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4
목이 말랐는지 얼음물 한 컵을 다 비운 김정연은 내 질문이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응이 꼭 뭘 그런 걸 궁금해하느냐는 것 같아서 약간 머쓱했지만 그래도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좀 어색해지더라도 질문의 답을 꼭 듣고 싶었다. 김정연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유패션 박선빈이에요."
나는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하는 척하는 건지 김정연은 자신과의 관계가 아닌 그 남자의 신상을 설명했다. 친구라고 언급하고 끝날 정도로 그 관계에 대해서는 더 붙일 말이 없다는 걸까?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 건지 조금 더 캐물어봐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김정연이 먼저 입을 뗐다.
"친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태현씨는 어떤 분들과 친하세요? 친한 친구분들이요."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치고는 딱딱한 말투였다. 처음 만난 날 호텔 라운지에서 본인의 조건을 나열할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같이 대학 다닌 친구들이 그래도 좀 친한 편인데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음, 그리고 이건 제 일방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저는 피터를 굉장히 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터… 최재민씨요?"
"네. 아까 만나보셨죠? 피터 입장에서는 제가 상관이니 친구라고 하기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저한테는 요즘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입니다."
김정연은 내가 대답하는 동안 내 얼굴을 정말 빤히 들여다봤다. 평소보다 끈질기게 내 눈동자를 쫓는 그 시선이 내심 달가워서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김정연은 내 대답을 듣고 나서는 좀 전과는 다른 속도로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이 방금보다야 누그러져있었지만 명확히 정리된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한번 더 선을 그었다.
"인간관계가 넓은 편이 아니라서요. 지금 말씀드린 친구들 말고는 다 아는 동료 수준입니다."
이건 김정연에게서 더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한 나의 패라고 볼 수도 있었다. 가끔은 내가 먼저 패를 보여야만 상대의 카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연은 속삭이듯 '그렇군요.'하고 대답하더니 얼음만 남은 컵을 들어 작은 얼음조각을 입 안으로 떨어뜨렸다. 파삭, 하고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이제 그의 패를 확인하고 싶었다.
"김정연씨는 아까 그 친구와 많이 가까워 보이더군요."
김정연은 입 안에 남은 얼음을 삼키고 입술을 살짝 핥았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혀 끝이 붉었다.
"아… 선빈이는 어머니끼리 친분이 있어서요. 저는 친한 친구는 딱 한 명 있어요, 희인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알아서 유일하게 제 속을 다 보일 수 있는 친구예요."
"그렇습니까."
김정연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친구인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았다는 걸 보면 이쪽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흐른 바람에 그 부분은 일단 접어놓기로 했다. 다만 박선빈이 누군지 미리 알고 있는 것이 나쁠 것은 없었다. '선빈이'라고 부르는 김정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김정연에게 물을 한 잔 더 가져다주면서 피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늘 앉던 식탁에서 똑같이 보이는 시야에 김정연 한 사람이 더 들어온 것뿐인데 집안 전체 분위기가 다 달라진 것 같았다. 김정연 뒤로 보이는 거실은 조금 창백해 보였고 검은색 대리석 식탁은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함께 살게 될 집에는 포근하고 밝은 가구들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출발하면서 미리 주문해놓은 음식은 때맞춰 도착했다. 따로 배달이 되는 곳은 아니고 내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서 단골에게만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그 식당의 메뉴 몇 가지를 도시락처럼 1인분씩 담아서 보내줬는데, 집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때 주문하면 꽤 용이했다. 낯선 공간에서 어색해하던 김정연도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에 한결 긴장이 풀려 보였다. 김정연과 함께 있을 때면 침묵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그는 대화를 잘 이끄는 편이었지만 침묵을 유연하게 흐르게 할 줄도 알았다. 김정연은 스테이크 맛이 맘에 들었는지 눈을 크게 떴는데 그와 동시에 귀가 쫑긋거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실제로 귀가 움직이는 걸 처음 봐서 신기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김정연은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문득 내 눈치를 봤다. 어리둥절해하는 둥그런 눈빛과 쫑긋거리는 귓바퀴 때문에 그가 꼭 토끼 같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식사가 정리될 무렵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김정연씨 몸에 손을 대거나 가까이 가는 게 불편하십니까?"
"네?"
"가까워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행동해서 실례를 한 것 같습니다."
