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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그날 꽃을 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8



주말 오전이라 차가 막힐까 봐 조금 일찍 출발했더니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20분 정도 먼저 도착했다. 웨딩플래너 역할을 해주는 직원과 만나 인사하자 대화를 나눌 안쪽 공간으로 먼저 들어갈 건지, 이태현과 함께 들어갈 건지를 물었다. 일단 이태현이 오면 같이 들어가겠다고 대답하긴 했는데, 정확히는 그 질문이 ‘신랑 분 오시면 함께 들어가시겠어요?’ 여서 약간 머쓱했다. 따뜻한 차를 가져다준 직원은 나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는지 안 쪽 공간으로 들어가는 코너에 위치한 데스크에서 자료를 한번 더 정리하고 있었다. 난 딱히 할 것도 없고 해서 무료하게 소파에 기대앉아 있다가 직원이 나에게 시선을 두고 있지 않는 틈을 타서 조금 더 늘어졌다. 아침잠이 많은 나에게 주말 오전은 허리를 곧게 펴고 있기에는 나른한 시간이었다. 아까 아이스커피로 달라고 할 걸. 따뜻한 얼그레이 차는 카페인 여부와 상관없이 나를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소파에 거의 드러눕다시피 몸이 기울어진 상태로 고개를 젖혀가며 하품을 하고 있는데 통창을 통해 택시에서 내리는 이태현과 눈이 마주쳤다. 입을 가리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민망하긴 했다. 슬금슬금 몸을 일으키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으려니 이태현이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에?”


아직 하품의 여운이 남아서 맹하게 대답이 튀어나갔다.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보다 5분 정도 지난 상태였다.


“오는 길에 사고가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고요? 괜찮으신 거예요?”

“아, 네. 가벼운 접촉사고였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어디 다쳤으면 어떡해요.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왠지 갑자기 택시를 타고 왔더라니. 난 알아채지도 못했던 5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까 뛰어 들어오는 거 봐서는 크게 다친 부분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지독했다.


“다친 곳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검사해보셔야 될 텐데…”


이태현이 꽤 단호하게 얘기해서 뭐라고 더 권유하기가 어려웠다. 그 정도로 걱정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이도 아닌 것 같았고. 이태현은 평소처럼 무감한 얼굴로 나의 흐려지는 말끝을 듣다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들어가시죠.”


이태현이 안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어느새 우리 근처에 다가와 있던 직원은 이태현과 나의 대화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아버지의 그룹 산하에 있는 계열사 호텔에서 결혼을 하게 된 우리에게 식장을 꾸미는 선택지는 과할 정도로 많았다. 나는 결혼식에 대해 특별한 로망은 없어서 이태현에게 선택을 약간 떠넘겼다. 이태현은 나의 의견을 몇 번 묻다가 내가 최악의 디자인만 몇 개 걸러낸 후로는 금방 방향을 잡아갔다. 이태현은 눈을 내리 깔고 있을 때면 평소의 짙은 얼굴과는 다르게 청순한 분위기를 냈는데 웨딩 로드 세팅을 고를 때는 그 얼굴이 청순하다 못해 순수해 보일 정도였다. 디자인 쪽 일하는 사람이니까 의외로 이런 것에 로망이 있었을지도? 미미한 미소를 띠고 견본 사진들을 넘겨보는 이태현의 손길이 적극적이었다. 

하객들이 앉을 테이블 세팅까지 모두 고르고 이제 메인이 될 꽃들만 선택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꽃은 사진 말고도 실물 견본도 들어오는 게 있다며 가지러 가느라 직원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태현이 이미 고른 컨셉 디자인을 다시 살펴보는 동안 난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까부터 번쩍거리던 그의 스마트 워치가 눈에 걸렸다. 나에게 크게 들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계속 진동과 여러 알림 창이 뜨는데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이태현이 의아했다.


“계속 뭐가, 연락이 오는 것 같은데요.”

“아…”


이태현은 나의 말에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목을 한 번 내려다보더니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하면서 워치를 풀었다. 그리고는 별다른 말없이 그대로 워치를 자신의 자켓 주머니에 넣어버리고는 다시 태블릿 PC에 뜬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늘 옷차림에 맞춰 손목시계까지 신경 쓰는 타입인 그가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걸 봐서는 보통 바쁜 게 아닌 듯했다.


