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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최소한의 의무와 최선의 노력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0



이태현과 나는 맥도널드 1층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마주 앉는 자리도 있었지만 아직 입을 크게 벌려서 와구와구 햄버거를 먹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나란히 앉는 것을 택했다. 나는 감자튀김을 다 먹고도 뭔가 속이 허해서 너겟까지 집어먹는 중이었고 이태현은 자신의 식사를 마친 건지 입가를 닦고 있었다. 특별히 오늘 무슨 일이 있던 건 아니지만, 나는 가끔 사는 게 환멸 나고 허전할 때 햄버거 세트를 먹곤 했다. 라지 세트에 사이드까지 시켜서 입가에 묻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 뱃속을 채우듯이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속이 든든해지고 싶었다면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먹는 게 더 효과적이었겠지만, 그것과는 좀 다른 정크푸드로만 채울 수 있는 자학적인 뭔가가 있었다. 그다지 건강한 습관은 아니라서 다른 사람 앞에서 보일 생각은 없었는데 왠지 아까 잠에서 깼을 때 그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태현 앞에서는 이렇게 마음이 물러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이태현은 오늘 약속에 늦은 것이 미안했는지 말이 없었다. 별 표정 변화도 없는데 겸연쩍어하는 게 티가 나서 신기했다. 나는 컵이 비는 소리가 날 때까지 밀크쉐이크를 빨아먹고 나서야 손을 털었다. 


“회의는 잘 정리되신 거예요?”

“네.”


이태현은 짧게 대답하고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내부적인 논의여서 사실 크게 정리될 것도 없었습니다.”


창밖에 시선을 두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 비친 피곤함이 너무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투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못마땅함이 그가 이번 일에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가끔 그런 긴급회의가 있으신가 봐요.”

“네. 이사들이 이렇게 갑자기 소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짜 긴급하긴 한 안건들이에요?”


나의 말에 이태현이 눈을 송아지처럼 뜨고 도르르 굴렸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이사들이 의심스러워서 한 말이었는데 이태현에게는 오늘 회의가 나를 기다리게 할 만큼 중요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넓은 어깨 끝에 셔츠가 당겨져 사선으로 팽팽하게 주름이 만들어진 복장을 하고선 저런 순진한 얼굴을 하는 게 모순적이고 귀여웠다. 아니면 그냥 영문 모르는 표정을 했는데 내가 그렇게 어여쁘게 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고. 이태현의 얼굴은 그의 속내를 파악하는 것을 몹시 헷갈리게 만드는 장치였다. 어쨌거나 내가 말한 의도를 제대로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말을 이었다.


“아니, 뭔가 이사회는 괜히 기싸움하려고 그럴 때가 있잖아요. 그런 건가 싶어서 그랬어요.”

“아…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사업설명회가 저한테는 큰 일이다 보니 좀 기를 죽이고 싶었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 사람들은 저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으, 너무 싫어.”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태현도 같이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 얼굴에는 뜻밖의 공감에 의아해하는 기색도 섞여있어서 나는 변명하듯이 말을 붙였다.


“이쪽 사람들은 뭐 꼭 그렇게 본인들이 우월하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는 그게 가끔… 우스워요. 아시죠? 저 어릴 때 아버지 모르고 살았던 거. 열네 살 때 여기로 왔어요. 그래서 전 은근히 이런 거에 환멸 나는 부분이 있어요. 이상한 데서 빡빡하게 굴잖아요. 막상 정신 차려야 될 부분은 멋대로면서. 뭐 저도 여기서 따뜻한 밥 먹으면서 지낸 지 오래니까 나는 아닌 척 구분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냥 태생적으로 속이 좀 꼬일 때가 있어요. 아무튼 참 부자들답다 싶어서.”


별로 웃긴 말도 아니었는데 이태현은 팔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기울이며 소리 내서 웃었다. 나는 괜히 찔려서 나를 포함해서 하는 말이라고 변명했다. 여전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래도 웃고 난 후의 그는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려 보였다. 


이태현과 나는 커피를 한잔씩 사서 밖으로 나와 좀 걸었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오늘은 아까 잠에서 깬 직후에 느꼈던 한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이태현은 바닐라 라떼를 골랐고 어느새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라 둘 다 디카페인으로 주문했다. 커피는 패스트푸드점의 사이드 메뉴라고 생각한 것치고 향이 매우 좋았다. 커피의 열기로 코끝이 따끈해졌을 때쯤 이태현이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저한테 유독 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식한테 바라시는 게 생겼을 쯤엔 형은 이미 다 자란 상태였거든요.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저뿐이었죠. 그래서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말을 잘 들었던 것 같습니다.”


소매를 걷어붙인 셔츠차림으로 걷는 그의 얼굴은 마치 다른 사람 얘기를 하는 것처럼 무심해 보였다. 선선히 부는 밤바람에 흔들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느슨히 풀린 넥타이와 같은 분위기를 냈다. 나는 또 그를 빤히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아서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태현은 내가 밖으로 나오면서 건넨 그의 자켓을 한쪽 손으로 대충 구겨 들고 있었다. 아까 이태현이 자켓을 벗어서 덮어주었을 때, 그의 체온으로 데워진 자켓이 포근하게 어깨를 감싸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자라고 보니까 그게 저의 입지라고 해야 할까요, 자격 같은 걸 만들어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되어야 저도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는 거죠. 또 일종의 책임감도 있고요.”

