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같잖은 새끼가 만날 때마다 진짜, 아흐, 개 같은 놈.”
점심 약속이 있다며 기분 좋게 나서던 편집장이 오후 2시가 훌쩍 넘어서야 사무실로 들어서며 뇌까렸다. 편집장의 눈치를 살피던 김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하 사장이 또 뭐라고 그래요?”
“사장은 무슨 사장이야! 유 회장 심부름꾼 바지사장 주제에. 지가 뭔데 나더러 그래서 소식지가 발전이 없다느니, 어쨌네 저쨌네 아주 지랄이야, 지랄이.
어? 지가 내 사장도 아니고, 지가 실으라는 소식을 안 실으면 우리 소식지가 수준이 떨어지는 거야? 무슨 언론의 언 자도 모르는 새끼가 어디서 훈계야, 훈계가. 진짜 생각할수록 같잖은 새끼가. 에이. 나 장 씨네 들렸다가 바로 퇴근한다. 잘들 마무리하고 들어들 가.”
편집장은 김 실장이 물어봐준 덕분에 한바탕 쏟아낸 뒤 오는 걸음을 돌려 그대로 다시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사무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고, 나는 편집장이 그렇게까지 열을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멍해졌다.
김 실장이 그런 나를 보았는지 내 쪽으로 의자를 돌려앉으며 말했다.
“늘 그런 건 아닌데 하 사장 만나고 오면 저럴 때 있어.”
“하 사장이 누군데요?”
“하명재라고, 여기 유 회장 일 봐주는 사람인데 유 회장 측근이다보니까 사람들이 하 사장한테도 깍듯하게 하고 그러거든. 그래서 그런가 그 인간이 가끔 지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지껄이다 사람 속을 긁어놓을 때가 있나 보더라. 나도 하 사장이랑 제대로 이야기 나눠본 적은 없어.”
“유 회장은 누군데요?”
내 질문에 김 실장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뒤이어 뜬금없이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어머. 너 홍영 사람 맞니? 어떻게 유 회장을 몰라 하하하하하”
이름도 아니고 ‘유 회장’이라고만 들었을 뿐인데 그조차도 바로 알아들었어야 했나 싶어 나는 공연히 빈정상했다. 내 표정이 뾰로통해졌는지 고개를 젖혀가며 웃던 김 실장이 웃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아하하. 미안하다. 하긴 너 또래는 관심이 없으면 들을 기회도 없겠다. 아마 홍영 출신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일걸. 원래 검사였는데 국회의원도 좀 했어. 지역구가 홍영이었는데, 3선 출마하네 어쩌네 하다가 갑자기 정계 은퇴하더니 여기 내려와서 산 지는 벌써 몇 년 됐을걸. 사모님이 암인가 뭔가 그래서 공기 좋은데 와서 산다고 여기로 내려왔다더라. 나도 다 들은거야. 별명이 홍영 대통령이라고, 아마 너네 엄마는 아실 거다.”
“왜 별명이 홍영 대통령이에요? 국회의원일 때 일 많이 했어요?”
“그건 나도 모르겠고, 돈이 많아. 여기 웬만하게 괜찮은 땅하고 건물은 다 그 양반 거라더라. 사실인지는 나도 모르는데, 아무튼 돈이 많아서 그렇게들 불러.”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오랜 시간 이웃으로 지내며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작은 도시에도 이런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가 한 고장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이만하면 내 삶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할 때마다 불쑥 마주하게 되는 부유한 삶들에 대해 듣게 되면, 작게 만족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같아 괜히 그들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아무래도 몰라도 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이 대리야, 우리도 오늘은 인쇄 서둘러서 넘기고 퇴근하자.”
김 실장은 들뜬 뒷모습으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잘됐다. 오늘 저녁 비번이라며 진우로부터 같이 밥 먹자며 연락이 왔었는데, 녀석 출근하기 전에 여유 있게 만날 수 있겠다.
“덕구! 여기!”
식당에 들어서니 진우가 먼저 와 있었다. 청바지에 짙은 갈색의 피케티셔츠를 입은 편안한 그의 차림을 보니 제복을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가깝게 느껴졌다.
“많이 기다렸냐?”
내 말에 진우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데 밥만 먹고 들어가야겠다. 무슨 시간 맞추기가 이렇게 어렵냐, 어렵게 봤는데 아쉽네.”
