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하이나 눈 :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는 정오 - 2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대학원 학비를 모으기 위해 한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다. 단순한 잡무를 하던 어머니는 다른 부서 직원이라는 아버지를 만나 연애를 했고 관계가 깊어질 무렵 아버지에게 사실 자신이 이 회사 사장의 아들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의 태도가 굉장히 비장하고 확고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재벌들이 으레 하는 정략결혼 같은 건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24살의 어머니는 그렇게나 순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다른 기업의 자제와 약혼을 했고 어머니는 약간의 상처와 엄청난 격분을 안고 아버지를 떠났다.
여기까지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약간 진부한 이야기였는데 그 이후의 삶은 그게 혹시 흔하다 할지라도 진부하다고 하기엔 너무 지난하고 거친 현실의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다른 사람과 약혼식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나를 가진 것을 알게 되었고 교수의 꿈을 꾸던 젊은이는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홀로 딸을 키웠다. 음, 혼자는 아니고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키웠다. 그렇게 대학의 커다란 강의실 대신 지방의 작은 학원에서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스스로 만족을 훈련하면서 지냈다.
엄마는 강한 분이셨다. 그런 점은 외할머니를 꼭 닮으셨는데 가끔씩 내 안에서 뭔가가 치미는 것 보면 나도 그런 부분을 조금은 물려받은 것 같다. 그 강인함 때문에 부러지는 순간도 종종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셋은 잘 버텼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나에게 한 번도 아버지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김중호 부회장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아빠라는 존재를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의 얼굴을 보면 내가 자랄수록 아버지가 떠올랐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엄마는 내색하지 않으셨다. 나도 한 번도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고 한다. 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무튼 천만다행이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결혼했던 분과 이혼을 했다. 결혼 전 두 집안이 약속했던 내용처럼 그분이 아들을 낳아서 이혼을 할 자격이 생겼고,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때쯤엔 두 기업 사이에서 서로 이익이 될 만한 것들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염치없게도 우리 엄마를 찾아왔다. 마치 큰일을 치르고 돌아온 사람처럼 당당한 모습이 뻔뻔했다면서 엄마는 치를 떨었다. 그 시기는 나도 기억이 난다. 매몰차게 쫓겨난 아버지와 비서, 운전기사님 앞으로 촥촥 소금을 뿌리던 외할머니의 굳은 손매가 생생했다. 하지만 그때 엄마는 지칠 만큼 지친 상태였고, 뻔뻔한 만큼 적극적으로 매달리는 아버지에게 못 이기는 척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자존심 하나로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척하기엔 엄마를 힘들게 만드는 게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유학하면서 수년간 도시의 삶에 만족했던 엄마에게 이 작은 해안마을은 너무 고요하고 잠잠했고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연구하며 가르치고 싶었던 엄마에게 중학교 교육과정과 학원 커리큘럼의 변화는 너무 소박했다. 엄마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분이었기 때문에 기회를 꿈꾸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자꾸 커가는데 버는 돈은 늘지 않고 외할머니가 점점 나이가 드실수록 엄마는 더 불안했다. 본인이 학원에서 일을 하면서도 딸을 학원에 보내지 못하는 상황에 좌절감을 느끼던 엄마에겐 하나의 선택지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 덕에 나는 하루아침에 부자 아버지와 커다란 집과 동갑내기 남매가 생겼다. 김준경은 나보다 생일이 5개월 정도 느렸는데 나는 그게 좀 징그러웠다. 김준경이 징그러운 건 아니었고 그렇게 반년 사이에 자식을 둘이나 만든 아버지의 처신이 못마땅했다. 김준경은 첫 만남에서 엄청나게 긴장한 내가 민망할 정도로 나와 어머니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무례하지는 않아서 늘 어머니에게 깍듯하게 대했다.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 아버지를 닮기도 해서 잇속에 밝은 애였는데 내가 자신에게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냥 적당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오히려 괜히 적대적으로 대하는 게 더 상황이 피곤해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난 걔의 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사실 그닥 알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피차 간편하게 지냈다. 나는 제대로 마치지 못한 중학교 1학년을 다시 다녔어야 해서 학교 다닐 때는 김준경과 한 학년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부자들은 다니는 학교도 뭐가 엄청 다른지 잘 어울리려면 내가 준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때 1년을 꿇지 않는 게 잘 어울리는데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네 집에 가서 같이 만화채널이나 음악방송을 보고 볶음밥을 해 먹던 날들이 너무 그리웠고 도우미 분들이 깔끔하고 건강하게 차려준 음식을 먹으면서도 외할머니의 간간한 손맛이 그리웠다. 외할머니는 나와 엄마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정신없고 답답해서 싫다며 그 마을에 남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그때는 내가 외할머니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도시를 떠나서 괴로웠던 것처럼 외할머니도 보금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박박 고집을 부려서 한 두 달에 한 번은 꼭 내가 외할머니 집에 가거나 외할머니를 아버지의 집으로 모셨다. 대부분은 내가 외할머니를 뵈러 갔지만 가끔씩은 외할머니가 우리가 사는 집으로 오셔야 했는데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청심환을 드셨다. 여기만 오면 답답하고 숨이 막힌다면서 내 방 발코니에 앉아서 계절을 막론하고 바람을 쐬셨다. 외할머니께는 죄송했지만 그래도 난 그런 순간들을 모아서 혼자 남았을 때의 시간들을 견뎠다. 나는 아무래도 외할머니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남들은 특권이라고 할 이 집안이 나에게는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움푹 패인 윤리의식과 막대한 부로 성벽을 쌓은 세상에 사는 것은 늘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있는 기분이었다. 중학교 1학년 여름까지 보통 사람들의 세상에서 약간 궁핍하게, 하지만 자유롭게 살던 나는 끽해야 신형 핸드폰을 살 정도의 부유함을 꿈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여름방학의 어느 날 불쑥 찾아온 아버지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와 어머니를 이 거대하고 엉망진창인 세계로 데려왔다. 물론 어머니의 의사는 반영된 것 같지만 아까 말했듯 그 부분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난 엄마를 사랑했고,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인생을 살아왔다.