"아… 아니에요. 불편하지 않아요. 그냥…"
나는 가만히 그의 뒷말을 기다렸다. 김정연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눈동자를 굴리며 말을 골랐는데 그 신중한 고민 뒤에 나올 얘기가 뭔지 조금 긴장이 됐다.
"제가 사람이랑 가까이 있는 게 익숙하지 않은 편이라서 그래요. 불편한 건 진짜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김정연에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매달리던 박선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오지 않도록 노력해야 했다. 애써보았지만 불만스러운 눈빛은 맘처럼 숨겨지지 않았다. 그게 신경 쓰이는 동시에 내심 그런 내 기분을 김정연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유치한 마음도 들었다. 나 답지 않은 감정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지는 김정연의 말에 그런 유치한 감정들은 얼음조각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우리 결혼할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나는 문득 우리가 결혼할 사이가 아니었다면 김정연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을지,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그때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김정연이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 괜찮다는 말이 그보다 더 흡족했다. 높다란 만족감의 파도에 나의 궁금증은 잘게 흩어져 밀려갔다.
이태현의 차를 타고 그의 회사 주차장에 들어섰다. 이태현은 그의 집에서 곧장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내 차는 사람을 시켜 옮기겠다고 했지만 괜한 수고가 드는 것 같아 그냥 내 차가 세워진 곳까지만 태워다 달라고 했다. 저녁시간의 회사 주차장은 한산했고 이태현은 내 차 바로 옆 옆칸에 차를 세웠다.
"저녁 맛있었어요. 일정 잘 마치시고… 피곤하실 텐데 푹 쉬세요."
아주 긴 것도 같으면서도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였다. 그런 소감이 섞인 인사를 건네느라 말끝이 조금 늘어졌다. 차에서 내려서 내 차 운전석 문고리를 잡는데 뒤에서 이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정연씨."
이태현은 본인 차 운전석에 앉은 채 고개를 조금 숙여 조수석 창문을 통해 날 바라보며 말했다.
"웨딩 촬영 날에는 제가 집 앞으로 가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라 주춤했지만 이내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효율적인 걸 선호하는 나로서는 일부러 돌아갈 것 없이 각자 촬영 장소에서 만나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결혼할 사이니까 괜찮다.'라고 했던 나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그렇게까지 강조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까는 풀이 죽어있는 이태현을 보니 그런 말이 술술 나왔다.
큰 행사를 치른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특히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 이후 이태현은 몹시 지쳐 보였다. 그 와중에도 내가 별 의미 없이 한 반응 때문에 나름의 자책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나에게 손을 얹거나 가까이 붙어 서는 게 싫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아까는 글쎄… 정확히 어떤 느낌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그의 눈빛을 유독 의식해서 그런 반응이 나온 거였다. 어쨌거나 나는 이태현을 격려해주고 싶었고 결과적으로 좀 넘치는 소리를 하게 됐지만, 저렇게 성큼 다가오는 걸 보면 이태현도 딱히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집으로 운전해오면서 괜히 너무 감정적인 말을 한 건가 싶어 조금 민망하긴 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실 '결혼할 사이'라는 단어는 이태현이 먼저 썼다. 나는 그냥 그의 말을 인용한 정도였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길 바랐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웠다. 신호등의 빨간 불빛이 유리창을 통해 차 안에 가득 들어찼다. 손등이 붉게 물들고 반지에 반사된 붉은빛이 내 눈에 비쳤다. 자주 보지 못하는 대학 친구들과 자신의 비서만을 친구로 명명하던 이태현의 건조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럼 이세나는? 모든 가십 기사들이 말하던 친구 혹은 연인이라던 그 사람은? 친구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남은 위치는 하나였다. 나는 시선은 그대로 둔 채 고개만 조금 뒤로 젖히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살짝 당겨진 눈꺼풀이 무거웠다. 촬영 날 집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말하던 이태현은 조수석 창문으로 날 내다보느라 핸들을 잡고 앞으로 몸을 기대고 있었다. 붉은빛을 띤 내 반지 위로 그의 손가락에 당연하게 끼워져 있던 반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신호가 바뀌고 눈 깜짝할 사이 내 손등은 이미 푸른빛이 되어있었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면서, 나는 식사하는 내내 나에게 머물던 이태현의 시선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