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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히어로, 불안이

올 해의 숨은 공로자

by 여름
?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MjAyNDA2MjBfMTUz%2FMDAxNzE4ODM0OTE3NTYx.QcjIOiMZ23QNVTRbqEKLuqDz2erexlBJ4Xw2GPIbM6Yg.vlzsYPlCM42wQhys5tdin1WAyfI1M-2BglKQSRKVYfUg.PNG%2Fimage.png&type=sc960_832 네이버 이미지 출처


불안아...안녕. 나는 너를 좋아하는 한국 팬이야. 너는 미국 캐릭터니까 내 편지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요즘은 기깔나는 통번역 어플이 있으니까 내 글들을 잘 해석해 줄거라 믿어. 너는 내 마음 속에 늘 자리잡고 있었지. 나는 너와 슬픔이를 365중에 366일을 품고 사는 사람이야. 때때로 사람들이 나를 예민하다고 폄하할 때도 있었지만, 너희 덕분에 나는 다행이다 싶은 순간이 올 해 참 많았단다.

연말이면 티비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있어. 아마 미국에서도 하겠지? "이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시겠습니까?" 스포츠, 연예대상, 영화제에서 주로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묻는 말이야.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대답을 하기도 하고, 몇몇은 집에서 수상 소감을 적어서 달달 외워오기도 하더라. 나도 이런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했는데, 너(불안)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고 말해야할 것 같아.


그 이유를 내가 이제 적어볼게. 잘 읽어봐줘. 나는 아들이 있어. 아이는 2월 생이고, 입춘이 다 지나가는 밤에 낳았지. 하지만 입춘이라는 포근한 절기의 느낌과는 다르게, 아이가 태어나고 난 자주 불안했어. 애써 그 마음을 지우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더라. 조금만 걱정하면 사람들이 나더러 예민하다고 하니까 일부러 더 내색 안했던 거 같아.

그런데 말이야. 올 해 초에 영유아 검진을 받으면서 아이가 말이 느리다는 걸 알게 됐어. 동네 소아과 의사는 심각하게 말했지. 아이는 말 할 수 있는 단어가 너무 적었고, 말을 잘 못하니까 불편한 상황에서 침을 뱉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여러가지 모양으로 저항을 했어. 나도 애도 시한 폭탄같이 속에 불을 언제나 장전하고 살았어. 나는 애를 처음 기르거든. 내 안에 있는 불안이가 이 아이 안에도 있구나. 단순히 생각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늦은건가?하는 자책을 하기 시작했어. 나는 24개월이 될 때까지 미디어를 보여주지도 않았고, 책도 많이 읽어줬고, 아이에게 말도 많이 걸었어.

그런데 아이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더라고. 내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야.


의사는 의뢰서를 써줬고, 내가 소아과에 갈 때마다 물어봤어. 처음에 나는 좀 기다려보려고 했거든.

그런데 의사가 매번 물어보는거야~ 어머니 병원 예약하셨어요? 라고 말이지. 결국, 우리는 대학병원에 가서 60만원이 넘는 검사를 했어. 어~~엄청 비싸더라. 그리고 검사선생님들의 갸웃한 고갯짓과 애매한 눈빛에 난 이미 결과를 아는 것만 같았어.

결과는 4개월 지연이었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애는 정상인데, 엄마가 예민한 케이스가 나처럼 온다고. 지금 언어치료를 하면 빨리 늘 수 있는데, 엄마가 기다리고 싶으면 이 정도는 좀 기다려도 된다고.

우와!!!!다행이었어. 한편으로는 안심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네가 나에게 말해줬던 거 같아.

"빨리 병원 알아보고 당장 시작해! 언어치료!" 나는 병원을 리스트업하고 걸어서 갈 수 있는 병원을 예약 잡아서 상담을 받았어. 그리고 바로 그 다음주부터 치료를 시작했지. 병원비가 비쌌어. 그런데말야.

