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악마는 말끔한 양복을 입고 나타난다, 늘.

by 안녕마나

“자, 그럼 인사들 나누셨으니 이제 시청 소속 담당 주무관님들과 우리 관련 공공기관에서 나오신 두 과장님께서는 담당 분과로 이동하시어 자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개를 마친 네 사람은 김선영 과장의 말에 따라 각기 담당 분과로 향했다. 한국도시계획공사에서 왔다는 그 괴이한 눈빛의 사내도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그는 걸어오는 중간에 미래산업분과 위원 중 누군가와 눈을 맞추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 오던 걸음으로 박춘수와 편집장이 앉아있는 동네활력분과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그 사내의 기분 나쁜 눈빛과 행여 마주칠까봐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박춘수를 살폈다. 그런데, 박춘수가 굳어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하고 고요했던 그의 얼굴에 지금껏 보지 못한 낯선 감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사내가 박춘수와 점점 가까워올수록 그의 눈동자는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 남자가 박춘수를 알아볼 법한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박춘수는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 사내는 그런 박춘수를 못 본 듯 했다. 편집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십니까, 매일홍영, 그러니까 여기 홍영 지역소식지 대표 고만덕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도시계획공사 중부지사 권세진 과장입니다. 반갑습니다.”

권세진이라는 자의 뒤편으로 시청 담당 주무관이 뒤따랐고, 그 주무관은 허리를 숙여 동네활력분과 위원들을 향해 살피듯 시선을 빙 둘러가며 우선 눈인사를 건넸다. 편집장이 그렇게 일어나서 악수를 청하는 바람에 다른 위원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권세진을 바라보는 박춘수의 그 낯선 표정 때문이었는지, 나는 권세진이라는 사내가 박춘수와 가까워질수록 공연히 긴장되어 턱에 힘을 잔뜩 주었다. 드디어 권세진이 박춘수 앞에 섰고, 박춘수는 애써 표정을 고르고 눌러 담아 권세진을 향해 똑바로 마주 서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춘수입니다.”

“…어!”

위원들을 향해 기계적으로 인사를 건네던 그 권세진 과장이라는 자가 나지막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런 권세진을 향해 박춘수는 침착하게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가 결코 권세진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반면 박춘수를 알아보고 환히 웃는 권세진의 얼굴은 유난히 작은 그의 눈동자 탓이었는지 어딘지 섬뜩하여 나는 어깨를 옹송그렸다.

박춘수를 향한 권세진의 반응에 다른 위원들의 눈길이 일제히 쏠렸다. 권세진도 이를 의식했는지 하려던 말을 거두고 박춘수와 악수를 한 뒤, 다음 사람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권세진 과장이 박춘수의 맞은편 즈음에 자리를 잡았고, 이재우 주무관도 뒤이어 자리를 잡으려다 분과 테이블 곁에 앉아있던 우리를 발견했다.

“여기 두 분은…”

내가 답을 하려 목소리를 가다듬는 사이 편집장이 치고 들어왔다.

“아, 저희 매일홍영에서 온 이덕구 대리, 고보영 주임입니다. 저희가 매일홍영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여기 위원님들하고 관계자분들께 인사드린다고 왔습니다.”

서둘러 말을 마친 편집장이 내게 눈짓했다.

“아, 안녕하세요, 매일홍영에서 지역소식 취재를 맡은 이덕구 대리입니다.”

“안녕하세요, 매일홍영에서 편집을 담당하는 고보영 주임입니다.”

“아, 네네, 반갑습니다.”

