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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까요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3



처음 단상에 올라 조명을 받을 때는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띄우며 조도를 낮추니 사람들의 면면이 잘 보였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화면을 보고 있는 김정연은 꽤 집중한 얼굴이었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프레젠터로 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었는데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시선이 쉬어갈 수 있었다. 언제나 작은 흠이라도 찾아내서 트집을 잡으려는 이사들이 앞쪽에 자리를 잡았지만, 바로 그 뒤에 앉은 김정연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안도하게 했다. 그럴 목적으로 그를 초대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김정연은 그런 힘이 있었다. 그가 속한 그룹이 권력 있는 대기업이라서 그런가? 사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사업 단위로 경쟁하는 이 회사 내부 싸움에서는 그게 그렇게 큰 변수가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김정연은 단순히 권력이나 부로는 줄 수 없는 든든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순서에 따라 다른 직원에게 발표를 넘기고 단상 한쪽으로 비켜서서 객석을 바라봤다. 김정연은 식순을 확인하려는지 팜플렛을 들여다보며 눈썹을 조금 찌푸리고 있었는데 팜플렛을 든 손에 낀 반지가 눈에 띄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김정연은 의외로 이런 일방적인 부탁을 순순히 들어주곤 했다. 아마 사람들은 김정연과 내가 어떤 반지를 끼고 다니는지 관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김정연이 내가 선물한, 나와 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고 있다는 걸. 그 사실은 생각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그에게 나만 아는 특별한 표시를 해놓은 것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무탈하게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기자들과 대담까지 별일 없이 마무리했다. 한 번쯤은 덜컹거릴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순조로워서 의아할 정도였다. 저녁시간 이후에 아버지를 비롯한 이사들과 술자리가 있기는 했지만 오늘이 이렇게 무난히 정리되었으니 크게 부담스러울 것도 없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인터뷰 공간을 나오며 팀원의 간단한 후속 보고를 들었다. 난간 쪽으로 서며 얘기를 듣는데 1층 로비에 김정연이 보였다. 분명 피터와 사무실에 있는 걸로 알았는데. 김정연은 보기 드물게 편안한 태도로 느슨히 앉아 맞은 편의 남자를 보며 가볍게 웃고 있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묘하게 낯이 익었다. 뜻밖의 상황에 기분이 들썩였다. 무슨 얘기 중이었던 건지 그 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김정연 가까이로 갔는데 불쑥 올라온 키를 보니 그제야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일전에 갤러리 앞에서 김정연에게 팔짱을 끼던 남자였다. 

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겨우 굳히고 있었는데 그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김정연의 등에 바짝 붙어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퍼스널 스페이스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둘의 모습에 결국 못마땅함을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보고를 마치고 소회를 나누던 직원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정리했다. 나는 차마 표정을 풀지는 못한 채 수고와 격려의 말을 전하고 걸음을 옮겼다. 김정연의 손목을 붙잡고 얼굴을 가리며 장난을 치는 그 남자의 얼굴이 마치 보란 듯이 약 올리는 것 같아서 심사가 뒤틀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김정연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그 남자와 인사한 후 나에게 다가왔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금 내가 기분이 나쁜 게 이상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근데 내가 왜 기분이 나쁘지? 그야 내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정연과 내가 함께 정한 규칙이 어긋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나는 애써 표정을 풀고 김정연 가까이 섰다. 

김정연에게선 언제나처럼 은은한 머스크 향이 났다. 머스크 향이 지나고 나면 아주 옅게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났는데 어떤 향수를 레이어드 한 건지는 몰라도 굉장히 기꺼운 향기였다. 몇 번 만났다고 그 사이 익숙해진 향기에 마음이 물러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새 김정연의 등에 가볍게 손을 올렸는데 그건 나에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다정한 분이셨지만 아들에게 유별나게 애정표현을 하시는 편도 아니었고 형이나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구들과도 간지럽게 붙어 다니는 일은 없었고 여자친구와 스킨십을 할 기회도 없었다. 기회라는 건 아버지께서 허락한 것을 말하는 건데 아버지는 내 이성교제에 대해 병적으로 경계하셨기 때문에 그런 허락은 존재할 수 없었다. 


