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이 어때서요?
나는 자타공인 스트라이프 쳐돌이다. 30대까지만 해도 기본으로 네이비, 빨강(가끔), 검정 (흰 바탕에 검정줄/ 검은 바탕에 흰 줄 두 가지 버전), 연한 하늘색 스트라이프 티셔츠들이 늘 있었다.
아이를 가져서는 네이비, 초록 줄무늬의 스트라이프를 입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봄이 오자 좀 밝은 걸 입을 심산으로 기본 검정에 연보라색, 연하늘색을 추가로 샀다. 하지만 나는 밝은 옷에 금세 지쳐버렸다. 기가 빠지는 느낌이랄까? 억지로 밝아보이려고 입는 옷같아서 손이 잘 가지 않았다. 출산 후 살이 빠지지 않기도 했지만 묘하게 밝은 분위기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결국 어찌됐느냐 ! 동생과 엄마께 모두 다 흘러가게 되었다.
최근에 쇼핑을 다녀온 것은 어제인데, 이것은 나의 스트레스가 감당 이상이라서 다녀온 것이다. 친정엄마가 다녀가시는 일정에 일이 생겨 못 들르는 집이 생겼다. (나는 삼남매다 모두 할머니를 기다리는 짹짹이들이 집마다 있다.) 이로 인해 약간의 트러블이 난 것인데 남편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양보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는 가뜩이나 마음 부대끼는 나를 자극했다. 우리 식구가 살아온 히스토리에 감춰진 각자의 서운함이 있다. 평소와 다르게 튀어오른 불씨를 남편이 온전히 납득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끝내 나와 싸웠다.
우리 남편은 King T 오브 King T 로 하지 말아야 할 말(선을 넘는 카테고리의 말)을 팩트라면 하고야 마는 요상한 고집이 있다. 그래서 싸울 일까지는 아니었는데 일이 커져버렸다. 교회를 다녀오고 낮잠을 자다가 나 먼저 일어나 밖에 나가 걸으니, 남편의 입장도 일부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중요한 건 뭐다? 내 기분! 도서관에서 예약도서를 찾고 우리집에서 30분 거리의 스타필드를 걸어서 갔다. 매번 가는 길이 아니라, 공원을 둘러갔던 길을 기억해냈다. 마음이 들쑤셔진 나는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평온히 주말 오후를 즐기는 걸 눈에 담았다. 그러니 조금 진정하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하이라이트! 나는 무엇을 쇼핑했는가? 나는 어떤 색깔을 골랐을까? 당연히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을 골랐다.
엄마가 계실 시간 동안 함께 구경을 다녀왔고 눈으로 찜 해둔 옷들을 입어보았다.
세 벌은 스트라이프, 세 벌은 골지 무지 티.
스트라이프는 흰 바탕에 연한 그레이, 연한 코코아, 마지막으로 검은 줄무늬를 골랐다. 무지골지티는 약간 탁한 그레이, 오프화이트 (쨍한 하얀색이 아니라서 더러 때 탄 하얀색처럼 보일 수 있음 주의요망), 탁한 코발트 블루를 선택했다.
나열해 놓은 것만 보아도 어 좀 어두운데? 싶은 색깔이다. 하지만, 나의 겉옷(카키, 검정, 연베이지)을 생각하면 안에 받쳐입을 옷으로 이보다 더 좋은 컬러조합은 없다. 셔츠는 멋쟁이 아이템이라 좋아하지만, 아이가 어린 나같은 사람에게는 사치다. 그래서 그저 면이 보드랍고 색이 좀 어두워 아이가 뭘 뭍혀도 크게 티나지 않는 선에서 옷을 고르게 된다.
내 옷행거에는 누가 입어도 딱히 부담스럽지 않은 색깔의 옷들이 걸려있다. 화이트, 블랙, 네이비, 연한 코코아색, 탁한 코발트 블루, 헤더그레이(아주 연해서 연베이지와 헷갈리는 회색빛), 진하고 탁한 그레이.
누군가에게는 칙칙하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가을이 주는 약간의 무거움과 딱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색들이라 나에게는 세련된 색깔로 정의된다. 분명한 것을 좋아하고 성격이 불같은 나를 차분하고 무거운 컬러들이 잡아주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그래왔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마치 어제의 뿔난 황소같던 나를 여섯 벌의 티셔츠가 잠재워주었듯이 말이다.
나의 색깔들은 자신 자체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검정, 하양, 파랑) 다른 색과 더해져 조금 더 무겁게, 조금 더 가볍게 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검정에 작은 하얀 한방울은 겨울용 무겁고 세련된 그레이가 되고 검정에 하얀 어려 방울은 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는 사계절용 그레이가 된다. 고로, 단순히 칙칙하고 어두운 색이 아닌 것이다. 올 가을에는 카멜이 유행이라고 한다. 카멜 스웨이드. 허나, 나는 멋쟁이를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 나의 색깔들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들은 행거에서 내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다. 문자 그대로 아이를 키우며, 또 자주 비유적으로 아들같은 남편과 지내며 벌써 긴 연휴를 걱정하는 나! 내 색깔들에게 지혜를 구해야겠다.
내가 혹시 흥분하면 새로 산 옷을 입으라고 말해달라고.
내가 빨간 고구마가 되기 전에 너를 입고 불을 확 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내내 마음이 조금은 스산하고 쌀쌀해지는 가을과 겨울 동안에는 내 마음을 좀 지켜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