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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립나 Oct 22. 2023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6



이태현이 운전을 하는 동안, 나는 그가 좌회전을 하느라 시선이 멀어질 때마다 재빨리 그를 살펴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깔끔한 커프스 아래로 보이는 은색 메탈 시계가 그의 커다란 손과 몹시 잘 어울렸다. 입고 있는 네이비색 수트와 일부러 매치한 건지 인덱스 부분에 푸른빛이 돌아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화로웠다. 식사하면서 풀렸던 분위기는 차에 타면서 다시 경직되어서 차 안에는 그가 틀어놓은 재즈 음악만 울리고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인데,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최대한 주의를 다른 쪽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는 원래 과묵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가 아까 내 허리에 손을 올리는 바람에 신경이 온통 그쪽에 쏠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런 스킨십에 좀 익숙지 않은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게 이태현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 달 반 사이에 급격히 친밀도를 높여야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건지는 모호했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이 지나 갤러리 입구가 보이는 코너를 돌 때쯤 내 재킷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업무폰은 손에 쥐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내 개인폰에 전화가 온 거였다. 나는 이태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선빈아.”

[누나, 나 지금 갤러리인데 언제 와? 오래 걸려?]

“나 이제 곧 들어가긴 하는데…”

[아, 진짜? 오키오키. 나 근처에 왔다가 누나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주실장님이 누나 나갔다고 하셔서. 누난 메시지도 안 보구. 주실장님이 또 전화는 하지 말라시더라.]

“어. 식사 약속이 있어서. 사무실에 올라가 있어. 금방 도착해.”

[알겠어. 빨리 와.]


여느 때처럼 귀염성 있는 선빈이의 말투에 나도 달래듯 말이 나왔다. 나를 큰 누나처럼 따르며 어리광을 부리는 선빈이는 종종 이렇게 불쑥 찾아오곤 했다. 선빈이가 연결에 도움을 줬던 작가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으니 식사를 챙기고 함께 전시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새 차는 주차장을 넓게 돌아 건물 앞 쪽에 정차한 상태였다.


“바쁘신데 시간을 뺏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점심시간인데요, 뭐. 오히려 이태현씨가 많이 바쁘실 텐데 오늘 식사 감사했습니다.”


이태현은 내가 말하는 동안 내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를 말할 것처럼 입술을 살짝 떼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이태현은 다시 입을 닫았다가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들어가세요.”


나는 가볍게 목례하고 차에서 내렸다. 건물 가까이 내려준 터라 몇 걸음 걸으니 금방 정문이었는데 유리문 안 쪽에서 누가 쑥 튀어나왔다.


“누나!”

“어우, 깜짝이야! 사무실 올라가 있으라니까.”

“금방 온다길래 같이 올라가려고 했지.”


선빈이는 헤헤 웃으며 나에게 팔짱을 꼈다. 키 차이가 한참 나서 보통 이렇게 팔짱을 끼면 거의 내가 선빈이 팔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선빈이는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는 근처 카페로 향했고 선빈이가 파니니와 샐러드를 먹는 동안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선빈이는 나에게 이 바닥 동지이자 동생이었다. 나와 어머니가 처음 이쪽 세계에 발을 디디고 주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먼저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선빈이의 어머니를 만났다. 선빈이의 어머니는 모델 일을 조금 하시다가 대기업의 패션 관련 계열사 하나를 맡고 있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외부인인 데다 두 번째 부인이라서 이쪽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변인이라는 공감대는 두 어머니들 사이를 아주 가깝게 만들었고 두 분이 느끼시기엔 재수 없는 사람들 천지인 이곳에서 나름대로 서로를 의지하며 지금까지 잘 견뎌오신 것이다. 

선빈이 아버지와 전 부인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어서 선빈이의 어머니가 낳은 두 자녀가 회사를 이어받게 되었지만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강단 있던 첫째 딸과 달리 선빈이는 그저 순하고 물렀다. 누나와 나이 터울도 6살이나 나서 마냥 귀여운 막내아들이었던 선빈이는 7살에 나를 처음 만나고서는 무슨 어미 오리를 따르는 아기오리처럼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맘 붙일 곳 없던 나도 차라리 그저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가 더 편했기 때문에 선빈이를 늦둥이 동생 돌보듯이 챙기면서 지냈다. 선빈이의 누나는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해외를 오고 가며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나와는 특별히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가끔 만날 때면 호의적이고 밝은 태도를 보여주는 친구였다.

어쨌거나 겁은 많고 숫기는 없었던 선빈이는 어머니와 꼭 빼닮은 모습으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성장통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쑥쑥 키가 컸고 작은 얼굴에도 반듯하게 골격이 잡혔지만 그래도 그 순한 눈매와 하얗고 앳된 피부는 어릴 때 그대로였다. 사실 앳되다기엔 지금도 어렸다. 선빈이는 보기 드물게 착하고 순한 청년이었지만 경영에도, 공부에도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모델 활동을 좀 하다가 지금은 화보만 간간히 찍으면서 누나 밑에서 조금씩 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오늘도 누나가 체크하고 오라는 매장이 갤러리 근처라서 온 김에 나를 찾아온 거라고 했다. 