나보다 8살 많은 형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뛰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인간관계에서도 적극적이었다. 끊이지 않고 연인을 만들던 형은 결국 유학시절에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형수님이 된 그분은 아무 문제가 없는 번듯한 분이었지만 그 집안이 평범하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격렬히 반대했다. 형은 불법체류자가 되고 집안을 다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승부수를 띄웠다. 아직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나 하나만으론 회사에서 자리를 지키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결국 형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형은 그전에도, 어울리던 부잣집 애들과 자잘한 사고를 친 적도 있었고 친구들 중 몇은 실제로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해서 더더욱 아버지를 피 말리게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아버지의 강박은 오롯이 나에게 쏟아졌다. 

중학생 때, 처음으로 가까워진 같은 반 여자애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나를 앉혀놓고 몹시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한참이나 쏟아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걱정시키면서까지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편집증에 가까운 경계를 하도록 놔두었고 솔직히 그렇게 크게 불만도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 모든 것들이 나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평판과 회사의 이미지, 그리고 회사 안에서 우리 집안의 입지까지. 아버지의 신경증은 점점 더 심해져서 내가 미국으로 대학을 갔을 때는 그 예민함이 극에 달했다. 결국 아버지는 현지 경호라는 명목 하에 나에게 감시를 붙일 정도였는데 학업을 따라가기도 바빴던 내 입장에서는 그 모든 게 괜한 기우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버지 덕분에, 나는 그 사람들을 거절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거 때문인지 아버지는 단 한 번의 기회나 다름없는 이 결혼에는 그나마 최대한 내 의견을 반영해주려고 하신 듯했다. 물론 나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불만이 없었다. 사랑이란 게 뭐가 그렇게 특별한 지도 잘 모르겠고 적당히 모나지 않은 사람과  어느 정도 협력하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으니까. 다만 형을 볼 때면 어떻게 저렇게 인생을 걸만큼 사랑하게 되는 건지 문득 궁금하기는 했다. 근데 형과 나는 너무나도 다른 성격이었으니까 그것에 대해서도 다른가보다 하고 말았다. 뭐가 됐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김정연의 등에 손을 올리자 살짝 가까워지는 것 같던 거리는 그가 뒤로 한걸음 물러나면서 다시 벌어졌다. 더한 요구에도 순순하던 김정연은 뜻밖의 순간에 선을 그었다. 나는 그 기준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서 답답했다. 그보다 더 헷갈렸던 것은 차갑게 멀어진 한 걸음의 거리와는 반대로 다정하기 짝이 없는 눈빛 때문이었다. 나는 도저히 김정연의 의중을 읽을 수 없어서 그냥 평소처럼 말없이 우뚝 서있다가 분위기가 딱딱해질 쯤에야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사무실에서 기다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네. 그랬는데 여기서 친구를 만나서요.”

“...식사하러 가시죠.”

“괜찮으세요?”

“뭐가 말입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괜찮습니다."


김정연은 나의 팔에 아주 살짝 손을 댔다가 떼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찍 들어가셔서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차피 이후에 또 일정이 있어서요."

"그럼 조용한 곳으로 가요. 사람 적은 곳으로."


나의 뻣뻣한 대답에도 김정연은 마지막까지 걱정을 내비치고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걸음 정도 앞선 그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다 말했다.


"그럼 저희 집으로 가실까요."












이태현의 집은 그의 회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층 아파트였다. 입구부터 주차장까지 보안시설이 설치된 곳이었는데 말 그대로 조용하고 사람이 적은 곳이었다. 지쳐 보이는 이태현이 걱정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그의 공간에 불쑥 들어오게 될 줄 몰랐던 나는 삐그덕거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레이톤의 그의 집은 깔끔하고 아늑했다. 사무실도 그렇고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듯했다. 