우리는 사이좋게 짬뽕 한 그릇씩을 시키고 탕수육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우리는 그동안 놓쳤던 서로의 시간을 묻고 답했다가 각자가 기억하는 서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얼마 시간이 되지 않아 따끈한 짬뽕과 바삭하게 잘 튀겨진 탕수육이 한데 차려졌고 진우가 맛있겠다며 첫 젓가락을 집어 입으로 짬뽕면을 후루룩 말아 넣는 것을 보며 문득 은옥 아주머니 일은 어떻게 마무리된 것인지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웃고 떠드는 자리에서 진우에게는 분명 일 이야기가 될 것이 뻔한 은옥 아주머니 일을 묻는 것이 미안해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말을 고르다 가벼운 목소리로 진우에게 물었다.
“경찰서는 별일 없고?”
진우는 내가 은옥 아주머니 일을 묻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들었냐? 세차장?”
진우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두 눈만 끔뻑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 모르는구나. 와아, 나 오늘 새벽에 완전히 식겁했어. 또 사람 죽는 줄 알고.”
마지막 덧붙인 말에 진우는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새벽 5시경에 신고가 들어온 거야. 신고자가 고속도로 빠지려고 세차장 앞을 지나가는데 셀프 세차장에 사람이 쓰러져있는데 죽은 것 같다는 거야. 차를 몰고 가면서 봐서 확실하진 않은데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고 막 그러는 거야. 너도 알지? 톨 게이트 빠지기 전에 있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셀프 세차장.
그래서 출동 가서 보니까 진짜 문짝 4개가 전부 활짝 열려있고, 왼쪽 뒷문 쪽에 사람이 쓰러져 있더라고. 아, 진짜 이런 말 좀 뭐하지만, 무섭더라. 그래서 가까이 가서 보니까 다행히 죽은 건 아니고 기절했는데, 살펴보니까 어디 맞은 흔적도 없고 그렇더라고.
좀 있다가 구급차도 와서 병원으로 옮겼는데 의식 되찾고 이것저것 물으니까 뭐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긴 괜찮대. 왜 쓰러져 계셨느냐, 혹시 누구한테 맞았느냐 물으니까 아니래. 원래 이렇대. 그러면서 집에 가겠다는 거야.”
진우는 오늘 새벽일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두어 차례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와아, 누구는 식겁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너무 멀쩡해서 억울하더라니까. 그런데 너도 아는 사람이야.”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진우는 앞에 놓인 물잔을 바라보며 씨익 웃더니 시선을 내게로 옮기며 말했다.
“박춘수.”
뜬금없이 이렇듯 또다시 듣게 된 그의 이름에 나는 반문도 못한 채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표정에 진우는 무안해졌는지 다소 의아하다는 듯 내게 말했다.
“어? 생각보다 안 놀라네.”
“아, 아냐. 그런데 나 그 사람 잘은 몰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튀어나왔다. 생각해 보면 거짓말도 아니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내 말에 진우는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도 말만 들었지, 본 건 처음이었거든. 그런데 나는 처음에 우리하고 나이 차이가 안 나는가 보다 했는데, 서른여덟이더라. 말투도 완전 서울 사람이고. 얼굴이 막 잘생긴 건 아닌데 어디 가면 튀기는 하겠더라. 스타일도 좋고 그래서. 차도 좋은 것 같던데. 여기 혼자 내려왔다던데.”
진우가 박춘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외지인 박춘수를 향한 홍영 사람들의 관심이 허울은 아닌 듯싶다. 사실 박춘수는 몰랐겠지만, 그간 박춘수를 두고 아파트 사람들의 말이 많았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 박춘수만 이를 모르고 있다.
예컨대 얼마 전에는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 아파트 앞 편의점 파라솔 벤치에 군복을 입은 백인들이 앉아 음료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영과 옆도시 사이 즈음에 미군 부대가 하나 있는데 그렇게 가끔 군인들이 외출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날도 편의점 파라솔에 미군 네 명이 모여앉아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지 미간을 찌푸려가며 콜라도 털어 넣었다가 담배도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 점심 무렵인지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제법 많았고 편의점 옆으로 난 울타리 바로 뒤가 아파트 놀이터라서 가족 단위로 나온 이들도 꽤 있었다.
나는 단골 빵집에서 크림빵이나 살 요량으로 아파트를 나서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박춘수가 아침부터 어디를 다녀오는지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이었다. 밖에서 우연히 만난 것은 오랜만이라 나는 걸음을 부지런히 하여 그에게 가까이 가서 아는 체를 하려는데 순간 박춘수가 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그 미군들 앞에 섰다.
마침 미군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었는지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났는데 박춘수가 그들 앞을 가로막듯 서더니 꿈쩍도 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 보았다. 난데없는 긴장감에 나는 물론이고 지나가던 사람들도 흘긋거리며 박춘수를 보기 시작했고 길 건너편 상점에서는 좋은 구경이라도 난 듯 하던 일을 멈추고 박춘수 쪽을 바라보고 선 사람들도 있었다.
