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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다소 절망에 가까운 갈증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6



피터가 가져다준 자료에 있는 내용은 역시나 몹시 마뜩잖았다. 박선빈은 꽤 커다란 그룹의 패션 계열사 쪽 사람이었는데, 아직 나이가 어리고 본인이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조건상으로는 상당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키가 크다 싶었는데 실제로 모델 활동도 한 이력이 있었고 SNS에서도 이슈가 되는 모양이었다. 상체를 탈의하고 청바지를 입은 채 찍은 화보 사진을 보며 나는 소리 내서 혀를 찼다.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았다. 개인의 능력이나 관계는 어떨지 몰라도 표면적인 조건은 안심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외모도 괜찮고, 무엇보다 집안이 좋았으니까. 한 번도 집안이나 회사의 격에 대해서 고민해본 적이 없었는데 김정연과 관련된 일에서는 자꾸만 그걸 의식하게 됐다. 자격지심일까? 그렇다기에는 난 김정연에게 화가 난 적이 없었다. 그냥 난 조금 더 그에게 걸맞은 사람이고 싶었을 뿐이다. 

열흘 동안 수많은 인터뷰와 밀린 업무들을 하면서 정신없이 지냈다. 사업설명회가 끝나면 한숨 돌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로 인해 끌려온 일들이 수두룩 했다. 중간에 한 번 너무 지쳤을 때는 창밖을 내다보다 말고 충동적으로 김정연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특별한 용건이 없었다는 걸 깨달아서 급하게 이유를 만들었다. 비서에게 물어보면 될 주소를 굳이 김정연에게 직접 물어보면서 차분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 내가 맞닥뜨린 문제 중 결혼이 가장 큰 일이라 그런 건지 김정연과 같이 있거나 이야기를 하면 다른 일들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김정연과 짧은 통화를 나눈 그 날엔 깊게 잠들 수 있었다.


웨딩촬영이 있는 날, 김정연의 집 앞에 한 시간 가까이 일찍 도착했다. 출근시간이랑 겹쳐서 막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찍 출발한 건데 교통체증이 제법 있었음에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 평소에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소풍이 기다려져서 잠에 들지 못하는 아이처럼 간밤에 몇 번이나 깨다가 결국 이른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마쳤다. 김정연을 재촉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냥 시동을 끄고 고개를 뒤로 기댔다. 나도 모르게 결혼에 대한 낭만이나 기대가 있었나? 업무의 연장으로 생각되는 일들이었는데도 일반적인 회사 업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결혼 그 자체에 대한 설렘인가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그 이유는 결혼보다 김정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김정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지레 놀라서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전히 골목은 한적했다. 전화를 받자 김정연은 나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이미 집 앞이라고 하기엔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근처라고 둘러댔는데 그도 별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냥 어디쯤 왔는지 궁금했나 보다 싶어서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기다리는 동안 왼손 엄지로 약지에 낀 반지를 살살 쓰다듬었다. 최근 새로 생긴 버릇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대문이 열리고 김정연이 걸어 나왔다. 그는 잠깐 그대로 서서 나를 바라봤는데 선팅 때문에 분명 내가 보이지 않을 게 분명한데도 마치 내 눈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김정연이 조수석 쪽으로 향하느라 차 앞을 가로질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이번 결혼을 이야기하면서는 처음부터 서로 마주 보는 일이 많았는데 이렇게 김정연이 나를 보지 않고 지나쳐가는 모습을 보면 중학생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은근하게 퍼지는 미소를 지워내면서 차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김정연이 문을 열고 자리에 앉자 옷자락이 풀썩이면서 그의 향기가 차 안에 가득 찼다. 머스크 향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은은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소하고 달콤한 향은 여느 때보다 훨씬 진했다. 천천히 차를 움직여 골목을 빠져나가면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스튜디오에 도착해서 세팅을 마치고 촬영하는 곳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이것저것 할 게 많은 신부는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신부. 김정연이 내 신부라고 생각하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결혼식이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남았는데도 우리가 서로의 신랑이고 신부라는 사실은 전혀 와닿지 않았다. 나를 자신의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김정연을 상상해봤다. 나는 목을 양쪽으로 한 번씩 비틀어 뼛소리를 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김정연이 세팅하는 곳에서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크게 들린 소리가 김정연의 목소리 같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다른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 쪽으로 가까이 가봤다. 안쪽에는 김정연의 드레스 자락과 그걸 정리해주는 직원들, 그리고 박선빈의 허여멀건한 얼굴이 보였다.

