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비밀 약속

6화부터 월,수,금 19:00 연재

by 안녕마나

802호 남자와 나는 아파트 입구에서 짧게 인사를 나눈 뒤 헤어졌다. 원래는 나도 그가 가는 방향으로 걸었어야 했지만 공연히 같이 걷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 반대 방향으로 빙 둘러 가기로 했다.


보통 사람이 오동나무 각목 100여 개가 필요할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도통 그럴만한 일 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가 목재상 연락처를 알아다 주면 전해주며 지나가는 말로 쓱 물어봐야겠다 싶으면서도 내가 지금 남의 인생 궁금해할 때인가 싶어 순간 802호에 대한 흥미가 확 주저앉았다.


나는 버스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라면에 물을 붓고 기다리는 동안 삼각김밥 비닐을 뜯어 한입 크게 베어 물었는데 저 멀리에서 버스가 온다.


“하아...진짜...타이밍 한번 더럽네.”


나는 아까운 마음에 설익은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입으로 쑤셔 넣고는 남은 면발과 국물을 쓰레기통에 쏟아붓고 얼른 편의점을 뛰쳐나왔다.


입천장이 데고 까져서 입에 가득 문 면발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나는 그 순간조차 먹고 살기 위해 콧구멍을 벌름이고 입김을 허허 불어대며 기어이 면발을 씹어 삼키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를 놓치면 기약이 없으니 라면을 아까워할 일은 아니라며 나를 다독였다.


텅 빈 버스가 요란스레 덜컹대며 이 작은 지방 도시의 더 작은 도심을 부지런히 달린다. 서울에서 홍영으로 다시 내려온 지 꼭 반년이 되었다. 서울에 올라갔던 건, 이곳 홍영에서 그나마 들어오던 관광객 스냅사진 아르바이트마저 뚝 끊긴 지 한 달 여 되었을 무렵에 서울의 한 웨딩 전문 스튜디오에서 일하는 과 선배 형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때였다.


“덕구야, 그러지 말고 너도 서울 올라와. 우리 스튜디오에 스텝 하나 그만뒀거든? 내가 과에서 친하게 지내던 실력 괜찮은 녀석이 있다고 대표님한테 이야기했더니 한번 올라와 보래. 아마 일손이 부족해서 너라면 바로 일하자고 할 듯.”

“나도 서울 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닌데. 집세며 생활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렇지.”

“야 새끼야. 모험을 걸어야 기회가 생기고 성공을 하는 거지. 일자리도 없는 거기에서 뭐할래? 좀 덜 먹고 덜 꾸미고 그러고 살면 충분히 살아져. 스튜디오가 강남이라 다른 알바 같이 뛰기도 좋고. 고시원에서 사는 애들도 많고. 젊을 때 고생해야지. 늙어서 고생할래?”

늘 성실했던 형의 말을 믿고 나는 그렇게 서울로 올라갔다.


형의 말대로 나는 덜 먹고, 덜 꾸몄지만 사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과 예비 신부가 카메라를 향해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나는 속이 텅 빈 채로 멋지다 말하며 손뼉을 쳤다.

누군가가 사 주는 술마저도 실컷 취하지 못한 채 강남의 거리를 걸을 때면 젊어서 고생하지 않고도 젊어서부터 호화롭게 사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나는 부지런히 살았건만 집주인 월세와 학자금 대출빚을 치르기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 모든 것이 의미 있는 고생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질 않아 스튜디오와 모든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엄마집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나는 열심히 살았지만 그건 세상의 기준에는 늘 부족한 듯 했고, 어느 누군가의 말처럼 ‘저래서야 뭘 해도 성공 못 할 놈’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엄마는 내게 어떤 탓도 하지 않았다. 내게 주어진 몇 되지 않는 커다란 행운이 있다면 이래저래 ‘잔’소리는 많지만 내가 내린 인생의 힘든 결정을 존중해 주는 엄마를 두었다는 점이다.

