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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금속 고리가 만드는 소속감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1



헤어드라이어를 끄고 나니 방 안이 적막해졌다. 침대에 털썩 드러눕자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피로가 밀려왔다. 설명회 일정에 맞춰 자료를 완성하느라 밤을 새운 것이 무리가 된 모양이었다. 아까 씻을 때만 해도 당장이라도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오히려 뻣뻣하게 정신이 서는 기분이었다. 약간 뒤척거리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빈 화면을 보며 망설이기도 했지만 결국 김정연과의 채팅방에 들어가 그가 보냈던 영상을 재생했다. 함께 집을 둘러보지 못한 나를 위해 집들의 내부를 속속들이 찍어온 그 영상은 김정연이 직접 보내준 것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내가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없는 곳에서의 김정연이 찍혀있어서 그럴 것이었다. 

그가 직원과 대화를 하다 가볍게 웃을 때면 그 웃음소리에 귀가 간지러웠고 긍정의 반응을 보이며 내는 소리는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영상 속의 김정연은 때때로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욕실의 수전을 올리며 ‘수압은 이 정도예요.’라고 말하는 그가 정말로 나와 애틋한 사이가 된 것만 같아서 왠지 멋쩍어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누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표정관리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김정연은 대부분 어떤 기분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따금씩 신기할 정도로 속이 들여다보이는 표정이나 반응을 하는 때가 있었다. 영상에서도 첫 번째 집 거실을 살펴보면서 내는 작은 감탄사나 창문 가까이 다가서는 모습에서 얼마나 그 집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가 뻔히 보였고, 두 번째 집에서는 별말이 없었음에도 직원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나 다른 방으로 이동하는 걸음걸이에서 얼마나 그 집을 맘에 들어하는지가 읽혔다. 김정연의 시선을 대신하는 카메라 앵글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나는 오늘 만났던 김정연을 떠올렸다. 소파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김정연과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얼굴로 햄버거를 먹던 김정연, 나의 말에 불만스러워 보이던 그의 얼굴과 반지를 보고 하하 소리 내며 활짝 웃던 그의 얼굴. 그 다양하고 생생한 김정연은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내 머릿속에서 재구성될 때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실제로 김정연과 마주하고 있을 때는 마치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영화 장면처럼 붙잡기도 전에 흘러가버렸다. 이틀 뒤에 다시 마주하게 될 그는 어떤 모습일까 잠깐 생각해봤지만 뿌연 연기 속처럼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냥 반지 케이스를 열어보던 그의 손을 떠올려보다가 잠에 들었다.












늦지 않게 이태현의 사업설명회 장소에 도착한 나는 직원이 안내하는 대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리는 생각보다 꽤 앞 쪽이었다. 이 정도면 눈도 마주치겠는데. 나는 벌써부터 머쓱한 마음이 들어서 괜히 손에 든 팜플렛을 뒤적거렸다. ‘끝나고 함께 식사하시죠. 제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 오전에 도착한 메시지는 여느 때처럼 딱딱한 이태현의 목소리로 읽혔지만, 수요일 밤에 마지막으로 봤던 그 부끄러워하는 얼굴도 함께 떠오르게 했다. 팜플렛 속의 일정을 보니 2시간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1시간 정도 기자들과 질의응답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은 언론 관계자가 아니면 참석할 필요가 없으니 그의 사무실에서 기다리면 될 듯했다. 


2시 정각이 되자, 장내가 어두워지며 안내 방송이 나왔다. 인원이 많이 모이는 행사인데도 지체 없이 제시간에 시작하는 게 이태현답다고 생각했다. 설명회 시작을 알린 목소리가 이어서 이태현을 소개했다. 태블릿 PC를 손에 들고 단상에 오른 이태현은 검은색 수트 안에 검은색 셔츠를 입었는데 타이는 하지 않고 셔츠 윗단추를 풀고 있었다. 그 덕에 평소보다는 편한 차림처럼 보였지만 온통 검은색인 복장이 그의 얼굴을 더 날카롭게 만들기도 했다. 이태현은 담백하게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달변가처럼 능숙하게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다소 딱딱해 보이는 태도였지만 심플하고 모던한 브랜드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기엔 적절했다. 