이재우 주무관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우리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 앉으며 위원들을 향해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아, 먼저 반갑습니다. 오늘 행사 준비해 주신 총무과에서 제게 분과 회의 진행을 부탁하셔서요. 매번 제가 이렇게 하는 건 아니고, 오늘 이 자리에서 분과위원장이 선출되면 그분께서 회의 진행을 하시게 됩니다. 다음 회의부터 저는 간사 자격으로 참석하게 됩니다. 그럼, 뭐 방금 서로 악수로 통성명은 했지만 여기 위원님들께서는 서로 아시는 분도 계시고 처음 만나신 분도 계실 테니 이쪽부터 차례로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재우 주무관이 자신의 오른편에 앉은 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목을 받은 남자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여유를 찾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운곡시장 상인회 회장 김원재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를 시작으로 권세진 과장과 이재우 주무관을 제외한 이들의 자기소개가 차례로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전통차 거리 번영회장 조숙영입니다.”

“어허허허, 매일홍영 고만덕 편집장입니다.”

“3기에서 새롭게 뵈니 더 반갑습니다. BH개발 하재명 사장입니다.”

일전에 편집장이 ‘별 같잖은 새끼’라고 욕했던 자가 아마도 저 하재명 사장인 모양이었다. 하 사장을 보니 문득 홍영대통령 유 회장을 모르느냐며 내게 놀란 눈으로 묻던 김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여기까지 자기소개를 마친 이 네 사람은 사실 서로 아는 눈치였다. 비단, 이 넷끼리만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같은 회의실을 사용하는 미래산업분과와 동네활력분과 위원들은 행사 시작 전 서로의 자리를 바삐 오가며 인사를 나누느라 한참이나 부산했다. 사실 이재우 주무관도 이들 네 명과는 구면인 듯했으나 굳이 자기소개를 시킨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한 사람 때문이었다. 박춘수. 그의 차례가 되자 박춘수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회의시작 전, 그를 향한 권세진 과장의 놀라는 반응도 이 분위기에 일조했겠으나, 행복군민위원회 발족식부터 줄곧 이목을 끌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 순간 나는 박춘수에 대해 이리저리 돌려가며 묻던 편집장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 혹은 기대와 달리 편집장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허리를 기댄 채 게슴츠레 뜬 눈으로 박춘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박춘수입니다.”

“아, …위원님 따로 소속은 없으십니까?”

이재우 주무관의 물음에 박춘수는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없습니다.”

“아이고, 너무 겸손하신 거 아닙니까?”

권세진 과장이 깍지 낀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테이블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환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의 등장이 박춘수는 달갑지 않았는지 순간 어금니를 꾹 깨문 턱 주변이 움찔거리는 모습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여기 박춘수 위원님은 저희 한국도시계획공사에 계시던 제 선배님이세요. 여기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뭐, 회사 내에서도 능력 인정받으시던 분이셨고요.올봄에 그만두신 뒤로는 소식을 몰랐는데 여기에서 이렇게 뵈니 반갑네요. 저랑 한 팀에 계셨었어요. 하하하”

권세진 과장의 말에 고만덕 편집장을 제외한 이재우 주무관과 나머지 세 사람이 사뭇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그제야 나는 박춘수의 노트북에서 보았던 한국도시계획공사라는 이름의 폴더를 떠올렸다. 그 안에 ‘홍영_평가심의’라는 파일도 함께 기억났다. 혹 박춘수가 공사에서 했던 일이 홍영과 관련이 있었나 하고, 생각이 드는 찰나, 권세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너무 겸손하셔서 제가 주제넘게 끼어 들어봤습니다, 하하하.”

호탕하게 웃어 보이려는 권세진 과장의 의도와 달리 그는 웃음소리만 낼 뿐 그의 얼굴은 기묘하게도 무표정했다. 권세진의 말에 박춘수는 별말이 없었다. 다만 어느 순간에도 늘 침착했던 그도 이번 상황만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멋쩍은 미소로 고개만 살짝 한번 끄덕여 권세진의 말에 긍정했다.

