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로 온 이웃, 802호

6화부터 월,수,금 19:00 발행

by 안녕마나

“아... 아이씨...”


창문을 열자 담배 냄새가 훅 날아들었다. 창문을 도로 닫고 방에 풀썩 주저앉았다. 집에 방이라고 해봐야 아파트 복도 쪽으로 난 내 방과 안방이 전부인지라 방을 바꿀 재간도 없다.

날은 하루가 다르게 더워지는데 창문조차 제대로 못 연다니 뒷덜미로 짜증이 확 솟구쳤다. 나는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홱 열어젖히고 한창 저녁 설거지 중인 엄마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 옆집 애들한테 한 마디 해야겠어! 이젠 나도 못 참아! 안 참아!”


엄마는 수도꼭지를 내려 물을 잠그며 나를 돌아봤다.

“내가 몇 번을 말하냐, 설거지하면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린다고 했잖아, 방금 뭐라고?”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되묻는 엄마의 표정을 보자 김이 샜지만 나는 멀어져 가는 분노를 애써 다잡았다.


“804호 애들. 또 복도에서 피우는지, 더는 나도 못 참아! 안 참아!”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며 성을 내다가 엄마를 바라보니 날 물끄러미 쳐다보며 미동 없이 서 있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뭐야.”


심드렁한 엄마의 표정에 민망해진 내가 쭈뼛거리자 엄마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오른쪽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놈아, 쟤들 복도에서 저러는 게 3년이야. 누구는 입이 붙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줄 알아? 남의 집 새끼들한테 설교해서 뭐할래? 말 몇 마디에 안 피울 정도면 애초에 저러지도 않아. 그리고 담배 피우는 어린 녀석들 건드려봐야 좋을 것 하나 없다. 하이 고야. 쟤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천릿길인데도 오늘만 사는 것 마냥 왜들 저러는지. 눈에 뵈는 것도, 귀에 박히는 것도 없을 그런 때니까 괜히 건드려봐야 세상 흉한 꼴 다 알아버린 우리 어른들만 손해다 이거야. 그리고 저 녀석들한테 한소리 할 거였으면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그때 말을 했어야지. 반년이나 지나서 니가 뭘 한 마디 하겠다고 문을 박차고 나오기를 나와, 허풍은."


엄마는 그렇게 한바탕 말을 쏟아내고는 개수대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나는 분해서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숨을 씩씩 몰아쉬다가 엄마가 수도꼭지를 틀기 전, 토하듯 말을 뱉었다.


“저번에 엄마가 쳐다보니까 비상구 계단 쪽으로 가서 피웠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는 고개를 홱 돌리더니 나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뭐? 그래서 지금 나더러 나가서 보고 오라고? 그렇게 못 참겠으면 니가 쳐다보든가! 그 새파랗게 어린것들이 눈깔 굴리면서 니 어미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너는 괜찮냐? 내가 그때 기분 더러우니 이젠 피해야겠다고 했어, 안 했어? 그리고 복도로 보내면 거기선 안 피우냐? 여기 아파트 청소하는 아줌마가 벽이 온통 담뱃불로 그슬렸다고, 꽁초도 아무렇게나 버린다고, 그래서 청소하기 힘들다고 하도 하소연을 해서 저번에 여기 8,9층 사람들끼리 그냥 저대로 내버려두자고 했잖아. 정 그러면 니가 나가서 한소리 하든가. 이제 나한테 말 시키지 마, 정신 사납다."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수도꼭지를 위로 젖히더니 그릇을 씻는 것인지 깨부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마저 남은 설거지를 했다. 몇 마디 더했다가는 내가 잡히겠다 싶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한번 담배를 태우면 두 놈이 수다를 떨며 피워대니, 못해도 20여 분은 기다려야 그나마 복도에 벤 냄새가 어느 정도 빠진다. 그래 참자. 건드려봐야 나만 골치 아프다. 손깍지를 걸어 뒤통수에 대고는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때 창문 밖으로 낯선 남자의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걸어 지나갔다. 이제 보니 오늘 아침 일찍부터 802호에 이삿짐이 들었다. 802호에는 원래 노부부가 살았는데 할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서울 아들 집에서 살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연세도 있으시니 잘됐다고 여기던 참이었는데 작별인사를 나누던 엄마가 대뜸 안 불편하시겠느냐고 물었다. 평소 엄마와 복도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마음을 나누던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속 이야기를 내어놓았다.