사진이 좋으니 사진학과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등록금만 스스로 대면 괜찮다고 했었다. 서울로 간다고 했을 때도 집에 오고 싶으면 세 번만 참아보다, 해도 안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내려오라 했었다.

엄마가 ‘비둘기소식’에서 사진 찍을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말을 무심한 듯 툭 던졌을 때도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던 건 그런 엄마의 평소 때문이었다.


버스정류장 이름이 ‘비둘기소식 앞’이다. 버스에서 내리니 은색 샷시의 사무실 미닫이문이 활짝 열려있다. 간판에는 ‘홍영 유일의 지역소식지! 비둘기소식’이라고 적혀있었고 나는 그 간판을 초등학교 때부터 오가며 봐왔다. 사실 이름은 소식지이지만 3면 정도 지나면 소식이라기보다 광고가 전부이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이 소식지로 오만가지를 사고팔고, 일도 구하고, 누군가의 죽음과 누군가의 잔치를 전한다. 나는 짧게 숨을 훅 내뱉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이덕구입니다.”


사무실 반 이상은 배포를 기다리는 소식지가 한가득 쌓여있었고 엄마 나이 또래의 여자 한 사람 있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엄마나이의 그 여자가 나른한 목소리로 누군가를 불렀다.


“편집장님, 손님 오셨네요.”


뒤이어 사무실 한 켠에 나 있는 어떤 문에서 풍채 좋은 남자가 배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를 떨어내며 나오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오, 잘 왔네. 순미 아들래미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이름을 그렇게 부르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그는 소파로 나를 데려가더니 부채를 빠르게 부쳐대며 말했다.


“순미한테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네? 기억은 안 나도 어렸을 때는 더러 봤을 것 같은데? 순미가 고생했네, 혼자서 이리 아들 키우고. 니가 엄마한테 효도해야겠다, 그치? 이름이 뭐라고?”


“이덕구입니다.”


이 동네에서는 그리 낯선 일도 아니건만 일로 만난 사이에 대뜸 반말을 들으니 기분이 영 좋지 않다.

그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무언가를 뒤적이다, 소파 테이블 위 안경을 찾아 쓴 뒤에 쪽지에 적힌 메모를 읽더니 내게 말했다.


“들어보니까 지금 좀 쉬는 중이라고 그러던데, 내가 사진 찍을 일 필요할 때마다 종종 연락할 테니까 그때마다 일 좀 도와주고 그래라. 돈은 내가 일 끝나면 그날 바로 주는 방식으로 하고. 이번에 부른 건 내일 저기 건조식품가공센터 그거 기공식이 있는데 행사 사진 좀 몇 장 찍고, 거기 윗사람들 오면 그 사진도 몇 개 찍고, 사람들 모여있는 것 좀 찍고 그러면 되겠다. 알았지? 센터는 공심약국 알지? 거기 맞은편이니까 내일 9시까지 와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얼마를 주실 거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고 더는 편집장이라는 이와 이야기를 끌고 싶지도 않았다.우리는 그렇게 짧게 대화를 마치고 나는 사무실을 빠져나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카메라를 챙겨 들고 일찍 집을 나서는데 802호 남자가 쪼그려 앉아 현관문을 닦고 있었다.

화학실험실에서나 쓸 법한 고글, 세제보다는 약품이 더 어울릴 듯한 각종 유리병, 색깔도 다양한 많은 종류의 수세미까지 한 켠에 챙겨두고서 검은 고무장갑을 낀 채로 열심히 현관문을 닦고 있었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도 인사를 건네는가 싶더니 불현듯 내 카메라 가방에 그의 시선이 머문다.


“아, 이거 카메라요.”


나는 그가 묻지도 않은 대답을 하고는 잠시 머쓱해져 있는데 그의 눈이 잠시 커지는가 싶더니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대충 웃어 보이고는 다시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한 뒤에 서둘러 행사장으로 향했다. 아르바이트를 가며 생각해 보니 어제 엄마에게 목재상 연락처를 하나 받았는데 주고 나올 걸 그랬다. 봐서 이따 저녁 무렵에 건네줘야겠다.