희인이네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좀 난감했다. 거실에 보이는 소파에 앉아야 할지 아니면 식탁에 앉아있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이태현이 내 가방을 받아주고 식탁 의자를 빼줬다. 아까 선빈이와 나눈 대화에 이태현의 쌀쌀맞은 눈빛까지 더해서 마음이 굳어 있던 나는 이태현의 그런 작은 매너에도 괜히 입술이 삐죽거리려고 해서 이를 꽉 깨물었다. 이태현은 수트 자켓을 벗고 셔츠 소매를 걷은 채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나도 손을 씻고 싶어서 화장실 위치를 묻자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문이라고 안내했다. 손을 씻으면서 화장실을 둘러보니 시어버터 향 바디워시가 눈에 띄었다. 이태현의 근처에 있으면 꽤 진한 향이 나면서도 그 끝이 산뜻했는데 아마도 그게 저 바디워시 때문인 듯했다. 이태현은 꽤 강한 향수를 쓰는지 시원하면서도 묵직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그 향은 그의 화려한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렸다. 나는 아까 이태현이 가까이 왔을 때 들이마셨던 그 향을 떠올리며 손의 물기를 닦았다.


다시 식탁 앞으로 다가가자 이태현이 찬장에서 컵을 꺼내다가 나를 돌아봤다. 복장도 그래서 앞치마만 두르면 바리스타처럼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실 것 좀 드릴까요?"

"아, 네. 그냥 물이면 됩니다."


이태현은 들고 있던 머그컵을 제자리에 놓고 유리컵을 꺼내 정수기로 물을 받았다.


"얼음물로 주실 수 있을까요?"


건조한 날씨에 목이 탔다. 이태현은 내 앞에 얼음물을 놓고 본인도 물을 한 잔 따라 나와 마주 앉았다. 어색한 분위기에 컵만 만지작 거리는데 이태현이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이태현은 가만히 내 손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반지도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하고요."

"아… 마음에 들어서요. 사이즈도 딱 맞고."


이태현은 아까 로비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달리 한껏 누그러진 얼굴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내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컵 표면을 두드리는 손끝이 왠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단추가 두 개 정도 열려있는 셔츠 사이로는 쇄골뼈 끝이 살짝 보였다. 그간 늘 넥타이 차림의 모습만 봐서인지 대수롭지 않은 그 모습마저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목이 바짝 마르는 게 봄 날씨의 건조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켜도 갈증이 가시지를 않았다. 사실 나는 답답하게 내 목구멍에 걸려있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다만 그걸 지금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자존심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내가 그걸 의식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 자체가 이 관계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일이었다. 그냥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는 유불리를 따질 필요가 없지만 비즈니스 관계에서는 다르다. 나는 자꾸만 물러지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태현과 나는 명백한 비즈니스 관계였다. 반드시 득실을 따질 필요가 있었다.


복잡해지는 머리를 식힐 겸 얼음물을 한번 더 들이켰다. 차가워진 혀 끝으로 살짝 입술을 축이면서 갈증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이태현은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는데 사람을 빤히 보는 게 습관인 건지 늘 저렇게 망설임 없는 시선을 보냈다. 그는 손등이 보이게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려놓고 검지로 천천히 표면을 두드렸다.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는 그 손가락에 나도 모르게 초점을 맞췄을 때쯤 이태현이 갑자기 행동을 뚝 멈췄다. 그리고는 피곤함에 살짝 꺼진 눈꺼풀을 하고 느릿하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만난 그 친구는 누굽니까?”


겨우 초점을 되찾아 바라본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웃음기도 없었다. 함께 있는 걸 봤으니 누구나 당연히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질문이 굉장히 날카롭고 무겁다고 느꼈다. 마치 그의 향기 같은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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