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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Jul 30. 2020

런치박스 말고 도시락

멸치볶음, 계란말이, 분홍 소시지 부침, 진미채... 오늘은 뭘까요?

런치박스 말고 도시락


"오늘 점심시간에 다들 내 런치박스를 보더니 정말 부러워했어."

평소보다 조금 늦게 퇴근하고 돌아온 고랑이는 깨끗하게 씻은 도시락통을 건네주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고랑이는 업무상 워낙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를 못하고, 먹는 시간이 들쭉날쭉했던지라 

처음 저희 커플이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제가 가장 먼저 챙기기 시작한 것은 그의 런치박스(도시락) 이였어요.


호주에서는 '런치박스'라고 하면, 집에서 전날 저녁 남긴 요리, 피자 한두 조각, 보통 식빵 두장에 치즈와 햄 정도를 겹친 샌드위치 한두 개 정도를 들고 오거나, 감자튀김을 끼니로 먹는 경우도 많아요.

고랑이는 제가 고랑이 전용 빨간 도시락통에 밥과 반찬, 혹은 김밥, 한국식 감자 샐러드로 

속을 채운 샌드위치를 을 싸주면 놀라곤 했어요. 

그렇게 제가 싸준 도시락을 먹다 보니, 밖에서 먹은 음식보다 속도 편하고 든든하니 진짜 일하기 싫은 날에도

도시락 생각으로 버틴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제 도시락 먹을 생각으로 직장을 버티는 사람 중 하나이고요. 


집에 남은 단무지와 김치, 아스파라거스, 참치, 게맛살, 깻잎 등을 넣고 런치박스 만들면서 만든 퀴노아 김밥.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는 모든 직장인들이 그렇듯 저도 점심 먹는 낙으로 살았었어요.

직장동료들과 음식점들을 격파(?)하면서 어느 집에는 뭐가 맛있고, 어느 집은 어떤 메뉴는 피해야 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지내게 되죠. 가끔은 진짜 제가 먹고 싶은 거 먹으러 친한 동료를 꼬들겨 나가기도,

해장이 간절한 날에는 다들 속을 달래러 순댓국집이나 쌀 국숫집에 가기도 하고요.

진짜 바쁜 날에는 도시락이나 모둠 김밥같이 속 꽉 찬 김밥류들을 시켜서 야금야금 먹으면서 일을 했죠.


그러다가 호주에 왔는데, 도시락(런치박스)을 알아서 싸가지고 다녀야 하더라고요.

집에 오면 잠자기 바쁘고 장 볼 시간이 없을 때도 많았던 터라 처음에는 그냥 샌드위치나 샐러드, 초코바 같은

것들을 사 먹었어요. 근데, 저도 서른 다되어서 유학을 온터라 밥심이 떨어져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리고, 워낙 호주는 외식이 비싼 나라여서 하루에 조금씩 밥값으로 나가는 돈을 계산해보면

그 돈이 크기 때문에 꼭 런치박스를 간단하게라도 싸야 했어요.


중학교 때, 급식소가 생기기 전에 엄마가 2년 정도 도시락을 싸주셔서 먹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이제 서른이 다되어 제 손으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고, 

호주에서 런치박스를 싸기 시작한 지 어느덧 6년 차가 되었네요. 


진짜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서 쌌던 감자 샐러드 샌드위치, 그리고 유부초밥
샐러리 표고버섯 솥밥과 이탈리안 소시지, 스리라차 마요, 그리고 김.

새벽 6시 15분. 항상 직장일로 바쁘신 엄마는 정말 몸이 너무 아픈 날에도 제 아침과 도시락통을 식탁에 어김없이 준비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제가 엄마와 함께 고른 하늘색 3단 도시락 통에는 엄마표 참치 버섯전과 뜨끈 뜨끈한 잡곡밥, 매콤 달콤하게 무쳐진 진미채에 깨소금이 쪼르륵, 꼬득꼬득하고 매콤 달큰한 무말랭이, 손을 일일이 껍질을 까고 방망이로 두들려서 다듬고 재운 더덕무침, 집에서 내내 잘 말린 무시래기에 들기름과 된장이 어우러진 시래기 된장무침까지 늘 엄마의 성격처럼 차곡차곡 가지런히 담겨 있었어요.

친구들과 책상을 붙여서 재잘재잘 서로의 반찬을 뺏어 먹고 사수하면서 보냈던 점심시간의 도시락은 참 행복했던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전날 남은 음식이나 무엇하나 대강 도시락에 싸주시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 덕분인지, 멀리 있지만 여전히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내가 먹고 싶은 음식, 내가 함께 먹고 싶은 음식을 도시락으로, 런치박스로 싸고 있어요. 제가 엄마한테 투정을 부린 다음날에는 가끔 엄마가 작게 넣어주곤 했던 도시락에 담긴 편지는 지금도 엄마 집에 있는 제 보물상자에 꽤 남아있어요. 


고랑이의 최애 조합인 명란 계란말이와 멸치볶음.
저는 한국 도시락 좋아해요.

고랑이의 도시락 최고 메뉴는 뭐니 뭐니 해도, 명란 치즈 계란말이와 김, 그리고 멸치볶음이에요.

(동남아식 볶음국수와 연근조림,마늘쫑 무침, 묵은지가 들어간 참치김밥도 무척 좋아해요.) 

도시락을 준비할 때, 멸치를 볶으면서 기름에 간장을 눌리는 냄새를 옆에서 맡거나

명란 계란말이를 자르기 전 식힐 쯤이면 근처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면서 꼬랑지 부분을 먹으려고 기다려요.

김은 한인마트 가면 종류별로 사서 먹고는 본인만의 별점을 매기기도 하고요.

그렇게 도시락을 런치박스로 싸가던 고랑이는 어제 한국어 공부를 하다가 런치박스가 한국어로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도시락'이라는 표현을 알려 주었더니 이렇게 말하네요.

"저는 한국 토(도)시락 좋아해요."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엄마 밥상이 생각날때 꺼내보는 사진. 한국에 가면 늘 아침을 저만큼씩 차려주셔서 울컥할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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