문득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그리워하면서 지냈으면 혹시 이 모든 걸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애틋한 관계가 되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결론은 그런 가정은 다 부질없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금 인생이 이미 일어난 일들의 결과이고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한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아버지에 대해 제대로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모든 갈래가 만들어진 이유가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상념에 잠겨있었는데 이태현의 아버지가 내가 관리하는 갤러리에 대해서 뭔가를 물어보셨다. 적당히 호의적인 태도로 질문에 대답하며 그의 가족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세 사람 모두 그 얼굴과 분위기가 서로 조금씩 닮아있었다. 남의 집 사정은 잘 모르는 거지만 일단 추측해봤을 때, 결혼할 당시 평범한 사회인이었을 이태현의 부모님은 아마도 일반적인 애정관계를 기반으로 가정을 꾸렸을 것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이태현은 이 뜬금없는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의 옆얼굴에 닿는 이태현의 시선이 어떤 색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아버지를 보고 말을 마쳤다.
식사를 마친 후 나와 이태현은 호텔의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첩보작전도 아니고 맨날 프라이빗한 걸 그렇게 찾아대던 사람들이 갑자기 트인 공간에 가서 얘기를 나누라는 게 좀 의아했지만,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곳에서 환기를 좀 하고 싶었다. 직원이 안내한 대로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역시나 우리와 가까운 주변에는 그 누구도 사람이 없었다. 멀찍이 보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이내 거뒀다. 괜한 감상은 마음을 복잡하게만 할 뿐이었다. 나는 호텔의 시그니처 커피를 주문했고 이태현은 직원에게 나와 같은 것으로 달라고 했다. 조용해진 테이블에 어색함이 흐를 때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주실장이 인사로 기척을 했다. 반듯하게 앉은 그대로 주실장을 빤히 쳐다보는 이태현의 눈빛이 무감했다.
“저랑 같이 일하는 주시은 실장이에요.”
내가 소개하자 주실장이 이태현 쪽으로 몸을 틀어 한번 더 인사했다. 이태현은 말없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주실장은 재킷 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나와 이태현이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렸다. 녹음기였다.
“부회장님께서 변호사가 직접 동석하는 건 두 분이 불편해하실 것 같다고 하셔서요. 오늘 대화에서 나오는 사항들은 변호사에게 전달해서 계약 문서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석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차선책이 녹음기라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이 바닥에 발을 디딘 지 16년이 넘어도 이들의 사고방식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태현은 이 상황이 익숙한 건지 본인도 동의를 하는 건지 그저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실장은 간단히 고개를 숙인 다음 다른 사람들이 있는 멀찍한 곳으로 가버렸고 테이블 위에 놓인 녹음기 액정의 시간은 계속 쌓이고 있었다. 나는 이태현 눈치를 한 번 보고 녹음기를 껐다.
“처음으로 대화 나누는 자리에서 녹음기는 무리인 것 같네요.”
“나중엔 괜찮은 건가요?”
담담한 말투의 낮은 목소리가 그다지 공격적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옅게 미소를 띠고 있어서 나도 그냥 작게 웃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희 쪽에서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대화했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거든요.”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일할 때나 집에 있을 때나 맨날 속마음을 숨겨대는 나에게 포커페이스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번엔 확실히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건조해 보일 정도로 묵묵한 모습만 보이던 그가 뭔가를 부탁했다는 것 자체가 의외였다.
“저는 이 결혼이 연애결혼으로 보이길 바랍니다.”
연애결혼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여전히 의아한 낯을 지우지 못한 나를 보며 이태현이 말을 붙였다.
“저희 회사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트렌디하고 자유로운 느낌이라서. 정략결혼은 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시대착오적인 걸 지금 그쪽이 하시게 되는 건데. 남일에 대해 말하듯 거리를 두는 이태현이 뭔가 얄미웠다. 나도 시대착오적인 거 알거든요? 내가 속한 집안이 그 시대착오적 결혼의 대표적 사례인 거 아주 잘 안다고요.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 입고 마주 앉아있는 게 연애하는 것처럼 보일까요?”
“목격자가 생기는 게 중요합니다. 같이 있었다는 사실만 목격되면 나머지는 알아서 만들어 주니까요.”
“아무도 저희한테 관심 없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들은 이태현이 눈가를 조금 찡그리며 웃었다. 비웃나 싶어 매섭게 관찰해봤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생각보다 관심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나와 눈을 맞추고 있는 이태현의 눈빛에 조금 무게가 실렸다. 그때 마침 커피를 가지고 온 직원이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무심코 이태현에게 몇 번 더 시선을 뒀다. 아무래도 그의 말이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는 동안 이태현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잔을 잔받침에 내려놓자 이태현도 자신의 잔을 들어 살짝 입술을 댔고 커피를 한 모금 넘긴 그는 별 표정 변화 없이 소파 등받이에 살짝 등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