요즘 세상에 자식 집이 뭐가 편하겠느냐며 맹물에 찬밥을 말아먹어도 내 집이 낫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병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지만 가봤자 손주들 건사에 할아버지 병시중에 아들네 눈치까지 보면 내가 먼저 죽지 않겠나 싶다는 말도 보탰다. 서른이 다 가까운 나이에 서울살이 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나도 이제는 이곳이 더는 ‘우리 집’이 아니라 ‘엄마 집’이구나 싶어 불편한데 부모도 자식 집에서 그런다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802호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울로 떠나고 한동안 그 집은 비어있었다. 하긴 이 작은 지방도시의 오래된 아파트에 전세 들어 살 사람이 있겠느냐며 8층 사람들은 저마다 말들을 보탰다. 나는 804호 담배 피우는 녀석들 때문에 자존심에 생채기는 물론이고 창문을 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통에 802호에 이사 오는 사람은 제발 흡연자만 아니게 해 달라고 소박하게 빌었다. 그런데 오늘 낮,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이사 온 사람이 혼자 사는 남자란다. 엄마는 새로 오는 이웃에 대해 부동산 아줌마로부터 들어 이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오늘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802호 남자에 대해 한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는데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다. 오전에 이삿짐이 들어오길래 내다봤더니 802호에 들어온다던 남자더라는 둥, 키는 적당하게 크고 체격도 나쁘지 않고 엄마가 먼저 말을 걸어 인사를 건넸는데 시원하게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서 사람 좋다 싶었다는 둥, 그 남자가 인사만 하고 별다른 말이 없이 지나갔다는 둥, 스타일이 젊어 보이기는 하는데 아무리 잘 쳐도 나이가 30대 중반으로 보인다는 둥, 결혼을 안 한 건지 아니면 처자식은 다른데 두고 온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혼을 했는지 알 수 없다는 둥, 무엇보다 도대체 한창 일할 나이에 서울에서 왜 굳이 마땅한 회사 하나 없는 이 작은 시골 동네로 이사 왔는지 모르겠다며 혼잣말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을 한참 쏟아냈었다.


엄마와 나눴던 낮의 대화를 찬찬히 떠올리자 문득 방금 지나간 802호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창문에 방문까지 닫아두고 있기도 갑갑하여 나는 근처 편의점에나 갈 요량으로 바지만 갈아입고 잽싸게 방을 나섰다. 엄마는 막 설거지를 마쳤는지 고무장갑을 벗어 개수대에 걸쳐두던 참이었다. 급히 나가는 나를 보더니 엄마는 짐짓 놀란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왜, 진짜 한마디 하시게?”

“아니, 편의점.”


엄마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을 건네고는 대충 슬리퍼를 걸쳐 신고 현관문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이사를 왔다는 그 남자 뒷모습이라도 볼 생각으로 얼른 그가 가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802호 남자가 804호 고등학생 두 명과 마주 선 채로 그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와 녀석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는지 802호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내쪽으로 돌렸다. 마주 서 있던 고등학생 녀석들도 그를 따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동물적으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빼 들었다. 그리고 복도 난간에 몸을 기대고는 핸드폰을 바라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내게서 떨어진 거리는 다행히 곁눈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관찰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열여덟과 세상 무서운 줄 아는 30대 중반이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곧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내쪽을 향하던 802호 남자의 시선은 이내 804호 열여덟 고등학생들에게로 향했다. 둘 중 어느 쪽도 말이 없었다. 나는 슬쩍슬쩍 고개를 돌려 그와 녀석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허세와 당황이 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802호 남자의 시선에 가까스로 맞서고 있는 열여덟 살의 녀석들과는 달리 802호 남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녀석들은 담배를 끼워둔 손을 몸 옆으로 어색하게 늘어뜨려 놓고는 어지러이 시선을 움직여대며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 녀석이 턱을 살짝 들어 보이며 불쾌감을 802호 남자에게 알렸지만 남자는 녀석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물론이고 분노나 짜증조차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 두 녀석과 담배를 천천히 번갈아 가며 말없이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지켜본 그 찰나는 너무나도 길어서 지켜보는 나조차 숨이 막혀 헛기침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때였다. 침묵을 깬 쪽은 802호 남자였다.