길을 막아선 박춘수가 불쾌했는지 미군 하나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박춘수를 향해 무어라 말하자 박춘수가 입을 열었다.
“방금 버린 담배꽁초,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박춘수의 말을 못 알아들었는지 그 넷은 서로 눈빛을 나누며 어깨를 몇 번 으쓱하더니 박춘수를 돌아 자기들 길을 가려고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미군들이 머물렀던 자리에 담배 꽁초가 한가득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그때였다. 박춘수가 자리를 뜨려는 미군을 불러세우며 다시 말했다.
“한국말 못합니까?”
박춘수가 재차 말을 거는 것이 불편했는지 그중 두엇이 짜증스럽게 박춘수에게 몇 마디를 건네며 돌아서는 순간 박춘수가 말했다.
“I am quite certain I did say to you gentlemen, ..."
나는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말에 미군 넷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말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 하얀 피케셔츠, 빳빳하게 다려진 하얀색 반바지와 새 신발인 듯 빛나는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박춘수의 모습이 그 순간 반짝였다.
그의 발음은 영화 속에서나 보던 콜린 퍼스의 억양같았고, 그의 말투와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던 미군들도 멈칫하게 할 만큼 극적이고 교양이 넘쳤다. 영어와 담쌓은 지 오래된 나이지만 그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네 명 중 한 명이 박춘수를 향해 돌아서며 무어라 말을 건넸고, 박춘수는 여느 때처럼 미동조차 없이 그에 응수했다. 박춘수가 그들이 어지럽게 떨어뜨리고 간 담배꽁초를 가리켰고, 미군들은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그중 하나가 몸을 숙여 꽁초를 집어 들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가려는 미군들을 향해 박춘수는 무어라 몇 마디를 더 했고, 다른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미군 넷은 번갈아 가며 마뜩찮은 표정으로 ‘apologies’라 박춘수에게 건네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미군들이 그렇게 돌아간 뒤에야 박춘수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는 사실을 그는 정말 전혀 모르는듯한 얼굴이었고, 그저 내가 반가웠는지 내 등을 가볍게 다독이며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공연히 그와 내게로 쏠리는 시선에 무안해서 서둘러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빵집으로 향했다.
사실 박춘수의 크고 작은 일상은 아파트 사람들 사이에서 종종 뉴스 기사처럼 나돌곤 했다.
아파트 주민들이 오동나무로 만든 기다란 각목 100여 개가 사다리차를 타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지켜본 이후, 아파트를 드나들며 만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도대체 그게 무엇에 쓰는 물건일지 갑론을박하기에 바빴다.
또 한번은 아파트 인근에서 석면 지붕 철거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마땅한 가림막도 없이 철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박춘수가 공사장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는 기어이 군청의 환경과 공무원을 공사장으로 불러와, 또다시 본인만 모르는 채 많은 사람의 관심 속에서 공사를 중단시켰으며, 가림막을 설치한 이후에야 공사가 재개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박춘수가 사실은 국정원 직원이라는 둥, 눈 밖에 난 재벌가 혼외자식이라는 둥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를 박춘수는 전혀 하나도 알지 못했다.
“아무튼 홍영에는 왜 왔는지 몰라, 연고도 없다면서.”
진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우리들의 대화는 박춘수로 마무리됐다. 식당 앞에서 다음에 보자며 진우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고 생각하니, 정작 한 번쯤은 물어봐야지 했던 은옥 아줌마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타살로 결론이 난 것이라면 지역뉴스에라도 소식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들려오는 이야기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어디에도 은옥 아줌마 이야기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죽집이 보였다. 혹시 박춘수에게 내가 모르는 지병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경찰에게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변고를 당했던 것일까. 본인만 모른 채 이래저래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살지만 정작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나는 죽집에 들러 전복죽을 1인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소식지에 제대로 취업한 후 따로 장어구이를 못 사줬다. 어차피 박춘수는 모르니, 이렇게 전복죽으로 대신해야겠다.
집으로 가려다 802호 앞에 섰다. 벨을 누르자 잠시 후 그가 현관문을 연다.
“응? 연락도 없이 왜. 들어와.”
“아니요, 이것만 드리려고. 죽이에요. 오늘 새벽에 응급실 갔었다면서요.”
박춘수는 빙긋 웃어보이더니 길을 내 주었다.
“무슨 맛으로 혼자 먹냐. 들어와. 넌 밥 먹었냐?”