오늘 같은 날 볼 일이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었다. 답답함에 마른세수를 하려다가 아까 세팅해주던 사람들이 얼굴에 뭔가를 바르던 게 생각나서 가까스로 손을 멈췄다. 나는 다시 아까 서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내 눈썹 사이에 못마땅함이 얼마나 잔뜩 쌓여있을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박선빈은 문에 닿을 것 같은 기세로 파우더룸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한쪽 팔에 신발 상자를 몇 개 쌓아 들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몇 마디 주고 받더니 그 사람에게 들고 있던 상자들을 넘기고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사진작가에게 다가갔다. 그는 사진작가와 친분이 있는 건지 서로 웃으며 얘기를 나눴는데 난 그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박선빈이 내 쪽을 쳐다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웃으면서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다. 나는 불쾌한 기색을 걷어내고 그에게 살짝 목례했다. 경계가 필요한 상대에게 어떤 감정도 내색하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다.

마침 그때 준비를 마친 김정연이 나왔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내 눈앞에 선 김정연은 그동안 내가 그 모습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다만 그와 동시에 너무 고되고 연약해 보였다. 온통 여린 색상의 천으로 둘러싸여서 위태로운 구두 위에 올라선 모습이 케이크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간 체리 같았고 최대한 반짝이고 윤기 나게 메이크업을 한 얼굴은 레진에 갇힌 꽃잎 같았다. 내가 그의 낯선 모습에 대한 감상을 떠올리고 있는 중에, 역시나 불편해 보이던 구두 때문인지 김정연이 크게 휘청였고 나는 곧바로 그를 붙잡았다. 깜짝 놀란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그제야 훨씬 김정연다웠다. 디자인이 들어간 렌즈를 껴도 김정연의 눈에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빛이 있었다.


촬영을 하는 내내 박선빈은 사진작가 옆에 붙어 앉아 우리의 모습을 지켜봤다. 네가 보면 어쩔 건데. 나는 꿈틀거리려는 눈썹을 겨우겨우 잡아당겼다. 작가의 요청대로 김정연의 허리에 가볍게 팔을 두르자 김정연이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그건 몹시 생경한 느낌이었다. 김정연이 나에게 손을 대거나 가까이 온 적이 있었나? 찰나의 접촉이 있었을지라도 지금처럼 연인 같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작고 포근한 손길은 날카로워진 내 기분을 둥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 내 어깨에 걸려있는 저 손끝이 어깨를 지나쳐 내 등 뒤로 넘어간다면, 팔이 온통 겹쳐지도록 내 목을 세게 끌어안는다면. 가속기가 고장 난 것처럼 달려 나가는 상상을 붙잡느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는 김정연의 허리 뒤로 두른 내 팔목을 손자국이 날 만큼 세게 쥐어가며 가까스로 충동을 다스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싱글대며 웃고 있는 박선빈이 거슬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때 작가가 우리 둘에게 좀 더 가까이 붙어보라는 말을 했고 나는 보란듯이 김정연을 힘껏 당겨안았다. 유치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대로 몇 장 더 찍은 후, 참으로 시기 부적절한, 아니 어쩌면 아주 시기적절한 사진작가의 요청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신부의 볼에 입을 맞추라고 했고, 그 순간 나는 정말 손의 말단까지 전율이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다. 망설임없이 내린 나의 입술에 닿는 김정연의 볼이 따뜻했다. 

내가 입맞춘 그의 복숭아빛 볼에서는 그 색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하지만 완전히 복숭아 향이라고 하기엔 조금 달랐다. 좀 더 빨갛고, 노랗고, 깊었다. 나는 그 향기의 근원지를 찾아 얼굴을 옮겼다. 그의 목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었다. 입술을 조금만 내밀면 빗장뼈에 닿을 거리였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김정연의 쇄골에 입 맞추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의 등을 끌어안은 내 손바닥에서 울리는 박동이 그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생전 처음 발견한 갈증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김정연에게 닿는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된 이상, 난 이제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흥분으로 치닫는 감정과 별개로 그건 다소 절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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