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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이와 브런치를

올 해의 맛집

by 여름

<란이와 브런치를>


만약에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마지막 음식으로 무엇을 먹을 생각인가요? 라고 묻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미식가에게는 그것이 참으로 고민이 될 일이지만, 나와 같은 막식가(막 먹는 사람)에게는 아주 간단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다.

"저는 신전떡볶이 착한맛이랑 교촌치킨 허니콤보를 먹을게요."라고 바로 대답할 수 있기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중한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어떤 '욕구'라는 것은 실생활을 하면서 조금은 뒤로 미뤄두어야한다. 엄마라는 포지션을 달고 난 후에 더욱 입맛이 무뎌진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아이와 함께 먹는 식사는 나를 1년 반 정도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게 만들었으니, 빨리 간단히 그리고 영양이 너무 빠지지 않게 먹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다. 간단히 먹는 식사에 전문가가 된 입장이면서, 집에서 가족영양을 책임지는 지위에 살아가고 있는 나!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남편의 조그마한 불만이나 아이의 "맛이 없어."라는 말 한마디에 주저앉아 울고만 싶은 내 마음을, 두 사람은 아마 모를거다. 식욕이 왕성하지 않고, 먹는 것에 대한 열의가 없는 사람에게 식사를 챙기는 일이 얼마나 괴로운지 말이다.


이렇게 저렇게 음식을 사기도 하고 외식을 하기도 하며 어느 날엔 김에 밥만 주는 날도 있다. 오늘 아침처럼 할 일은 많은데 아이를 빨리 데려와야 하는 날, '반찬신'이 강림하사 1시간 안에 후다닥 3가지 반찬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건 일 년에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렇게 바쁘게 에너지를 쏟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양말을 벗어던진 아이에게 고함을 질렀다가 가까스로 달래서 보냈다. 마음이 울적해서 터벅터벅 돌아온 내가 받은 주제는 '올 해의 맛집'.

올 해 내가 맛집에 가 본적이 있던가? 생각을 하다가 사진첩을 뒤지니 나에게는 몇 장의 브런치 사진이 있었다.


아이를 너무 바랐음에도 아이와 함께 하는 생활은 나에게 군대 전역을 기다리는 병장같은 기분이다. 분명히 사람들이 끝이 있다고 하는데, 그 끝이 매번 고비를 넘어서 갱신되어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맛집은 아이와 남편에게는 좀 미안한 말이지만 '아이와 남편 없이 남과 즐기는 식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올 해 친구들을 만나며 3번의 브런치를 먹은 사진들을 발견하고 그 중에 가장 맛있었던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란이는 나의 대학 동기이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지 않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다. 수요일 맥도날드가 점심 특가를 하는 날이면 란과 나는 수업 공강 시간에 지하철 역 근처로 내려가 꼭 빅맥세트를 시켜먹곤 했다. 날씬하진 않았어도 늘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은 여느 20대 대학생들처럼 우리는 중간에 들어간 빵을 '칼로리 약간 삭제'의 명목으로 빼고 먹곤 했다. 그렇게 빅맥을 먹고 학식을 먹던 우리는 내 결혼식을 마지막으로 보지 못하고 5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 친구와 식사 약속이 잡히면 보통 내가 검색을 하는 편이다. 그 이유는 내가 먼저 만나자고 청했기에,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한다는 나만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식사 장소는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뜨거운 것을 먹을 수 있는가(고기집, 곱창집,샤브샤브/ 아직 아이와 가기 위험한 장소) 혹은

둘째, 브런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브런치집은 의외로 노키즈존이 많고,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눈치가 보여 아이를 데리고 가본 적이 없다.)

이 정도의 큰 그림 아래에서 나의 검색이 시작된다. 한동안 브런치를 먹지 못한 내게, 11시 오픈이면서 둘이 만날 중간역에서 도보로 멀지 않은 식당은 더할나위 없이 퍼펙트였다. 들어서니 우리가 첫 손님이었고 찬찬히 메뉴를 훑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선택한 것은 훈제연어 오픈 샌드위치에 스크램블과 감자가 나오는 메뉴와 약간 매콤한 닭가슴살에 토마토와 치즈가 들어간 샌드위치였다. 약간 느끼한 것과 매콤한 것을 먹어주면 그 무엇보다 조합이 좋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씩 원하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라면 남편과 아이에게 먼저 식사를 양보하고 느즈막히 + 후다닥 먹는 나이지만, 이 날만큼은 친구와 식사가 나올 때까지 먼저 나온 커피를 마시며 그간의 안부를 나눴다. 그리고 식사가 나와서도 친구가 말을 그만 좀 하고 먹으라고 할 정도로 천천히,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식사를 했다. 평소에 훈제연어를 잘 먹지도 않는데도 이 날은 연어의 훈연된 향과 살짝 느끼한 소스, 루꼴라의 향긋함까지 모두 내 혀 밑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 매운 치킨 샌드위치는 부드럽고 풍부한 치즈향과 새콤한 토마토가 함께 해서 다시 오면 먹고 싶은 맛으로 기억되었다.


배가 천천히 불러오는 기분좋은 느낌을 느끼며, 내 혀의 미각이 살아있구나 인지함과 동시에, 서둘러서 먹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시간이 주어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나의 '홀로 맛집' 척도이다.

누군가는 이런 내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스타벅스나 체인 커피숍에 가면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데, 왜 굳이 친구를 만나서 여유롭게 먹어야 하냐고! 하지만, 그건 브런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다.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과 함께 묶어서 먹게 되는 한 끼, 줄어든 나의 소중한 식사를 어떻게 가짜 브런치로 대체할 수가 있느냐고 나는 오히려 항변하고 싶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는 시기를 거치는 중인 나에게, 브런치는 더이상 그냥 브런치가 아니다. '브런치'만은 그 장소에서 만들어 바로 신선하게 내어주는 식사이길 원한다. 공장에서 혹은 베이커샵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와 전자레인지에 띡-하고 데워주는 가짜 식사말고 말이다.


물론 나 혼자 브런치 식당에 가서 오롯이 먹고 싶은 날도 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체감상 비싸다 느끼는 식사를 혼자서 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을 먼저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전업주부의 생활 흔적이라고 받아들인다. 아이가 맛있어하고 먹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남편의 즐거운 얼굴을 보는 것 또한 소중한 맛집 척도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맛집과 가족과 함께 하는 맛집은 구분되어 있다.

브런치는 신선하고 여유롭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만나고 싶지만 자주 보지 못하는 등장인물이 있다면 그 진가를 더한다. 생생한 맛을 입으로 즐기는 동안, 덤으로 주어지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만날 수 있기에, 이 또한 내가 브런치를 사랑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들과 만나서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브런치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고 아이가 커서 말이 더 통하는 날, 우리 셋이 나란히 앉아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먹을 브런치도 기대한다.

아침과 점심이 이어지는 지금 이 시간, 글을 쓰며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린다. 더 많은 생생한 브런치를 내 입과 내 생으로 경험하기를 소망하면서. 그 일이 새해엔 더 많아지기를 여전히 마음 가득 담아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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