“이태현씨는 그럼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으신 거예요?”


이태현은 나의 질문을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기울이는 그의 입술이 여전히 반듯하게 일자로 닫혀있었다.


“글쎄요. 내심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 신경 써 본 적은 없습니다. 인정을 바랐다기보다는 최소한의 의무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최소한의 의무라는 말에 깊게 공감한 나는 그만큼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탄식했다. 회사와 성장기가 겹친 이태현과 달리 이미 거대했던 기업에 편입해버린 나는 가끔씩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이곳을 박차고 나가지는 못했고 그렇게 용기를 내기에는 너무 겁이 많았다. 그러면서 끝까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꽤 위선적이라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점점 잦아졌다. 괜히 씁쓸해져서 가만히 커피에 코를 박고 있었더니 이태현이 내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무 속에서 가장 저에게 필요한 선택을 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입니다. 아버지나 형과 경쟁할 일은 없지만 어쨌거나 힘은 필요하니까요.”

“그쵸. 뭔가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하더라고요. 그게 저든,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든.”


이태현은 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나도 가만히 멈춰 서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느슨하게 눈을 뜨고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저한테는 이 결혼이 중요합니다.”

“......”

“김정연씨가 많이 배려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 결혼이기도 하니까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이 튀어나가려는 걸 가까스로 다듬어냈다. 참나, 뭐 지키고 싶은 게 있으신가 보지? 지극히 이익을 위해서 결혼한다는 걸 굳이 이렇게 알려주고 말이야. 별말이 아니었는데도 괜히 심술이 나서 신경 써서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더 고맙고요.”

“큼, 그러고 보니 오늘 저희 말 맞추려고 만난 거였죠? 어떻게 만났는지요.”


이태현은 꼭 뭔가를 아는 것처럼 나긋한 목소리와 미소 짓는 얼굴로 나를 달랬다. 나는 그가 다 눈치채고 있는 것만 같아서 황급히 본론을 꺼냈다. 여전히 시나리오의 갈피를 잡지 못한 나는 그에게 말해보라는 듯 눈짓했다.


“한 1년 전쯤, 제가 김정연씨 갤러리에 전시를 보러 갔다가 만난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게 제일 자연스럽겠네요. 서로 겹치는 지인도 없고 하니.”

“그전에도 안면은 있었는데 작년 초, 그때부터 가까워진 걸로.”


가까워진다는 말을 할 때 내 눈을 들여다보는 이태현의 눈이 너무 다른 명도를 지니고 있어서 나는 조용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작은 도심공원의 주황색 가로등 불빛을 등 뒤로 받고 있는 이태현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에서 따뜻함이 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그의 얼굴은 몹시 차가운 인상이어서 나는 그게 묘하게 괴리감이 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제가 호감이 있어서 다가갔고, 데이트는 주로 저희 집에서 한 거죠.”

“좋아요.”


시선을 내리고 있어도 나의 얼굴로 뜨겁게 내리쬐는 그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그를 바라보며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갤러리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가 가진 알러지, 못 먹는 음식, 취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들을 벼락치기하듯 공유했다. 인터뷰에서는 전혀 그런 걸 물어볼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태현이 꽤 진지한 태도로 자신의 취향을 말하고 나에게도 물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김정연씨. 잠시만요.”


내 차 옆에 섰을 때, 이태현이 차에 타려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된 자신의 차로 걸어가더니 운전석을 열어 들고 있던 커피를 차 안에 넣고 자켓을 다시 제대로 입었다. 뭐야, 자기가 먼저 가겠다는 건가? 어정쩡하게 서서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자 그는 차문을 닫고 다시 나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불쑥 건넸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디자인은 크게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건네받은 물건은 반지 케이스였다.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시선을 조금 비끼며 말을 붙였다.


“결혼 전까지 같이 끼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결혼반지는 김정연씨 맘에 드는 걸로 하겠습니다.”


설마 지금 부끄러워하는 건가? 왠지 아까보다 더 경직된 말투로 말하는 이태현의 어설픈 태도에 웃음이 났다. 그럼 이만 들어가시죠. 오늘 기다리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이태현은 한껏 딱딱해진 인사를 건네고는 뒤로 물러섰다. 황급히 나를 보내려는 그의 모습에 결국 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케이스를 열어보자 심플한 디자인의 백금 반지가 들어있었다. 


“예쁜데요? 역시 안목 있으시네요.”


내가 장난스럽게 웃자 이태현은 잠시 가만히 멈춰있더니 여전히 딱딱한 목소리로 다행이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그를 세워두기도 좀 그래서 나는 웃으며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차에 탔다. 그는 조금 더 뒤로 물러섰지만 아직 차에 탈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나는 그대로 차를 출발시켰고 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이태현은 내가 주차장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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