“네, 그럼 자기소개가 끝났으니, 아까 김선영 과장님께서 안내해 주신대로 분과위원장 선출이 있겠습니다. 지난 기수에는 우리 하재명 사장님께서 수고해 주셨는데요, 뭐 따로 조례에 분과위원장에 대해 정해진 바가 없고 의사 진행을 위한 역할인 만큼 따로 연임에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 사장님 포함하여 여기 계신 분들 모두 분과위원장 희망할 수 있으십니다. 자진하실 분 계실까요?”

이재우 주무관이 위원들을 차례로 바라보았고 하재명 사장이라는 자가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따로 희망하시는 분이 없으시면 이번에도 제가 하지요, 뭐.”

지금껏 늘 그래왔었는지 하재명 사장의 말에 이견을 내는 이는 없었다. 박춘수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저도 한번 해 보고 싶습니다.”

박춘수의 말에 위원들은 의아하다는 듯 그를 돌아보았고, 하재명 사장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이재우 주무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 어, 이렇게 되면. 음. 나머지 세 분만 괜찮으시면 거수로 결정하시지요.”

“그런데 박 위원님은 홍영 사정을 좀 아십니까?”

하재명 사장이 초조했는지 선제공격에 나섰다.

“여기 주민이 된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쪽 도시개발 관련이면 좀 압니다.”

권세진 과장이 박춘수가 분과위원장에 나서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앞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 박춘수를 도와준 셈이 되었다. 홍영 도시개발이면 좀 안다는 그의 말이 과거 한국도시계획공사에서 일했었다는 이력 덕에 꽤 무게가 실렸기 때문이다.

“뭐, 저기 도시계획공사에 계실 때 업무 경험이 좀 있으신가 본데, 이게 또 외지인이 보는 것하고, 여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보는 것하고는 좀 다를 수 있지요.”

하재명 사장은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마땅히 끼어들 틈을 보지 못하던 이재우 주무관은 하재명 사장과 박춘수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다,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두 분 모두 열의가 있으셔서 보기 좋네요, 하하. 그럼 나머지 세 분 의견을 좀 들어보는 게 좋겠네요. 그냥 거수로 하기에는 세 분 의견도 있으실 테니.”

이재우 주무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편집장이 날쌔게 말을 받았다.

“아, 제 생각을 먼저 말씀드리면, 물론 여기 박 위원님도 뭐 공사에서 경험을 가지고는 계시겠지만. 지금 여기 이재우 주무관님 비롯해서 군에서 노력으로 도시개발에 필요한 국비를 따지 않았습니까? 그간 사정을 아는 분이 의사 진행을 해 주시면 아무래도 회의가 더욱 원활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는 하 사장님께서 이번에도 맡아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 위원님, 서운해 마시고 허허.”

편집장의 말에 권세진 과장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는데 그가 슬쩍 박춘수의 표정을 살피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럼 우리 김원재 회장님과 조숙영 회장님께서도 의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호명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더니 난처한 표정으로 양보인 양 상대에게 미루다 결국 조숙영 회장에게로 발언 순서가 넘어갔다.

“저는, 뭐. 하 사장님 그간 잘 진행해 주셔서 좋긴 한데. 여기 새로운 위원님이 오셨으니까 한번 맡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아까 그, 공사에도 계셨다고 하니까.”

조숙영 회장은 말을 마치고 애써 하재명 사장의 시선을 피했다. 하 사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는 못했다. 조숙영 회장의 선택으로 모든 부담은 김원재 회장에게로 갔다. 그는 이럴 줄 몰랐다는 듯이 허탈하게 몇 번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말하는 건데 그랬습니다. 괜히 난처하네요, 이거. 허허허”

그의 말에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어른들이 으레 곤란할 때면 뱉어내는 그렇고 그런 웃음이었다. 고심하는 표정으로 잠시 말이 없던 김원재 회장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도 새로 오신 분께 기회를 좀 드려보고 싶네요. 우리 하 사장님 그간 고생하셨으니까, 이번에는 좀 쉬시고. 하하하”

하재명 회장의 어색하게 웃는 얼굴 위로 분하다는 속내가 숨길 수 없이 스쳐 지나갔고, 박춘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위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경험 많으신 하 사장님께도 종종 여쭈겠습니다.”