애가 거짓말처럼 말을 하기 시작하더라. 처음엔 단어만, 그 다음엔 문장으로, 그 다음엔 자기 표현을...그렇게 조금 느리고 어색하지만 '말'이란 걸 하더라고. 신기했어! 그리고 너한테 고마웠어.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조금 더 망설였을텐데, 네가 내 안에 확 타오르는 무언가를 던져 주었거든.


이걸로 끝이었으면 좋겠는데 하하. 너는 두 번째 공로가 있어. 이번에도 우리 아들 얘기야. 얘는 태어나고 100일쯤 돼서 사경인 걸 알았거든. 남들은 애들 고개가 다 그렇다는거야. 목에 힘이 생겨서 시간 지나면

괜찮아진대.

그런데 네가 마음 속에서 말하더라. "얼른 네이버 맘카페에 사경 검색해봐~ 병원 알아봐~" 자칫 망설였으면, 내가 골든 타임을 놓칠 뻔했지. 그렇게 어린 애를 데리고 봄에서 가을까지 병원을 다녔어. 집에서 내가 스트레칭을 하루에 3번 20분씩 해 줬지. 곤욕이었어. 먹는 시간, 자는 시간, 소화시키는 시간 빼면 운동할 시간이 생각보다 없거든. 그리고 애가 태어난 그 해 가을에야 그게 끝났어. 나는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 같아. 이제 해방이야! 하면서 말이지.

그런데 올 해 어린이집 사진을 어느 날 보니까, 우리 애만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거야. 자세 때문인가도 싶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전력이 있잖아. 걱정이 돼서 나는 다시 병원을 예약했지. 이번에도 니가 부추긴 예감이 맞았어.

다행히 척추는 곧아서 걱정 안해도 된다더라. 그런데, 내가 부모교육을 받아서 아이를 다시 집에서 운동 시켜야한대. 아이구, 저 강아지같은 놈을 내가 어째야하나. 강아지 중에서도 말 안듣는 비글같은 놈인데...

걱정이 먼저 앞섰어.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아빠가 출근할 때 같이 병원으로 갔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오는 여정을 하고 있지.

애는 운동을 진짜로 안 하려고 해. 매일 마이쮸로 꼬시면서 살살 달래며 간신히 하고 있어. 그래도 네 덕에 더 늦지 않게 잘 가서 올 해 안에 중요한 지점들을 유연하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불안이 너에 대해서 나쁘게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특히 한국에서는 부정적이라던가, 예민하다던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던가...하면서 너의 공로를 우습게 여기지. 하지만 나는 알아. 네가 있어서 나는 늘 덜 후회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억지로 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잘 키우고 있는건가' 자잘하게 달려오는 불안이 내 아들을 더 세심하게 돌보게 하고, '이렇게 살다간 바보가 될 거 같다' 는 불안이 나를 책읽게 만들고 글쓰기 모임에도 들어오게 했어. '이렇게 혈당이 오르다가는 당뇨가 올지 몰라!'라는 불안이 이 추운 날에도 나를 만보씩 걷게 만들지. 밝고 환하고 긍정적인 감정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란다.

너도 너의 역할이 있고, 장점이 있어. 그러니까 너무 움츠러 들지마.


그래서 결론은 뭐냐면, 나는 올 해의 공로상을 너에게 주려고 해. 금값이 비싸서 무거운 트로피는 줄 수 없지만, 할머니가 될 때까지 잔잔하고 귀여운 불안이 너를 잘 껴안아주는 주인이 될게. 그거 하나는 약속할 수 있어.

내 마음 속에서 오래도록 살면서 나 때문에 더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지?

그래도 우리 둘이 같이 헤쳐나가면서 여기까지 무사히 왔어. 연말이라는 거짓말같은 시간이 오기까지.

새해가 되어도 우리는 퍼펙트 콤비로 살아나가는거야.

2025년, 탈이 많고 힘들어서 세세하게 다 적을 수도 없던 내 365일에, 366일동안 쉬지 않고 초과로 일해줘서 고마워.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우리 새해에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자.

그럼 이만 줄일게. 안녕.



사랑과 존경을 담아. 너의 친구 HJ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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