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주제를 받으면 무엇을 쓸지 머릿속에 금방 떠오르곤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 인생에 몰입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있었나 되돌아보니, 글로 풀어서 쓸만큼의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잠이 안 나와요." 하며 잠자기 싫어하는 아이 곁에서 조용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자리에 앉았다. 나에게는 세 번의 몰입이 있었다.
몰입하나- 데이트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걱정병자다. 돌다리도 세 번은 무슨, 삼십번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머리에서 궁리만 하다가 끝나는 일이 참으로 많은 인생을 산다. 당연히 청춘의 꽃인 연애는 나에게 너무나 어려운 과제. 20대에는 혼자 좋아하거나 나 좋다는 사람 밀어내다가 다 끝이 났다. 그리고 30살이 되어 제주도에서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내 생에 가장 많은 소개팅을 했지만 한 번도 연애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를 잡으려 공무원 공부를 했고 보기좋게 다 떨어졌다. 2년 반이 흘러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예쁘지 않은 외모에 30대 중반, 직업 없음, 돈 더 없음의 이력인 내가 연애를 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제주도에 놀러오신 은사님과 친구분들이 주선을 해 줘서 구남친 = 현남편을 제주-고양시 소개팅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애를 쓸 때는 썸하나 안되고 끝나더니, 놀랍게도 제주와 고양시를 오가며 우리는 연애를 했다. 한 달에 많으면 3번 적게는 1번을 만나며 돈과 시간을 써서 데이트를 했다. 제주 공항에 내가 마중을 나가면 남편이 해사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그리고 내가 김포공항에 나타나면 남편이 어딘가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기다렸다. 장소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살면서 제주도에서 못 가본 장소를 기반으로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1박2일 일정으로 오가니 우리에게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보고싶다고 달려와 갑자기 보거나 서프라이즈로 길을 나서기에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콩깍지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때 당시 가장 편한 마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내가 가진 것이 없으니, 상대가 가진 것이나 배경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됨됨이'를 보게 되었다. 이성인 누군가를 만나며 긴장감없이 편안히 좋은 감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험, 적어도 내게 처음이었다. 그래서 늘 몰입했고 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지금이야 일주일에 열 번을 싸우는 현실부부지만, 내게 사람관계의 따뜻한 몰입을 준 사람은 남편이 유일무이하다. 그래서 고맙고 미울때도 한 번은 참고 넘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몰입 둘 - 시험
큰 시험에 약하다. 수능시험, 공인시험, 공무원시험....무언가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시험을 보는 것이 당연하건만 나에게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나는 온갖 시험을 망하는 데에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긴장도가 높고 걱정이 많아서 실력을 되려 깎아먹고 오는 스타일이랄까!
그런 나에게도 아 이 시험은 참 느낌이 좋다.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영문과를 나왔음에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던 나는 (아직도 못함 , 더 못함) 캐나다로 워홀을 다녀왔다. 집에 사정이 생겨서 6개월 만에 돌아와서 취업을 해야했다. 과도 영문과인데다가 그때는 토익이 필수라서 꼭 토익 점수가 필요했다. 리딩만 간신히 공부를 하고, 그래도 감을 익힐 겸 시험장에 갔다. 나는 그 토요일에 처음 느꼈다. 아... 내가 다 이걸 알아듣고 문제를 풀고 있구나! 맞겠구나!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던 리스닝에서 약간의 실수를 제외하곤 많은 득점을 했다. 놀라웠다. 사람들이 말하던 귀가 뚫린다는 게 이런거구나...시험시간 내내 긴장보다는 이해하고 몰입하여 풀어내는 나를 경험했다. 그 이후로 또 모든 시험에서 걱정인형의 선두주자답게 제대로 잘 이뤄낸 적은 없지만, 이 한 번의 경험이 나에게는 탁월했다. 다만, 일찍 돌아온 것이 한이 될 정도로 한동안 울적했었다. 지금 이렇게 귀가 뚫리고 말을 하는 데에 편해졌는데...좀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말이다. 시간이 지났다. 다시 토익 시험을 볼 일이 있을까 싶다. 하지만, 그 때 집중했던 토요일 오전의 나! 그날 하루만큼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아직도 든다.