박춘수가 하 사장에게 무언가를 물을 것이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하 사장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박춘수의 인사에도 그는 그저 떨떠름하게 웃으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재우 주무관은 잠시 뻘쭘한 표정으로 앉아있다가 재빨리 진행을 서둘렀다.

“아, 네 그럼 이번 동네활력분과장은 박춘수 위원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쉬는 시간 가지셨다가 대회의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가?”

다급하게 일어나는 나를 고보영이 붙잡았다.

“아, 화장실.”

공연히 긴장한 탓에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다. 쉬는 시간에 박춘수와 권세진이 무슨 이야기라도 나눌 것 같아 이를 못 보게 되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곧장 눈 앞에 보이는 화장실로 내달리려다 아무래도 큰 볼일을 보게 될 것 같아 사람이 별로 없을 위층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도착한 화장실 칸으로 미끄러지듯 쏙 들어가서 바지춤을 내리려는데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조숙영이야 생각 없는 여편네라 치고, 김원재까지 왜 그러는거야!”

하 사장 목소리였다. 편집장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하 사장, 분과장하는 일이라는 게 그냥 회의 진행이잖아. 그리고 위원들이 그 나이 어린 외지인 편을 들고 나설 리도 없고. 박춘수가 하 사장 따돌리려고 그러는 것도 아닐테고.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시게.”

“고 대표님, 정말 그게 그냥 회의 진행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회의 진행이라는 게 누구 말을 자르고, 누구 말을 들을지 결정하는 거예요. 그게은근히 영향력이 있다고요. 괜히 유 회장님이 분과장 신경 쓰시는 것 같으세요?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러세요? 김원재 회장이 불안 불안하다 했더니, 생각 없는 조숙영하고 기어이 일을 치네.”

“…아직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니까. 나중에 다 같이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좀 해 두면 되지.”

편집장의 말에 하 사장은 기분이 조금 풀렸는지 목소리가 다소누그러졌다.

“고 대표님, 위원들도 위원들인데 그 권세진 과장이라는 사람은 저번에 그 본사 부장들이랑 밥 먹을 때 왔던 사람이 아닌 것 같던데.”

“아니야, 왔었지. 그때 이후로 중부지사 발령 나고 이번에 온 것 같은데.”

“그래요? 기억에 없는데.”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그때 우리 맞은편 끝자리에 앉아있던 대리였던 것 같애, 어렴풋하게인사 나눈 기억이 있어.”

“그럼 뭐, 중부지사로 온 뒤 처음이니까 잘됐네. 식사 자리 한번 잡는 것 좀 도와주세요.”

“내가?”

“네, 부탁 좀 드릴게요. 아무튼, 저 박춘수인지 뭔지 허튼짓 못 하게 신경 좀 잘 써 주세요.”

편집장은 별말이 없었다. 고개만 끄덕였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하 사장은 편집장의 대답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뱉고 있다는 점이었다. 말 모양새야 분명 존대를 하고 있었지만 어째 말하는 투가 영 공손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 사장은 그렇게 화장실을 나섰는지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화장실 밖으로 멀어졌고, 잠시 후 편집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별 같잖은 쥐새끼. 하이고! 진짜 어디 상전 잘 만나서 어디서 명령질이야, 명령질이!”

그를 볼 수는 없었지만. 이리저리 목을 돌려가며 눈을 부라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후 그도 화장실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고 한참동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는 볼일 보는 것도 잊고 슬며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아랫배 통증은 더 큰 긴장감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행여 화장실에 있었던 것이 누구에게라도 들킬까 봐 아무도 없는 화장실을 까치발로 슬금슬금 빠져나왔다.


“다 들었냐?”


(수요일, 17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