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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니까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12



커피를 마시며 선빈이와 실없는 얘기를 좀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들으란 듯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듯한 사람들이었는데 남자는 아마도 미디어 회사를 하는 집안 쪽이었고 여자는 내 기억이 맞다면 공연예술인가 스포츠사업인가 암튼 둘 중 하나를 하는 집안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이태현 얌전한 척하더니 거물을 물었다’, ‘저 쪽도 고고한 척은 다하더니 결국 반반한 놈 찾는다’, ‘그 정도면 이태현 얼굴로 팔려가는 거 아니냐’, ‘팔려가더라도 저 집안 정도면 할 만하다’ 같은 별 시답잖은 소리를 지껄이더니 내가 시선을 돌리자 낄낄대며 카페 밖으로 나가버렸다. 참 나이 먹고 할 짓도 없네. 면전에서 무례한 사람들을 만난 게 오랜만이라서 조금 얼떨떨했다.


“누나… 신경 쓰지 마.”


선빈이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선빈이는 늘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를 못했다. 저렇게 유약해서 그 집안에서 어떻게 버티나 몰라. 나는 그런 선빈이가 귀엽고 기특해서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응. 신경 안 써. 하루 이틀이냐, 이런 거.”


열다섯 살에 불쑥 복학생으로 등장한 이후로 나한테 저런 비아냥들은 그림자처럼 익숙했다. 어렸을 때는 화도 나고 많이 울기도 했는데 버티고 견디다 보니 그런 것도 다 무뎌졌다. 다만 이렇게 어른이 되고 나서도 저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매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냥 난 저런 거 보면 신기해. 이제 지겨울 만큼 익숙해지긴 했지만 뭔가 확실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아직도.”

“맞아. 저런 건 이상한 거잖아.”


선빈이가 맞장구치면서 내 손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선빈이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더니 좀 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부러워서 저래.”

“그런가. 근데 뭐가 그렇게 부러울까. 자기들도 이 바닥 결혼이 어떤 건지 알면서.”


내가 냉소적으로 말하자 선빈이가 내 손을 붙잡고 옆으로 살살 흔들면서 애처로운 얼굴을 했다. 덩치는 커졌어도 사람 달랠 때 하는 행동을 보면 여전히 어린아이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럴까?”

“뭐가? 결혼하는 거?”

“아니, 막 이렇게 그 바닥의 상식이랑 다르다고 생각하면 대놓고 비난하는 거. 보통 사람들은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어렸을 때라 몰랐던 건가.”


나는 어린 시절의 이웃들을 생각했다. 끽해야 중학교 1학년이 얼마나 많은 인간관계를 겪었겠냐마는 그래도 그 세상에선 이런 일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당연해지지 않는 것들에 신물이 났다. 하, 벗어나고 싶다. 짧은 한숨을 뱉으며 시선을 내렸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빈이는 시무룩한 얼굴로 내 손가락 하나를 잡고 당기더니 입술을 조금 내밀고 우물우물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니까. 3년만 기다리면 나 군대 갔다 와서 하면 되는데.”

“애기랑 어떻게 결혼을 해. 꼬마신랑도 아니고.”

“내가 무슨 꼬마야! 이렇게 커다란 애가 어딨어.”


선빈이는 진짜 발끈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가까이 왔다. 앉아 있는 내 앞에서 키를 자랑하는 모습이 웃겨서 그냥 피식 웃었다. 


“너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무서워서 나랑 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랬다가 후회한다.”

“근데 진짜 무섭단 말이야. 누나처럼 이미 잘 알고 믿을 수 있는 사람 두고 다른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해. 막 엄청 괴팍한 사람이면 어떡해.”


선빈이는 이내 다시 유순한 눈을 하고는 내 뒤에서 토끼 앞발 올리듯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턱을 기댔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등 뒤로 숨던 습관이 다 크고 나서도 여전했다. 내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잠깐 어리광 부린 선빈이는 내가 어깨를 툭툭 튕기자 얌전히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아 옆으로 다리를 길게 뻗고 한숨을 쉬는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 저기 누나 남편이다.”

“무슨 벌써 남편이야.”