“담배는 건물 밖에서 피웁시다.”


흔들림 없이 낮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그렇다고 너무 저음은 아니어서 충분히 선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흘끗 두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들은 무슨 상관이냐는 말도, 싫다는 말도, 그렇다고 알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턱을 치켜들어 보이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에이...”


그러더니 몸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다른 녀석이 뒤를 따랐다. 마치 더러워서 피한다는 모양새를 의도한 듯 보였으나 누가 봐도 802호 남자의 기에 눌린 것이 분명했다. 802호 남자는 조용히 시선으로 그 둘을 따랐다. 두 사람이 비상구 문을 열고 계단으로 향했다. 비상구 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802호 남자가 두 사람이 간 쪽으로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막 닫히려던 문을 거세게 잡아 멈췄다. 그러더니 문을 다시 열어젖히고는 그 둘을 향해 말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담배는 건물 밖에서 피우시라고.”


아마 방금 전 턱을 치켜들어 올렸던 녀석일 법한 목소리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섞어 말을 뱉었다.


“아, 진짜”


녀석들은 슬리퍼를 끌며 자기도 모르게 빨라지는 걸음을 애써 눌러가며 다시 804호 자기 집 앞으로 오더니 담배꽁초를 내 방 창문 아래쪽 바닥에 휙 던지고는 자기들 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여전히 비상구 문을 잡고 녀석들을 지켜보고 서 있던 802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담배꽁초를 향했다가 나로 옮겨왔다. 그리고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천천히 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지켜서 있는 이유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달싹이는데 내 방 창문까지 온 그는 몸을 숙여 떨어진 담배꽁초를 집어 들었다.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것인가 싶어 무슨 말이라도 해 볼까 허둥지둥 말을 고르는데 그가 다시 몸을 돌려 804호로 향했다. 그러더니 바로 서서 804호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벨을 눌렀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여전히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렇게 세 번을 누르자 안에서 나이 든 남자가 얼굴을 쏙 내밀었다.


“누구 쇼?”


남자는 신경질적이고 위협하는 눈빛으로 802호 남자를 쏘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802호 남자는 다짜고짜 담배꽁초를 남자 눈앞에 내밀며 말했다.


“방금 그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복도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렸습니다. 드릴게요."


남자는 담배꽁초와 802호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거칠게 대답했다.


“우리 집은 담배 피우는 사람 없소.”


나는 남자의 대꾸에 기가 차서 나도 모르게 짧게 탄식하고는 움찔했다. 802호 남자를 보니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담배꽁초를 든 채로 804호 남자를 쳐다보며 서 있었다. 그러더니 802호 남자가 별안간 허리를 숙이더니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804호 현관 안쪽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804호 남자는 802호 남자의 행동에 이렇다 할 말도 못 하고 눈만 부라리다가 입술만 꿈지럭거리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는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다시 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고 그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내 인사에 답하고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제야 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닫힌 802호 문을 보고 있자니, 정확히 무엇으로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묘한 감정과 경외심이 한꺼번에 일었다. 나는 숨을 몇 번 크게 고르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빈손이야? 내 거는? 너만 꼴랑 먹고 온 거야?”


엄마가 하던 핸드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흘겼다.


“나 편의점 안 갔어. 엄마 나 방금”


나는 방금 전 본 광경을 엄마에게 털어놓으려나 순간 멈칫했다. 두 녀석을 응시하던 802호 남자의 눈빛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닌, 그러나 무언가 어마어마한 것을 목격했다는 생각에, 동네 수다쟁이인 엄마에게 이리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방금 뭐. 편의점 안 가고 그럼 뭔데? 가다가 그냥 온 거야?”


"어.. 어어. 가다가 그냥 귀찮아서 왔어. 나 들어간다.”


나는 급히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앉으려다 말고 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상쾌한 밤공기가 얼굴 위로 불어왔다.




일주일 남짓 지나자 8층 사람들 모두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일을 일찍 끝내고 돌아온 엄마가 장 본 것들을 차례로 냉장고에 정리하며 내게 말했다.


