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부터 180까지
176
나만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냥 내가 안 되는거였다.
사람이든 운이든
나에게 와 준 것들이
내 친구에게는 평생 오지 않을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나보다 못하다고 속으로 가늠했던 이에게
생각보다 그 운이 빨리올 때
사실 속으로 애탔는데 아닌 척하면서
울음을 삼키던 못난 내가 있고
결전의 날에 온 몸이 굳어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던 내가 있고
불가능한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버스 정류장에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던 내가 있고
그 모든 조각들의 나는
지금의 내가 됐다.
스물 아홉 지독히도 풀리지 않던 모든 일이
서른이 되어서도 더 심하게 꼬였었다.
많은 조각들의 내가 모여도
그 캄캄한 시간들을 건널 여력이 없었다.
그 때 만난 사람들은 별과 같았지만
그 별도 새벽이 오면 지고
모두의 햇살 속에서 나만 그 별이 오는
밤을 기다리는 날들도 많았다.
무기력하게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똬리를 틀고 앉아 온 몸을 구겨가며 울어도
나에게는 일말의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어이없어 하면서도
얄궂은 인생의 낚아채기와
가끔은 후한 인생의 퍼주기가 공존하니
오늘 숨 붙어서 달력을 보고 또 살아간다.
무력하게 기다려보는 일들만이
너무 자신만만한 나를 희석시켜준다.
적어도 무력하게 울고 있는 누구 앞에서
쓸데없는 헛소리 펼치는
경박함을 보이지말라고
그 정도만해도
중한 사람구실하고 사는 거라고
신이 몰아세우는지도 모르겠다.
무지한 나를 깨우치려고,
저 양반이 진짜 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말이다.
177 -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어서
지금은 조금 힘든 시절을 지나는
사람들 곁에서 잘 머물러줘
시절은 또 돌아와서
어느 날 내가 힘들 때
또 그 사람들이
한 계절로 날 위로한다.
178
좋고 나쁨
옳고 그름
호감과 비호감
세상 많은 것들을
너무 둘로 나누지 말자.
불가능하기도 하고
의미없을 때도 많으니
애매모호하다고
욕하던 것들 중에
나도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마음으로 받은 것이 적지 않다.
싫어하던 말 중에
어른들의 사전 속에
다 사정이 있겠지
라는 예문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 한 줄의 문장을
나도 모르게 읊조리면
친구가 넌지시
도인이 됐네 웃지만,
사실 마음이 도를 닦아서
길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길만 보고 살다가
그 길이 막혀 억지로 다른 길에서
두려움에 떨었기에
정말로 누군가에게
오들거리며
추워서 달달 떠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어
하고
나는 덜 상처받도록
너를 더 이해하도록
무심히 업그레이드 되는 시기인지도.
179
쩔쩔매는 모습은
우습게 보일거라고
절절한 마음인 것이
그렇게 보였을 뿐인데
왜 그렇게 보이는 것만 보다가
보아야만 하는 것들을 놓쳤나
180
이건 마치 최종목적지로 가기 위해서
무언가를 여러 번 갈아타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온전히 내 짝이 될 사람을 만나
처음부터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바깥 풍경을 보며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또 어떤 이는 긴 시간 한 버스를 타고
마지막 정거장 바로 전에서
사고를 당해
어쩌지 못하는 마음으로 터덜터덜 걷다가 올라탄 택시에서
나를 기다린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버스와 훌륭한 세단이 지나가더라도
튼튼한 두 다리로 노상을 걷다가
남들 관심도 없는 작은 들꽃을 보는 당신에게
말 거는 이가 당신의 종착지가 되고
지칠 정도로 걷는 것을 좋아해
늘 걷기만 하다 아무것도 타지 않고
쉬지도 않은 채로 혼자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도 있다.
예전에는 버스가, 지하철이, 자동차가, 기차와 비행기가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어디까지 닿아있는가에만
집착적으로 매달려서
그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타고 있는 안정감과 더 이상 환승하여 여행객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에
그것이 끝까지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수단이 무엇이든
그것을 선택하든 하지 않든
귀결엔 내가 그것으로 마음이 가득하고
진정으로 너의 마음도 흘러넘치는 때가 맞아야
우리는 목적지가 되고
혹은 환승역이 되더라도
슬프지 않을 두 사람으로 새겨짐을 어렴풋이 안다.
쉬운 일은 당연히 없지만,
그래도 어느 방향이든 용기 있는 가슴으로
살면 좋겠다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