“저기, 아무래도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나의 말에 잠시 주춤한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뭐 우리 사이가 모든 일의 우선순위가 될 만큼 엄청난 것도 아니고, 다음 주에 중요한 일이 있는 걸 뻔히 아는데 굳이 이렇게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구색을 맞추느라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잖아요. 여기서 정할 건 이태현씨가 거의 다 정해줬으니까 꽃은 제가 정하고, 집은… 제가 보고 정리해서 메시지로 설명드릴게요. 그건 오늘 밤에? 암튼 이번 주말 안에만 같이 얘기해서 정해 보면 되니까 가보세요. 큰 일도 앞두고 있고 아까 사고도 처리하셔야 할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


이태현은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꼬리가 조금 처져있는 것 같아서 나는 그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로요. 어려운 부분은 다 끝났으니까.”

“그럼 정말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풀어뒀던 정장 자켓의 단추를 채웠다.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리고 꽃은, 최대한 예쁜 거 골라보긴 할 건데 혹시 나중에 맘에 안 드시면 바꾸셔도 되고요.”

“괜찮습니다. 그날 식장에서 꽃을 보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이태현은 그렇게 말하고선 나와 눈을 맞추고 조용히 웃었다. 그건 꼭 나를 지그시 누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내가 빨리 보내줘서 그런가. 왜 저렇게 그윽하고 막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설렐 것도 같게 웃지? 괜히 간지러워져서 내 볼을 슥슥 긁었다. 나는 돌아서는 이태현의 등에 대고 외쳤다.


“이태현씨.”


이태현이 다시 워치를 차다가 나를 돌아봤다. 그는 금세 다시 무구한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병원 꼭 가보세요. 아무리 바빠도 꼭이요. 손목 그거 놔두면 내일은 아예 못 쓸지도 몰라요.”

“네. 고맙습니다.”


이태현은 워치의 밴드가 다시 단정하게 둘러진 손목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그가 나가고 나서 직원이 금방 꽃 샘플들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샘플과 사진들을 둘러보며 무난하게 흰색 꽃으로 몇 가지를 골랐다. 샘플 중에 특히나 꽃잎의 촉감이 맘에 드는 것이 있어서 그 꽃을 메인으로 정했다.


“이 리시안셔스, 혹시 다른 색도 있나요?”

“네. 핑크색, 살구색, 노란색, 보라색 다양하게 있어요. 원하시면 다른 색으로 염색도 가능하세요.”

“보라색이면 어떤 톤인가요?”

“파스텔톤 연보라색과 진보라색 모두 있습니다.”

“그럼 연보라색 리시안셔스로 포인트를 주면 좋겠어요.”


이태현이 직접 골라온 화분을 생각하면 무난한 색 선택이었다. 풍성하게 피어나는 연보라색 꽃잎을 상상하며 나는 태블릿 PC의 화면을 껐다. 워치를 차고 소매를 정리하던 이태현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말투만큼이나 간결한 움직임이 그와 잘 어울렸다.










예식장 컨디션을 정하고 나서는 점심을 먹고 집을 보러 이동했다. 나는 따로 부동산 중개인과 연락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오전에 많은 것을 안내해주었던 그 전담 직원이 집은 물론이고 앞으로 있을 결혼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처리해준다고 했다. 내가 여러 사람을 만날 필요 없이 간단하게 결혼 준비를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나야 편했지만 이 직원은 그 모든 것들을 배우고 정리하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싶었다. 같이 점심을 먹으면서 대화해보니 다행히도 그는 이런 일을 즐기고 좋아하는 듯했다. 그 말을 하며 웃는 그의 얼굴은 꽤 진심 같았는데, 생각해보면 고객한테 업무에 대해 불평 할리가 없기는 했다.


꽤 친해진 직원과 별문제 없이 세 군데의 집을 살펴보고 각각 영상도 찍어왔다. 이태현은 직접 보지 못할 테니 영상은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찍었다. 내심 마음속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 있기는 했는데 그의 취향은 또 어떨지 모르니 대화해보는 게 중요했다. 괜히 압박하고 싶지는 않아서 집에 돌아와서 씻고, 밥 먹고, 영화 보고 9시가 넘은 걸 확인하고 나서야 메시지를 보냈다. 아까 고른 꽃들의 사진과 보고 온 집들의 영상을 보내고 짧게 설명을 남겼다. 천천히 살펴보고 내일쯤 연락을 주겠지 싶어서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들어갔다. 결국 타이밍을 놓쳐 오늘 커피를 한잔도 못 마셨더니 금방 잠이 오려고 했다. 주말에 일찍 자면 아까운데. 핸드폰으로 기사들을 몇 개 뒤적거리다가 느려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도 버거워질 때쯤 협탁에서 요란하게 진동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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