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아있는 키자니아입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을 때

by 여름

되돌아보건대, 20대 중반부터 일을 시작해서 중간에 수험생활을 건너뛰고 30대 중후반까지 나는 키자니아였다. 살아있는 키자니아. 키자니아가 뭐인가 하면 아이들이 직업 체험을 하는 곳이다. 나는 가 본적이 아직 없지만, 지나온 내 10년은 키자니아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그럼 본격적으로 나의 키자니아에서 나는 어떤 직업으로 살았는지 이야기해야겠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가진 직업은 청소년센터 간사였다. 그 곳은 지역사회와 기업이 함께 후원을 하면서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기업이 경영상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더이상 후원을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나는 세 달 월급을 받지 못하고 친구에게 빚을 지고, 엄마에게 돈을 빌려서 캐나다 워홀을 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업을 찾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은행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다른 은행은 다니는 친구가 있어서 모르는 걸 물어볼 수 있었고 내 실수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던지. 나는 돈 개념도 없고, 나이도 적지 않았던 터라 은행에 재취업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돈 세는 손도 느리고, 손님에게 유연하게 대처할 줄 몰라서 사실 은행에서 바보 취급을 당했다. 그 곳에서 유일하게 바보가 아니었던 순간은 외국인 손님이 왔을 때, 어버버하지 않고 워홀에서 배워온 영어로 응대를 한 10분 남짓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왔으면 혼내줬을텐데...)


그리고 엄마의 지인 권유로 나는 보험회사에 잠시 다녔다. (은행이나 보험이나 다 금융 아니냐면서...말도 안 되는 설득이지만 넘어갔다.) 처음에는 보험 계약을 따는 게 어려울테니, 몇 달만 버티면 새로운 보험설계사를 모집할 때 교육을 하는 교육직으로 옮겨준다는 구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친구도 만나고 아는 어른들도 만나서 보험을 분석하고 보험을 권하고 계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아줌마들의 생계를 위한 몸부림에 나같은 쪼랩은 버티기 힘들었다. 그리고 실적만을 강요하는 지점장에게 질리고, 약속을 지켜줄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마음이 바스라져서 도망치듯이 보험회사를 나왔다.


그렇게 눈물과 회환의 금융권 생활을 끝내고나니 당장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원서는 죽죽 떨어졌으며, 나를 원하는 곳은 없었다. 그러다가 동네 영어학원에 취직했다. 원장은 좀 철이 없어보이는 애엄마였는데, 그렇게나 자신의 사생활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나는 미혼의 20대 끝자락.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원장이 월급을 밀리지 않고 입금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나는 대단히 잘 가르치고 매력있는 강사는 아니었지만, 원장이 적어도 믿을 수 있는 강사였다. 수업을 펑크내지 않았고, 시험기간에는 쥐꼬리만한 돈을 주는 걸 받고도 나와서 강의 자료를 만들고 아이들 보충수업도 해주었다. 놀랍게도 나중에 다른 학교에 가려고 서류를 떼어보니, 원장은 나를 교육청에 강사등록조차 하지 않아서 내 경력은 물경력이라 이력서에 쓸 수도 없었다. (젠장, 욕하고 가실게요.) 그런데도 원장은 (입만 살아서) 늘 나를 신임한다며 자기가 강의를 할 테니(무슨 실력으로...) 나더러 바지 부원장을 해서 학부모 상담을 하라고 적극 권유했다. 모든 강사들이 떠나고 학원이 변해 갈 때 나만이 오롯이 남아있었다. 그 적은 월급에도. 그 놈의 정때문에.


그러다가 제주도에 갔다. 이번에는 4개 학교를 순회하는 영어회화강사였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수업을 했다. 다행히 좋은 분들을 만나서 기틀을 잡을 수 있었고, 일전에 학원에서 강의를 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말이 4개 학교지...각 학교에서 적게는 2개 학년 많게는 4개 학년을 담당하며 수행평가를 보고 시험문제를 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도 아이들이 순수하고 예뻐서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자, 이제는 자리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어놓았던 돈으로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아는 사람들과 함께 시작했는데 다 공무원이 되었고 나는 이명이 들리는 귀와 허리디스크가 악화된 가운데 개같이 망했다. 공부했던 책을 버리던 날 정리하며 나는 광광 울었다. 정말로...삼십대 중반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니 눈물만 남더라. 하지만, 망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교촌 치킨은 시켜 먹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다시 의지가 불끈 솟아서 서귀포의 한 도시재생 센터의 직원으로 취직했다. 이것도 물론 계약직....아이들과 청소년 담당으로 행사 기획을 돕고, 마을 사람들의 선진화?를 위하여 강의를 돕고 나쁘게 말하면 뒤치다꺼리를 엄청나게했다.

그리고 코끼리같이 큰 몸집으로 다이어트를 매일 하면서 개까칠한 회계 여자에게

해정씨!!!!!!!!!!!!!!!!!!!!!!!!!!!!!!!!하면서 불려다니는 일이 매일 이어졌다.

이유가 뭔 줄 아는가? 이런거다. 아니~ 여기 영수증을 이렇게 풀을 많이 뭍혀서 붙이면 어떡해! 내가 뗄 수가 없자나!

약간 헐렁하게 붙이면 떨어진다고 지랄, 조금 더 세게 붙이면 뗄 수 없다고 난리...

아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를 추어야 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더럽고도 힘든 나날들 가운데, 아는 작가님이 라디오 작가 시험을 보라고 했다. 현장 시험인데 내가 갈 수 없다고 하니 온라인으로 시험을 보라는거다! 온라이인?? 오 좋은데?