민망해서 괜히 쏘아붙이고 커피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목 뒤로 넘기면서 슬쩍 선빈이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 옮겼다. 이태현은 2층 복도에 서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질의응답이 다 끝난 건지 그 옆으로 많은 기자들이 지나고 있었다. 


“근데 진짜 잘생겼다. 아까 프레젠테이션 할 때 보니까 카리스마 쩔던데.”

“......”


옆에 선 사람의 말을 들으며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거칠었다. 길고 반듯한 손끝에 머물던 내 시선은 까만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목선으로 넘어갔다. 옷차림 때문인지 그는 오늘따라 유독 깨진 고드름처럼 거칠고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이미 커피잔을 내려놓은 상태였지만 시선은 다시 가져오지 못하고 있었다.


“누난 이태현 저 사람 좋아? 맘에 들어?”

“맘에 들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결혼하라면 하는 거지.”


선빈이는 순수하게 물어본 질문이었겠지만 나는 가차 없이 잘라내 버렸다. 괜히 내가 찔려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선빈이는 쌀쌀맞은 내 대답에 입술을 삐죽이더니 금세 속없는 소리를 했다.


“근데 사실 좀 놀랐어. 난 이태현…님? 암튼 저분 그 사람이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그 골프선수 있잖아. 이름이 뭐더라, 세아? 세라?”

“이세나.”

“어어. 맞아. 거기랑 집안끼리도 친하고 이번에 그쪽에서 스크린 골프 관련한 사업 한다고 업무협약 맺는다는 그런 말들도 있어서.”

“그러게.”

“근데 누나랑 결혼한다길래. 뭔가 저 사람이랑 누나 사이에 로맨틱한 게 있었던 건가? 그런 생각도 잠깐 했지.”


나는 순진한 선빈이의 말에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로맨틱? 그런 걸 꾸며내기는 해야 하지. 역시 이세나는 나만 의식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마도 이태현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존재를 알 것이었다. 이태현과 가까운 친구사이로 알려진 이세나는 프로 골프선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인물이 수려해서인지 주기적으로 소란스러운 스캔들이 딸려 나오곤 했다. 연예인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쪽 일에 꾸준히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들 두 사람을 공식 연인처럼 생각했다. 이 바닥 소문에 그렇게 빠삭하지 못한 나마저도 이태현과 이세나에 대해서는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결혼 얘기가 나온 이후로 내심 신경 쓰고 있기는 했지만 막상 이태현 쪽에서 별말이 없어서 나도 가만히 있는 중이었다. 일단 결혼기간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기로 계약서까지 썼으니 별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자세히 알고 싶지 않기도 했고. 하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듣고 나니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진짜 문제가 없는 게 맞는 건지.


“헉. 지금 이쪽 보는 건가? 뭐 일이 안 풀렸나 봐. 표정 살벌하다.”


선빈이는 내 소매 단추를 만지작 거리다가 그대로 내 팔목을 들어 자기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이태현이 서있던 곳으로 눈길을 돌리자 그가 이 쪽을 바라보며 계단을 내려오는 게 보였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려오는 모습이 약간 불량해 보이기도 했다. 기자들이 무례한 질문을 했나? 아까부터 날이 서 보이는 그 모습에 아주 조금 걱정이 들었다.


“가 봐야겠다.”


선빈이의 손을 한번 꽉 잡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가방을 챙겨 와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지는 않아도 괜찮았다. 으응. 누나 또 봐. 연락해. 선빈이는 테이블 위로 엎드리면서 나에게 팔을 뻗어 붙잡는 시늉을 했다. 나는 웃으며 선빈이에게 인사하고 이태현 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계단에서 다 내려와 로비를 가로지르고 있던 그 앞에 서자 그가 가까이 붙어서며 내 등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과 다르게 차가운 그의 눈빛이 나를 좀 못 견디게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불편해진 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기다리시는 줄 알았습니다.”

“네. 그랬는데 여기서 친구를 만나서요.”


이태현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한마디 하더니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른세수를 했다. 그 모습이 몹시 피곤해 보였다. 어쨌거나 나는 그가 조금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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