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맞이하기 전에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것
<재테크를 못해서 가계부를 씁니다>
나의 가계부는 소소하게 미혼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저 다이어리에 그날 쓴 돈은 적어두는 것 정도로,
어떤 날에 누구를 만나 이런 돈을 썼다. 하는 기록용으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혼을 하니, 돈을 제대로 모은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가계부.
하지만 나는 돈의 속성도 모르고, 흐름도 모르며 수 개념또한 약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30만원으로 한 달 식비 아껴보기, 집정돈해서 돈 아끼기와 같은 꿀팁 유튜브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살림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나에게 그것은 너무도 재미가 없는 노동에 불과했다. 그런 노력이 흐려질 무렵 임신과 출산으로 엑셀 가계부를 다시 시작했다.
처음에는 열의가 넘쳐서 써댔지만 그 열정은 곧 사그라들었다. 그저 빵꾸만 나지 않게 사는 것, 신용카드를 되도록 쓰지 않고 마이너스 통장을 뚫지 않는 것으로 목표를 바꿨다.
우리는 공무원 외벌이. 한 해에 월급 오르는 폭이 너무 작다. 물론 방학이라는 이점이 있지만, 방학에 식비와 생활비가 더 들어서 여행 같은 건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내가 나가서 일하는 것을 고민 안 해 본 건 아니다. 아이가 기관에 다니기 시작하고 시아버지께서 아프시면서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결론은 포기. 나가서 일하면, 적어도 아이가 아플 때 도와줄 그 누구 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나에겐 그런 한 사람이 없다. (수업을 제끼고 달려와 줄 남편이 있긴 하지만...불가능에 가깝다.) 다시 사회에 나가서 일할 자신이 없는 건 둘째치고, 막상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니 너무 자주 아팠다. 아이를 기르며 소아과를 이렇게 많이 다녀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과장이 아니다. 그래서 당장은 일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것이 가계부였다. 2024년 10월부터 가계부를 쓰기 시작해서 2025년 12월까지 썼다. 2026년 새해가 되면서 흐릿해지다가 며칠 전에 가계부를 새로 샀다. 작년에 다이소에서 산 가계부가 마음에 들어 다시 구입을 했는데, 열어보니 구성이 달랐다. 한 달의 예산을 짜는 부분이 사라져서 옛날 가계부를 오려 함께 쓰고 있다. 오랜만에 지난 가계부를 열어보니 우리집에서 쓰는 고정비용, 식비, 교통비, 생필품비...기타 등등의 예산과 실사용 내용이 빽빽히 적혀있었다.
매달 시작에는 집밥하기! (무너질 확률이 높은 무모한 결심)와 물건 안 사기!(되도록 지켰던 것 같음) 등의 느낌표를 붙인 굳은 다짐이 꼭 적혀 있었다.(왜 무섭게 빨간 색으로 적고 그래...) 그러다가 작년 5월에 대출받은 일에 대해 적은 메모를 발견했다.
우리가 몇 년후에 들어갈 아파트의 계약금이 모자라 작년 봄에 대출을 받았었다.
계약금 정도는 가지고 있는게 인지상정이지만 우리에게 그런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금을 팔고 (지금 너무 올라서 눈물이 난다.) 보증금에서 남아 묶어둔 예금을 해지하고 우리가 모은 돈을 더했다. 그런데도 천만원이 모자랐다. 남편 직장에서 빌려주는 신생아 대출이 금리가 쌌다. 그걸로 남은 돈을 충당하고 간신히 계약금을 냈다. 아직 갚아야 할 대출은 어마어마한데도 계약한 집이 벌써 내 집인것 같아서 기뻤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 천만원에 대한 대출은 매달 남편의 월급에서 원금과 이자를 더해 미리 돈을 빼가고 나머지를 입금해 주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꼭 대출상환금액이 빠진만큼 생활비가 모자랐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를 살리려고 했는지, 그럴 때마다 아무 내색 안 했는데도 시어머니께서 밥 사먹어 사이좋게 지내~하트 (하트를 꼭 보내심 ㅎㅎ) 라는 메시지와 함께 십만원 어떤 달은 이십만원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빵꾸가 나서 꿰메야하는 타이밍에 계속 구멍이 나지 않고 버텼다.
그렇게 작년 봄의 대출은 올해로 넘어왔고, 공교롭게도 아니 아주 운이 좋게도 남편의 상여금에서 2만원 정도가 모자란만큼 남아있었다. 어른들께 설 용돈을 좀 크게 드리고, 5년이나 지난 내 핸드폰도 바꾸고 싶고, 온 가족 봄옷도 사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적금을 깨서 양가 설 용돈으로 채우고, 남편의 상여금에 몇 만원을 보태어 남아있던 대출을 모두 상환했다. 10개월 만이었다. 상반기를 목표로 했는데 넉달을 아꼈다. 나는 지난 금요일, 그 대출을 떠나보내며 울었다. 남편은 어쩐지 무덤덤했지만, 나는 가계부를 더 꼼꼼하게 쓰겠다고 다짐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흐름에 빠르지 못하고 수에 약한 내가, 돈을 제대로 모으지도 않고 무작정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내가, 사회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더이상 아닌 내가, 밉고 원망스러웠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서 주식도 모르고 재테크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가계부 쓰기였다. 무지출의 날에 기뻐하고, 네이버 페이로 결제한 물건의 상품평을 쓰며 포인트를 모으고, 신용카드(각자 하나씩 있지만)는 내게 없는 것처럼 살아왔다. 찰랑찰랑 예산을 윗도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 구간에서는 브레이크를 밟고,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닐 때는 과감히 질끈 눈을 감았다. 멋과 취향을 좀 포기하고 아이 옷도 많이 물려입혔다. 그리고 이런 나를 응원이라도 하듯이, 시어머니께서 종종 용돈을 주시고 쌍둥이를 키우는 친구가 매 분기마다 장난감과 옷 신발을 택배로 보내주었다.
계획과 통제 안에서 수에 능통해야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면에서 끝도 없이 부족한 나도 어찌저찌 살아가고 있다. 물론 재테크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자신이 없고 여유도 없어서 망설이고 있을 뿐이지만... 솔직히 푼돈을 모으고 당장 일하지 않는 현실에 답답한 날들이 있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하는 한수희 작가가 생활인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희망을 가졌다. 1년에 한 번 여행을 가기 위해 적금을 들고, 남보기에 작고 모자란 것 같아도 내 생활을 내 삶의 규격에 맞게 꾸려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멋진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빛깔이 있다. 올 해는 다이소에서 가성비를 위해 가계부를 샀지만, 내년에는 내 마음에 쏙 드는 예쁜 가계부를 사야겠다.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와 숫자로 적혀지는 나의 생활. 그것은 내가 매일 적는 다이어리만큼이나 귀하다. 또, 원한다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삶의 궤적이다. 나는 가계부를 사랑한다. 그리고 숫자에 약한 나도 인정한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벌써 행복을 선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자신이 '사랑하는 그 무엇 하나'를 이어나가기를 소망한다. 올 봄에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