나는 못 이기는 척 집으로 들어갔다. 그 많은 오동나무 각목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대신 나무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뭐하고 계셨어요?”
“아, 뭐 좀 만드느라. 앉아.”
에어컨을 틀어놨는데도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셔츠 등 뒤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대접에 죽을 옮겨 담더니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어 회의 테이블에 위에 밥상을 차렸다.
“맛있겠네, 고맙다, 잘 먹을게.”
다행히 죽은 아직 따뜻했고, 박춘수는 배가 고팠는지 후후 불어 한 숟가락씩 야무지게 잘도 먹었다.
“어디 아픈 데 있으세요?”
내 물음에 박춘수가 고개를 들더니 나를 향해 웃어보이며 말했다.
“너 좋은 놈이야.”
난데없는 말에 무안해진 나는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박춘수는 죽을 한 숟가락 뜨더니 한참을 오물거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차하다가 그랬어. 예전에도 그런 적 있어.”
“세차하다가 누구한테 맞았어요?”
내 말에 박춘수의 웃음보가 터졌다. 바른 자세로 고개를 젖힌 채 한참을 웃던 그가 표정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하하하,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하하. 내가 청소를 좋아해. 세차도 그렇고. 원래 어제 7시 정도에 나갔다가 두 시간만 하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시간이 그렇게 됐네. 하하하. 덕분에 한참 웃었다.”
어제 저녁 7시에 나갔다면 아무리 못해도 일곱 시간 넘게 세차를 했다는 뜻인데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차 한 대 닦는데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데 박춘수가 앉은 뒤편으로 늘어선 유리병들이 보였다.
땀은 흘렸지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의 옷차림도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지난번 저 유리병들은 청소할 때 쓰는 것이라던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처음으로 박춘수가 그저 유별나고 평범한 이웃으로 보였다. 박춘수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몰라도 그 역시 사람이었다. 불행이 어느 날 예고 없이 닥쳐오더라도 일상은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내려 애쓰는 것이, 사람이니까.
박춘수는 배가 고팠는지 순식간에 죽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와, 덕분에 잘 먹었다. 심지어 비싼 전복죽을 사왔어. 고맙다. 뭔가 자꾸 얻어먹는 기분이네.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 날 정해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춘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이제보니까 나 오늘 새벽에 병원간 건 어떻게 알았냐?”
“아, 그 어제 병원에 모시고 간 경찰이 제 친구예요. 저번에 한번 보셨을텐데. 오늘 같이 저녁 먹었거든요. 한번 보자고 했었는데 오늘 저녁에 잠깐 시간이 맞아서.”
내 말에 박춘수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기억을 더듬는지 한참을 말이 없다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 그렇네. 내가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어제 병원에서 나오는데 뭔가 낯이 익은 얼굴이다 싶더니 그랬구나. 뭐, 별다른 말은 없고?”
박춘수도 내가 그랬듯 은옥 아주머니 일을 그렇게 에둘러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박춘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어진 눈으로 말이 없었다.
은옥 아주머니와 별다른 인연도 없는 그가 아주머니 일에 신경쓰는 것이 한편으로는 어색했지만 그간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돌아보면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은옥 아주머니 가게에서 보았던 이용선이 어두운 시각에 그에게 찾아와 돌아가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하지 않았던가.
“덕구야, 내가 오늘 병원에 누워있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그가 한참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네 친구라는 경찰 말야. 그 친구가 통화하는 걸 들었어. 내가 의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긴 했는데 주의를 기울이니 들리더라. 뭐, 확실하지는 않은데, 그게 은옥 아주머니 이야기인 것 같더라.”
심장 박동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무엇을 듣게 될지 몰라 두려웠다. 자살도, 그렇다고 타살도 아니기를 바랬다. 그러려면 아주머니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아주머니는 그렇지 않다.
“내가 들은 말은 이거야. 검찰 송치가 이루어질 거다, 피해자가 무연고자이고 용의자도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지금은 인정하는 모양새라서 마무리가 생각보다 빨라질 것 같다. 뭐 그런 식이었어.”
이 작은 도시에서 살해를 당한 무연고자라면 그건 은옥 아주머니 사건이 맞을 것이다. 도대체 누가, 왜 아주머니를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런데 덕구야.”
박춘수는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는지 내 눈을 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이상하게...말하기 조심스럽지만...타살이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렇게 용의자 찾기가 간단하고, 따져볼 것 없이 확실한 살인사건이었으면, 왜 지금에서야 드러나는 거지. 이상하지 않냐?”
박춘수의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지난번 병원 앞에서 만났던 진우의 말이 떠올랐다.
‘다들 너무 적극적이라니까. 갑자기.’
(12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