기는 더 멋대로, 더 크게 잘 부풀었다. 아무것도 아닌 눈빛에도 분위기가 냉랭했다는 말이 도는가 하면 아무것도 아닌 행동에도 서로 죽고 못 산다는 소문이 퍼졌다. 세세하게 계약사항을 조정한만큼 잘 따라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김정연은 정말로 협조적이었다. 진심으로 나에게 애정이 있는 것처럼 나를 올려다보고 주차장까지 불편한 내색 없이 함께 걸었다. 오히려 그가 걸을 때마다 내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그의 움직임을 내가 너무 의식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김정연을 다시 갤러리로 데려다주면서 우회전을 할 때마다 시야를 넓혀 슬쩍 그를 살폈다. 김정연은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면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아무 의도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이 편안해서 아까의 긴장이 천천히 풀렸다. 갤러리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김정연은 누군가와 짧게 통화를 했는데 아마 이후에 또 약속이 있는 듯했다. 친근한 말투로 보아 사적인 약속이거나 친한 사람과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의 손에는 두 개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김정연은 바빠 보였고 나 또한 최대한 빨리 들어가 봐야 했기 때문에 지체 없이 인사를 나눴다. 그가 내리고 몇 개나 쌓여있는 피터의 메시지를 확인한 다음 피터에게 전화를 걸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갤러리 정문 앞을 지나는데 누군가 김정연과 팔짱을 끼고 있는 게 보였다. 눈에 띄게 키가 큰 남자였는데 둘 사이의 거리가 몹시 가까웠다. 저래서는 내가 만들려고 하는 소문이 힘을 못 쓰겠는데.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잠시 망설였던 김정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일단 피터가 급하게 확인을 부탁한 사항들을 체크하며 회사로 향했다.







이전 06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