나는 선빈이가 내 몫으로 덜어준 파니니를 한입 베어 먹으며 물끄러미 선빈이를 바라보았다. 샐러드를 오물거리는 볼이 여전히 말랑해 보였다. 선빈이도 나중에 이런 사업적 결혼을 하겠지? 이런 애기도 몇 년 뒤면 이태현처럼 그렇게 무뚝뚝한 말투로 계약사항을 정하게 되는 걸까? 나는 이태현의 곧게 뻗은 턱선과 깊고 날카로운 눈빛을 떠올렸다가, 그가 말랑한 볼을 가졌던 시절을 상상해보았다. 흐릿하게 그려지던 형상은 올해 대학을 졸업하면 군대에 가야 하는데 벌써 막막하다며 응석을 부리는 선빈이의 목소리에 뿌옇게 흩어져버렸다.










퇴근해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나를 잠시 거실로 부르셨다. 자리에 앉자 어머니가 오묘한 미소를 띠고 물어보셨다.


“둘이 얘기는 잘하고 있니?”

“어제 처음 만난 건데요, 뭐. 이제 해야죠.”

“이번 달 말에 기사 나가는 거 알지?”

“네.”


어머니는 짧게 대답하는 내 눈에서 뭔가를 찾으시려는 것처럼 한참을 눈을 맞추고 계셨다. 그러더니 다시 여느 때의 편안한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다른 건 천천히 준비하면 되는데 예식장 세팅 디자인이랑 신혼집은 미리 확인해야 돼서 말이야. 이번 주말에 이팀장이랑 같이 담당 직원 만나서 정하고 신혼집 후보들도 보고 와.”

“이번 주말요? 안 될 텐데…”

“왜,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에요. 얘기해볼게요.”

“그래. 신혼집은 너희 아버지가 3개 정도 추려놨으니까 둘이 잘 보고 맘에 드는 데로 골라. 알겠지?”

“네…”

“이대표가, 아니 이제 사돈이라고 해야 되나? 암튼 이팀장한테도 말해놓는다고 하셨으니까 얘기해보면 될 거야.”

“알겠어요. 그럼 올라가 볼게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엄청 바쁘다고 했는데. 벌써 빠듯하게 부담이 느껴졌다. 저녁시간만 넘긴 다음 너무 늦기 전에 전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와서 협탁 위에 충전되고 있는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미 이태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가 보네. 나는 머리를 대충 말리고 이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네, 저 김정연인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아, 전화 주셨어서요.”

[저희 예식이랑 신혼집 관련해서 이번 주말에 정해야 할 부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만나시는 게 좋으신가요?]

“어… 근데 이번 주말에 일정 괜찮으세요? 많이 바쁘실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더니 조금 늦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 쪽도 만만치 않은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본인 아버지에게 또 얼마나 무겁고 치밀한 압력을 받고 있을지. 이 계약 결혼판에 비련한 주인공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담담해 보이는 이태현도 마찬가지로 속이 복잡할 것이었다. 이런 정략결혼이 체질에 맞는 김준경 같은 인물이라면 모를까, 이틀 동안 겪어본 이태현은 확실히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럼 차라리 빨리 만나서 끝내는 게 낫겠죠? 괜찮으시면 토요일에 보죠.”

[좋습니다. 직원에게 토요일 10시로 말해놓겠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2층 거실과 이어지는 복도 사이에 놓인 냉장고에서 도우미 여사님이 만들어 놓으신 샐러드를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식사를 하려면 1층 다이닝 룸에서 차려놓고 먹어야 할 텐데 그럼 옷도 잠옷이 아닌 다른 일상복을 입어야 할 것이고 피곤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성공한 사람이라면 지켜야 하는 세세한 규칙들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는 잠옷은 잘 때만 입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잠옷을 입고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퇴근을 하고 나면 이렇게 방에만 콕 박혀있었다. 

무난한 영화를 틀어놓고 샐러드를 야금야금 먹다가 문득 잊고 있던 게 생각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귀찮음을 무릅쓰고 옷까지 갈아입은 나는 차고로 내려가서 내 차 조수석에 안전벨트까지 채워놓았던 종이 쇼핑백을 꺼냈다. 퇴근하는 길에 챙겨놓고는 까먹고 놓고 내린 것이었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와서 포장을 벗기고 화분을 꺼내 창가에 두었다. 발코니 테이블에 놓으면 딱 예쁠 것 같았지만 가끔씩 밤서리가 내리기도 하는 꽃샘추위를 버티기엔 꽃잎이 너무 여려 보였다. 나는 그 은은한 연보랏빛 꽃잎을 손 끝으로 톡톡 건드려보았다. 보드라운 촉감을 느끼고 있자니 주말에 있을 일이 마냥 피곤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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