강한 핀 조명 아래서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그의 왼손 약지에서 반지가 반짝거렸다. 나는 그대로 눈을 내려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바라보았다. 맞춘 듯이 내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 아마도 주실장에게 물어서 내 사이즈를 알았겠지만 그 세심함이 기분 나쁠리는 없었다. 그와 내가 같은 반지를 나눠 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태현과 나, 둘만이 연결되어 있었다. 작은 금속 고리 하나가 이렇게 커다란 소속감을 만든다는 게 신기하고 어색했다. 나는 반지를 다른 손 엄지로 문질러보면서 이 생경함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이 반지도 이 상황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이태현에 이어서 올라온 다른 직원들의 발표와 브랜드 이미지 적용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후 설명회가 마무리되었다. 언론과의 질의응답은 다른 장소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다들 행사장 밖으로 이동했다. 나도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더니 이미 내가 앉았던 줄 끝에 누군가 다가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디렉터님. 전 이태현 팀장님과 일하는 최재민이라고 합니다. 팀장님이 사무실로 안내 부탁하셔서요.”


웃는 얼굴이 근사한 남자가 친절하게 자신을 소개하더니 나에게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Peter’라는 그의 닉네임이 볼드체로 적혀있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인사한 뒤 명함을 내 트위드 자켓 주머니에 넣고 얌전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태현의 사무실은 다른 직원들의 사무 공간 한쪽에 불투명 유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최재민씨는 날 그 안까지 데려다 놓고 나갔다. 유리문 위쪽은 투명하게 처리되어 있어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니 그는 어느새 바깥쪽 업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곳이 그의 자리인 듯했다. 


이태현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꽤 아늑했다. 디자인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 그런지 인테리어가 통일감이 있었고 원목으로 된 가구들이 따뜻한 분위기를 냈다. 주인 없는 사무실 구경을 마친 나는 얌전히 소파에 앉아서 몇 시간 전까지 이태현이 업무를 봤을 데스크 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일하는 이태현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식장 사진들을 보던 이태현이 떠올랐다. 나는 그렇게 한참 동안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 문득 화장실에 가고 싶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재민씨가 알려준 대로 화장실에 다녀온 후 손의 물기를 털며 복도를 걸었다. IT회사다운 거대한 신축사옥은 전 층에서 로비가 내려다보이는 구조였는데 덕분에 답답한 느낌이 없어 좋았다. 깨끗하게 관리된 통유리 난간을 살펴보면서 걷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고개를 돌려보니 선빈이가 환하게 웃으며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다. 베이지색 수트를 차려입은 모습이 꽤 의젓해 보였지만 풍성한 넥타이 덕에 패션에 신경 쓴 티가 났다.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오늘 사업설명회 있어서. 우리 온라인몰 앱 여기서 만들었잖아. 누나는… 아.”


선빈이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내가 반가웠는지 내 손을 붙잡고 붕붕 흔들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약간 민망했지만 어쨌든 나도 사회인으로서의 선빈이를 보는 것이 흡족했기 때문에 그냥 마주 웃었다. 잠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최재민씨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선빈이와 자리를 옮겼다.  


로비에 위치한 개방형 카페에 마주 앉은 우리는 교양 수업에서 만난 과 동기처럼 키득거렸다. 


“야, 여기서 널 보네. 박선빈 일 열심히 하나보다.”

“누나야말로 아직 기사 안 나서 안 올 줄 알았는데. 많이 친해졌나 봐?”


결혼 기사가 나기 전이라 선빈이한테도 이태현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 테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내가 말없이 웃자 선빈이가 닭살 돋는다는 듯이 몸을 떨어가며 자기 팔을 쓱쓱 문질렀다. 나는 괜히 왼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렸다. 숨길 것은 없었지만 뭔가 쑥스러웠다. 정략결혼이면서 미리 이렇게 반지를 나눠 낀 게 유난스러워 보일까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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