몰입 셋 - 글쓰기
인생 우여곡절이 없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여곡절이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되게 안 풀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오죽하면 친구가 한동안 멈춰있는 지경으로 보이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 주변에 진짜 잘 안 되는 사람이 둘 있는데, 그 둘 중에 하나가 너야." 잔인했지만 사실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울퉁불퉁 운도 없었는지 써봐야겠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봤다. 부모님이 원하셨다. 보기좋게 떨어졌다. 그리고 청소년 센터에 취직을 했다. 힘들었다. 지원을 하던 기업이 지원금을 끊어서 월급이 밀렸다. 센터는 문을 닫았고 나는 돈을 빌려 캐나다에 갔다. 캐나다에서 적응할무렵 집에 일이 생겼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오픈 티켓을 바꾸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은행에 계약직으로 취직했다. 3개월씩 3번 연장을 해줘서 9개월을 일했다. 1년을 일하면 챙겨줘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에 끊어서 계약을 했다. 은행에라도 취직해보고 싶어 자격증도 따고 원서도 넣었지만 떨어졌다.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영어학원에 취직했다. 그냥 했다. 그러다가 제주도에 갔다. 제주 서쪽에서 산간, 동쪽까지 총 4개의 학교를 순회하며 4개 학년을 가르치고 시험을 다 따로 내고 성적도 입력해줬다. 2년이 지났다. 그냥 제주에 살아야지 싶어서 때려치우고 공무원 공부를 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겼고, 엄마에게는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마음이 흔들리는 가운데 공부를 했다. 잘 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공부한 모두가 공무원이 되었고 나만 남았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책을 버렸다. 많이 울었다. 30대 중반이었다.
모두가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하고 적어도 직장에라도 오래다니는 시점이었다. 제주 시골에 처박혀서 이도저도 아닌 나는 다시 계약직 일을 구했다. 무시당하고 화날 일이 많았다. 공부를 좀 오래했더니, 나 스스로도 내가 부끄러워서 움츠러 들 때가 많았다. 독서모임의 ㅇㅁ씨가 라디오 작가를 구하는 곳이 있다고 했다. 계약직 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온라인으로 시험을 쳤다. 안 될줄 알았는데, 됐다. 한 주가 지나고 제주의 작은 교통방송 주말 작가일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20대 중반에 라디오 작가가 꿈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kbs 작가 아카데미를 다니기도 했는데, 방송계 작가언니들의 기에 눌려서 면접을 몇 번 보고 포기했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강사셨던 라디오 작가샘이 말했었다. 너는 글이 너무 착해. 착하면 재미가 없어. 이를 악물고 써 보기보단 나는 전문가 말이 맞겠지 싶어서 마음을 접었다.
그 이후로 10년이 지났고, 새끼 작가, 중간 작가, 메인 작가도 없이 나는 그냥 메인 작가되었다. 전임이 준 대본을 가지고 내용을 채워서 시작했다. 너무도 미숙했기에 피디님과 진행자가 고생했다. 하지만 늘 따뜻하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만해졌다. 코로나로 식당이 어려워 엄마는 종업원을 쓸 수 없었다. 엄마와 나 둘이서 식당을 꾸렸다. 평일에는 식당에 나가서 서빙을 했다. 원체 사람을 대하는 일에 에너지를 쏟기 싫어하는 나는 그 일이 고됐다. 관광객에 동네 사람들까지 과한 요구가 있던 날, 사람들이 몰려들어 점심도 먹지 못하고 일하던 날, 아무도 오지 않아서 시간만 때우던 날....그 날이 모두 괴로웠다. 그리고 소진됐다. 그런 내가 시간을 쪼개서 라디오 원고를 썼다. 주말에는 첫차를 타고 서쪽끝인 집에서 버스를 3번 갈아타고 9시 라디오에 갔다. 돈을 받으니 억지로 쓰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는 글쓰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라디오에 가서 예쁜 진행자의 목소리로 읽혀지는 내 원고를 들으며, 선곡을 즐기면 그 시간이 힐링이었다. 5일 간의 노동으로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해졌던 내가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식당 이모나 아줌마로 부르는 사람들에게 떨어져서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일 년 반 정도가 지나고 다시 올라와 학교로 돌아가 일을 하고 결혼을 해서 나의 작가 인생은 거기서 끝이 났다. 다시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다. 그 때의 나는 코너로 몰려서 몰입했었기에 더이상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20살부터 블로그를 열고 나혼자 글을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나는 운이 없어서 스스로도 괴롭고, 남이 봐도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였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고, 잠시나마 방송으로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다시 되돌아보니 20년 가까이 걸렸지만, 살아온 그 모든 순간의 몰입이 나의 꿈을 이뤄준 것은 틀림없다. 몰입이라는 것을 느슨하게 구겨넣기에는 매일 해야 할 잔잔바리가 많다. 시간을 달리는 아줌마로 살고 있는 지금, 켜켜이 쌓아올린 나의 몰입들이 새삼 고맙다. 그리고 유일하게 몰입하는 이 순간의 '차곡차곡' 또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