그날 번 돈으로 저녁에 엄마와 항정살을 구워 먹고 방에 들어와 바로 옷을 챙겨입었다. 802호의 말마따나 인사도 제대로 나누기 전에 목재상 연락처를 묻는 것을 보면 꽤 급할 수도 있으니 우연히 만나는 것보다 직접 가서 초인종을 눌러 연락처를 건네야겠다는 생각은, 핑계다.


궁금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의 모습은 어떠할지 한창 이삿짐 정리로 어수선한 집안은 또 어떠한지, 쓱 들여다보고 싶었다.


802호 초인종을 눌렀다. 나는 한 번 더 누르려다 그냥 기다렸다. 얼마 안 있어 안에서 802호가 물었다.


“누구세요?”

“아, 저 옆집 803호입니다. 목재상 연락처...”

나는 말끝을 흐렸다. 잠시 후 그가 문을 열었다. 자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고 잘 시간도 아닌데 집안은 켜 놓은 불 하나 없이 캄캄했다. 그저 베란다를 통해 넘어 들어오는 불빛만 어슴푸레 집안을 밝히고 있었다.

그의 집안을 훔쳐보는 것을 들킨 것 같아 나는 얼른 시선을 거두고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연락처가 없어서 이렇게 손으로 써서 드려요. 목재상 연락처인데 이 동네에는 이 집이 제일 물건이 많다고...”

“아, 감사합니다. 하하”


그가 웃었다. 첫날은 상황이 그래서 그랬는지 까칠해 보였는데 저번 엘리베이터 앞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웃는 얼굴이, 뭐랄까, 제법 잘 다듬어져 있다.


“그럼...”

나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나를 멈춰세웠다.

“저기, 괜찮으시면 잠깐 들어오시겠어요. 집이 어수선하긴 한데.”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잠시, 낯선 사람이 같이 가자고 하면 절대 가서는 안 된다는 그 익숙한 명제를 떠올렸으나 나는 어른이고, 게다가 한번 들어가 보고 싶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웃으며 현관문을 잡은 채 몸을 한쪽으로 비켜서며 내게 길을 터 주었다. 나는 그렇게 조심스레 802호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일부러 불을 끄신 건가요, 아님 두꺼비집이 내려간 건가요?”


나는 이리저리 쌓인 이삿짐 박스를 헤집고 들어가며 스위치를 찾았다. 갑자기 으스스한 생각이 들어 여차하면 불이라도 켜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스위치 가까이로 다가서자 그가 다급하게 외쳤다.


“불 켜지 마세요!”


나는 깜짝 놀라 손을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아 그게...죄송해요. 놀라셨죠. 조금 있으면 눈도 적응해서 잘 보이실테니 기다려주세요. 잠시만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그가 냉장고를 열자 다른 음식은 없고 죄다 콜라와 물뿐이었다. 나는 순간 더 머물 것 없이 얼른 나가야겠다 싶어 괜찮다 말하려고 그에게 다가서다, 벽면 한쪽에 자리한 장식장을 발견하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어...이건...”


나는 놀라며 이끌리듯 장식장 앞에 섰다. 가로 5칸, 세로 5칸의 장식장에는 칸마다 검은색 가방과 함께 렌즈의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내가 한때 너무나도 갖고 싶었던 클래식 단렌즈 시리즈는 물론이고 고가에 부담스러워 꿈조차 못 꾸던 프라임급의 씨네렌즈까지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장식장 위에는 렌즈 부자를 입증하는 듯, 디렉터스 뷰 파인더가 놓였있었다.


“이건 디렉터스 뷰 파인더네요? 와...혹시 영화쪽 일 하세요?”


나도 모르게 그를 향한 질문이 튀어나왔고, 그는 한손에 콜라 한 캔을 든 채로 어둠을 뚫고 내게 서서히 걸어왔다. 잠시 넋이 나간 내 앞에 그가 마주 섰고 그는 콜라를 건네며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건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비밀로 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의 표정에 정신이 번뜩해져 잔뜩 몸이 굳은 채 침만 꼴깍 삼켰다.


(3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