평소에 긴장도가 높은 나같은 인간에게 적합한 일이었다. 드디어 시험 당일, 주제를 주고 정해진 시간 안에 원고를 써서 이메일로 보내야하는 것이었다. 나말고 다른 지원자는 이미 현장 시험을 치렀고 나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는거다. 피디가 너무 피곤해서 나랑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떨어진 줄 알고 풀이 죽었는데, 다음날 연락이 와서 다시 한 번 시간을 잡고 시험을 보자고 했다. 전 날에는 떨렸지만, 그래 떨어질테면 떨어져라! 하고 원고를 써 내려갔다. 결과는 합격! (차라리 공무원에 붙었음 얼마나 좋아 그치?)


나는 도시재생센터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려운 점도 많고 실수도 내내 있어서 눈치밥을 엄청 먹었다. 물론 사람들은 대단히 다정했고 나이스했지만, 그렇다고 내 실수가 없어지는 일은 없었으니 나이 먹고 이 정도도 못하냐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라디오 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엄마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이모! 아줌마! 저기요! 아가씨! 나를 부르는 말은 참으로 많았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다양했다.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일할 아가씨가 아닌 것 같은데...(이런 곳은 우리 엄마 식당인데 불만있냐! 아가씨로 봐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말했고 누군가는 음식이 맛없고 아줌마(나) 인상이 별로라고 타박했다.

하....지금까지 경험한 키자니아 중에서 가장 적성에 맞지 않는 일자리였다. 바로 서비스업. 그렇게 라디오 작가와 식당종업원의 이중 스파이 생활을 마치고 육지(경기도)로 올라와서 나는 초등학교 영어전담 선생님이 되었다. 이것도 물론 계약직이었지만, 학교라는 테두리와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은행 다닐 때, 아가씨 얼굴이 기분 나빠서 이거 못하겠어! 하던 모녀와 같은 사람들에 비하면 고상하고 개념있는 사람들과 지내는 나날이었다. 그 이후 나는 결혼을 하고 아줌마가 되었다.


차례대로 한 번 써 볼까?

청소년 센터 간사 - 워홀러 피시앤칩스 및 커피집알바 - 계약직 은행원 - 보험설계사- 영어학원 강사 -

초등학교 영어회화 강사 - 공무원 수험생 - 도시재생센터 직원 - 라디오 작가 - 초등영어전담교사 -

아줌마로 정착

이렇게 10년동안 수험생활 2년 남짓을 포함하며 나는 열 한가지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나는 한 직장에서 10년 이상 근무를 하고, 막 30년씩 일하면서 퇴직하시는 분들이 너무나도 존경스럽다. 이렇게 힘든 일을 견디고 버텨내서 자신을 일구고 자식을 기르고 생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감탄이 나온다.

나는 미련하다시피 융통성이 없는 인간이라서, 무슨 일이 한 가지 주어지면 버벅대지만 그것을 누가 그만두게 할 때까지는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직업에서는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 내가 하고 싶어도 늘 쫓겨나는 입장이라서 직장인의 비애라던가, 고충, 쓸쓸함, 더러움 같은 걸 모른다. 단지, 계약직의 서러움, 차별, 눈치밥 이런 부분에서는 전문가다. 내 친구들은 교사, 은행원, 직장인, 엄마, 네일아트 사장님 기타 등등으로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을 일해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철새와 같은 인간이다.


작은 박스 속에서 그 세상이 다 인줄 알고 시키는 공부만 하고, 너는 이런게 어울려라는 말만 믿다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이리저리 떠도는 모래알처럼 살아가는 모범생. 그 사람(나)은 자신이 낄 곳 없는 세상에서 울다가, 어느 시점에는 포기를 하고,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했다. 그리고 더이상 스스로를 못나서 세상에 끼어들지 못한 사람으로 바라보지 않고, 생긴 것(무탈해보임)에 비해 다양한 경험이 많은 아줌마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멀쩡한 꼴을 하고 일터에서 오래도록 일한다해도 그 안에 한량이 숨어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처럼 모범생의 삶을 살다가 어머 걔가? 설마 ? 라는 의문을 띠게 만들며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아직도 나에게는 바다보다 넓은 편견과 승승장구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시기심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편견과 아집에 가득찬 내가 지나온 시간을 통해서 얻은 한 가지 장점이 있다. 누군가를 쉬이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재밌는 연애, 신나는 청춘, 짜릿한 이야기가 없는 슴슴한 곰국같은 내 인생에 글로 쓸만한 일들이 많아졌다.


다 지났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적어도 어쩔 수 없었으니까. 라고 나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제대로 노력도 하지 않은 주제에 자기 연민에 빠졌다고 욕해도 할 수 없다. 돌아가더라도 나는 그 선택을 했을 것이고, 망할 때 망하고 떨어질 때 떨어질게 뻔하다. 그래서 그게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 남들이 뭐라건, 그러거나 말거나 어쩌라고! 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몇 살이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이란 것은 사실 정형화된 모양이 없다고.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말고 어떤 길을 지나는 중이든 더 좋은 일이 있을거라고 응원하고 싶다.

오십이 되어서 다시 이 글을 읽는다면, 웃기고 자빠졌네. 지가 뭘 안다고. 할 수도 있겠지. 그 때에 그러더라도, 그래도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응원한다고. 격려한다고. 당신은 소중하다고.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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