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9
당연히 메시지로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태현은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거는 전화를 받는 것은 처음이라서 왠지 서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목을 큼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이태현입니다.]
“네… 제가 보낸 것들 다 보셨어요?”
[예. 다 확인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오전에 비해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수화부를 타고 흘러나오는 한없이 낮게 깔린 그 목소리가, 그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꽤 자극적이었다. 저렇게 지친 목소리를 한 이태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집에 돌아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사무실일까? 나는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는 궁금증들을 방치하며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집은 두 번째 집이 적당해 보입니다.]
“그쵸?”
[네. 첫 번째 집도 괜찮은데 거실 창이 곡선에 전면 유리라서.]
“맞아요! 그러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워요.”
나의 맞장구에 이태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목을 살짝 긁으며 새어 나오는 그 웃음소리에 내 청세포가 한껏 기울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 안에 음악이라도 틀어놓을걸. 조용한 밤 중에 차분하게 퍼져나가는 그의 존재가 꽤 무거웠다.
“꽃도 보셨어요?”
[네. 다 맘에 듭니다. 아주 예뻐요.]
느릿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난 이태현의 손목이 괜찮은지 걱정이 됐다. 병원에 다녀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가 다른 말을 꺼내는 게 더 빨랐다.
[김정연씨.]
“네.”
[......]
“.....?”
[저번에 보니까, 사용하시는 핸드폰이 2개인 것 같아서요.]
“아, 네. 맞아요. 업무용으로 사용하는 핸드폰 따로 있어요.”
잠깐의 공백을 두고 꺼낸 그의 질문은 그런 망설임이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무난한 것이었다.
[저와 연락하는 핸드폰은 그럼…]
“음, 명함에는 업무용 번호만 적혀있어서 그쪽으로 연락 주시게 됐네요.”
이태현은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런 걸 궁금해했다는 것도 뭔가 뜻밖이었고 조심스러운 말투로 묻는 게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지금 귀엽다고 생각했나? 반쯤 졸다 깼더니 나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제 개인 폰으로 연락하시는 게 더 편하실까요?”
[김정연씨가 괜찮으시다면… 아무래도 결혼할 사이니까요.]
무뚝뚝한 말투로 가렸다고 해도 명백하게 티 나는 쑥스러워하는 목소리에 결국 난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작게 웃자 이태현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지만 난 왠지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서 조금은 느긋한 속도로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 결혼할 사이니까.”
[많은 규칙을 약속한 결혼이긴 하지만, 그래도 업무로 분류되기는 아쉽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일부러 이태현의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이태현도 같이 웃으며 숨을 내쉬었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천천히 말을 꺼냈다.
“병원은 다녀왔어요?”
[네. 덕분에. 괜찮습니다.]
“병원에서 특별한 얘기는 없었고요?”
[네. 그냥 가볍게 삔 거라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었더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행이네요.”
포근한 이불속에서 듣는 이태현의 느릿한 목소리는 마치 밤공기처럼 나의 잠을 깨웠다. 캠핑장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는 느낌이었는데 그 차분함이 왠지 맘에 들었다. 이태현은 여전히 바쁠 것이었고 용건도 다 나눴기 때문에 이제는 전화를 끊는 게 맞겠지만 괜히 여운이 늘어져서 말을 붙였다.
“저녁은 드셨어요?”
[...네. 먹었습니다.]
“안 드셨네.”
이태현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물론 뒤로는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일단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다 티가 났다.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가 멋쩍은 듯 변명을 붙였다. 시간이 애매해서요. 저녁까지 거르고 일을 하는 그가 좀 측은해서 나도 모르게 방청객처럼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냈다. 내가 낸 소리에 놀란 나는 괜히 대화를 늘렸다가 푼수 같은 모습만 보인 것 같아 민망했다. 이젠 통화를 마쳐야 했다.
“늦었지만 가볍게라도 챙겨드셨으면 좋겠네요.”
[네.]
“그럼 피곤하실 텐데 이만 쉬세요.”
[네. 김정연씨도요.]
전화를 끊고 내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핸드폰으로 이태현에게 번호를 남겼다. 잠은 이미 다 달아났지만 그래도 다른 뭔가를 할 의욕은 나지 않아서 그냥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이태현과의 대화를 잠깐 되새겨보다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젖혔다. 그 피곤에 잠긴 목소리는 묘하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목덜미까지 올라온 열기가 빠질 때까지 그대로 누워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잠깐 그러고 있는데 이태현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업무용이 아닌 진짜 내 개인 핸드폰으로 걸려온 전화였다.
“네. 태현씨”
[아까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사업설명회 끝나고 월요일에 저희 결혼 기사가 나가면 그 이후에 예정된 인터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에는 저희 웨딩촬영도 있고요. 그래서 김정연씨와 제가 말을 좀 맞춰야 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맞춰요?”
[네. 뭐 저희가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언제부터 연인이 됐는지 같은.]
“아아… 그러네요.”