“덕구야, 너도 요즘에 못 봤지? 옆집 애들 복도에서 담배 피우는 거? 참나, 내가 아까 오는데 걔들이 건물 밖 자전서 세워둔 거기 있지, 거기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더라. 하하하. 별일이야. 웬일이래. 저기 805호 애기 엄마도 저번에 한번 만났는데 요즘 담배냄새가 안 나서 너무 좋다고 그러더라고. 너도 느끼냐?”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엄마는 싱겁다는 듯이 입을 한번 삐죽이고는 부지런히 음식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었다. 문득 지난 3년간 8층 주민이 겪은 고통의 종식이 804호 녀석들 스스로 일구어낸 개과천선, 혹은 804호 부모의 제대로 된 자식 교육 덕분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는 사실이 몹시 억울해졌다.


“엄마, 그거 802호가 한 거야.”


느닷없는 나의 말에 엄마가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802호? 얼마 전에 이사 온 사람?”


“응. 내가 봤어. 804호 애들이 복도에서 담배 태우는데 복도나 계단에서 피우지 말고 밖에서 피우라고 그러더라고.”


엄마는 놀란 듯하다가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표정을 고쳐지으며 되물었다.


“804호 애들이 그 말 한마디에 안 피운다고? 그 사람이 그렇게 한번 말했다고?”


나는 그 사람의 말투며 표정이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 중언부언하려다가 그저 한 마디만 보탰다.


“맞다니까. 한 번이긴 해도 아주 확실하게 말을 했거든. 언성 한번 안 높이고, 확실하게.”


엄마는 내 표정에서 진지함을 읽었는지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몇 번 깊이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별말이 없었다. 며칠 뒤, 엄마는 내게만 별말이 없었을 뿐 8층은 물론이고 엄마가 아는 이웃 사람 모두에게 지난 3년간의 담배 지옥에서 우리를 구출해 준 것이 802호 남자라는 사실을 부지런히 주변에 알린 듯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할머니며 엄마 또래의 아줌마마다 ‘덕구야, 그게 정말이냐? 네가 봤다며. 802호가 어떻게 말했는데?’라며 물었고 나는 그때마다 ‘네, 뭐 점잖고 확실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라며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흐르기를 반복하면서 담배냄새로부터의 해방은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어갔다.




오늘은 엄마가 출근이 빨랐다. 엄마가 출근한 뒤 냉장고를 뒤져봐도 마땅히 집에 먹을 것이 없다. 그냥 편의점에서 간단히 끼니만 때우고 오래간만에 잡힌 아르바이트 하러 일찍 가자 싶어 서둘러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섰는데 뒤이어 802호 현관문이 열렸다. 담배 사건 이후로 처음 만나는 그였다. 어차피 복도도 함께 걸어야 하고 엘리베이터도 함께 타야 할 테니 여기에서 인사하는 편이 덜 어색하겠다 싶어 나는 잠시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흰색 반팔 피케셔츠에 노란색 면 반바지를 깔끔하게 차려입고 스웨이드 샌들을 신은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맵시에 감탄할 새도 없이 나를 발견한 그가 내쪽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왔다.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그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예상외로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제대로 처음 인사드리네요."


그의 목소리는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친근했다. 그는 내게 앞서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서서 기다리는데 어색한 침묵이 견디기 어려워질 때 즈음 그가 내게 물었다.


"혹시 이 동네나 주변에 목재상이 있나요?”

“네? 목재상이요?”

“네, 나무 합판 같은 거 파는.”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동네 둘러보면서 알아보면 되죠.”


마땅한 대답을 주지 못해 공연히 미안해진 나는 혹여 무엇을 사려는지나 알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 물었다.


“목재상에서 뭐 사시려고요?”


그러자 그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옅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아, 네. 오동나무 한 2미터 정도 되는 막대기 같은 것 좀 구해볼까 싶은데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희 엄마가 동네 사정을 잘 아셔서요. 한번 여쭤볼게요. 막대기면 뭐 각목 같은 거 하나면 될까요?”


그가 나를 쳐다보더니 반색하며 답했다.


“아, 네네. 각목보다 조금 두껍게 120개 정도요."


오동나무 2미터 길이의 두꺼운 각목 120개라니.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가 아이 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요. 혹 아시는 목재상 있으신지 가볍게 물어봐 주세요. 인사도 아직 제대로 못 드렸는데 부탁드려 송구하네요. 감사합니다.”


(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