[그래서 괜찮으시다면 식사하면서 같이 얘기해보고 싶은데. 혹시 수요일 저녁 어떠십니까?]
“네. 수요일 괜찮아요.”
[그럼 제가 갤러리로 가겠습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하긴 사업설명회 때도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분명 어떤 뉘앙스를 풍겨야 할 텐데 서로의 지점을 제대로 정해놓지 않으면 어색한 관계가 티 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부터 연인이 됐는지 같은’? 갑작스럽게 들은 너무나도 간지러운 단어에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연애결혼인 척하는 것은 은근히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이태현이 그렇게 계약 조항으로 꼼꼼히 넣어놓은 이유가 있었네. 나는 이태현과 나의 첫 만남을 상상해보다가 딱히 그럴듯한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아서 이내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잠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것도 없었다.
“하, 씨…”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입 안으로 삼키면서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밤을 새 가며 일정대로 설명회 준비를 마쳤다 싶었더니 이사들이 갑자기 급하게 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며 나를 붙잡았다. 그 터무니없는 긴급회의에 붙들려 있느라 김정연과 약속한 시간보다 2시간도 더 늦어진 상태였다. 늦는다는 연락을 남겨놓긴 했지만 자초지종을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 나는 갤러리로 운전해오면서 김정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물론 응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났겠지. 접촉사고 때문이었다지만 어쨌든 지난 토요일에도 늦었고 게다가 먼저 자리를 뜨기까지 했는데 이번에도 이렇게 늦었으니 면목이 없었다. 시간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누군가가 늦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나 자신이 늦는 걸 싫어했고 김정연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자꾸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 같아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았다. 굳이 나서서 먼저 만나자고 해놓고 이렇게 늦다니. 김정연은 이미 갤러리에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 무작정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전시가 종료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갤러리 곳곳에 낮은 조도의 조명이 켜져 있었다. 로비를 지나 계단 쪽으로 달려가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관리인이 나를 알아보는 기색을 띠었다.
“김정연 디렉터님, 지금 계신가요?”
“네. 아직 퇴근 안 하셨습니다.”
그는 김정연에게 미리 말을 들은 것인지 자연스럽게 나를 안내하며 출입증으로 닫힌 문들을 열어주었다. 김정연의 사무실 앞까지 안내한 그는 나 대신 노크를 해줬고 나는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불투명한 유리문을 밀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전에 보았던 자리가 비어있어서 당황한 찰나 소파 끝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김정연의 발이 보였다. 묵직해 보이는 운동화를 신은 그의 발목이 유독 하얗고 반듯했다.
“김정연씨.”
조용히 이름을 부르며 소파 가까이 다가갔다. 김정연은 소파의 쿠션을 베고 길게 누워있었는데 한쪽 다리는 구부리고 한쪽 다리는 팔걸이 위로 뻗어놓은 상태였다.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고 누운 그는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있었다. 자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잠이 들어 눈동자를 감추고 있는 김정연은 고요하고 무방비해 보였다. 언제나 누구든 가볍게 이길 것 같은 기세의 얼굴을 봤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한참이나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평화로운 얼굴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김정연씨.”
“어우…”
내가 좀 더 큰소리로 깨우자 김정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앓는 소리를 내며 조금 허우적거리더니 자리에 앉아 잠긴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예. 많이 기다렸죠.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자느라 몰랐는데요, 뭐…어우, 추워.”
자는 동안 오한이 들었는지 김정연은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자신의 팔뚝을 문질렀다. 일교차가 큰 요즘 같은 때 이렇게 가벼운 옷차림으로 잠들었으니 추울 만도 했다. 나는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을 벗어 김정연의 어깨 위로 둘렀다.
“아, 괜찮은데.”
“자다 일어나면 춥습니다.”
“그래도…”
김정연은 잠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는지 말끝을 둥글리며 자켓의 옷깃을 꾹 쥐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텀블러를 가져다 뚜껑을 열어 건넸다. 김정연은 웅얼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물인지 차인지 커피인지 모를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주변을 더듬거려서 핸드폰을 찾더니 시간을 확인하고는 여전히 한쪽 눈을 찌푸리듯 감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지금까지 저녁도 못 드시고… 배고파서 어떡해요.”
“김정연씨도 마찬가지시잖아요.”
김정연은 마치 자신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처럼 나를 걱정했다. 당연히 그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체면 때문에 대놓고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더라도 탐탁지 않은 내색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목화솜처럼 포실하고 맹한 얼굴로 배나 슥슥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게요. 배고프다… 일단 뭐 좀 먹으러 가요.”
가려던 레스토랑은 이미 예약 시간을 훌쩍 지난 데다가 마지막 주문시간까지 넘긴 터였고 근처에 이 시간까지 하는 갈 만한 레스토랑이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급하게 핸드폰으로 검색하려는데 김정연이 가방을 챙기고 문 쪽으로 가면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햄버거 좋아하세요?”
“...네. 좋아합니다.”
김정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었다. 그 뒤를 따라나서면서 나는 그의 키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작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