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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Sep 03. 2020

나의 직장상사 K

수능이 끝나고 딱 2주 뒤, 집 근처 호텔에서 시작된 저의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저는 죽집, 일식집, 마트, 대학교, 화장품 회사, 학원, 학습지, 클리닉, 컨설팅회사, 박물관 등등 다양한 곳에서 밥줄 끊기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오죽하면 친구 중 하나는 '너는 일 한 것만으로도 매년 책 한 권은 나올 거 같다' 고 우스갯소리를 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별별 직장상사와 직장선배를 다 만나게 됩니다. 친한 학교 선배들 한테도 오빠 소리를 잘 못하는 저에게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 오빠라고 해봐. 오빠한테 필요한 거 있음 언제든 부탁하고'라고 말하는 직장선배도 있었고, '내가 다른 애들보다 특히 XX 씨 아껴서 주는 거야.' 라며 반 이상을 쓰다만 립글로스를 주는 상사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참 감사하게도 어느 직장에서 좋은 직장선배나 직장상사가 적어도 한 분은 꼭 있었습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싶으면 카드를 건네주며 먹고 싶은 커피랑 디저트를 사 오면서 바깥바람 쐬고 오라며 저를 내보내던 L 이사님, 출장 갔다 오면 늘 제가 좋아하는 예쁜 것만 골라사 오는 J 대리님, 본인 외근 나가시면서도 제 끼니를 꼭 챙겨주시는 Y차장님, 일하다가 속 터지는 날에는 맥주 한 잔 하고 풀라며 회사 앞 펍에서 시원한 맥주를 사주고는 본인은 남편이 쉬는 날이라 같이 놀아줘야 한다며 눈을 찡긋거리며 휙 사라지던 H 과장님, 늘 침착하며 말의 결이 고운 P 연구원님, 학비에 빚에 허덕이며 일하는 저에게 매출 압박 없이 편하게 일할 수 있게 해 주신 K 지국장님, 어디서든 기죽지 말고 예쁘고 화사한 색으로 많이 꾸미고 다니라고 예쁜 스카프를 선물해주시던 E 사장님 등등. 직장은 일을 하는 곳이니 친구를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샐 수 없이 많은 좋은 직장선배들과 상사들 덕에 '일은 이렇게 잘하고, 인생은 저 나이, 저 위치 정도 되면 저렇게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나도 노력해야겠다.'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저는 호주에서 저의 직장선배였고, 직장상사이자 인생선배인 K를 만나게 됩니다.


저와 K와 아주 급하게, 간단히 준비했던 직장상사 L의 베이비샤워를 위해 준비한 마카롱과 브라우니를 이용한 선물


K. 케이. 40대 중반에 접어든 그녀는 끊이지 않는 웃음과 넉살 좋은 호주 아줌마의 모습으로 처음 트라이얼(일을 정식으로 하기 전에 함께 일을 해보며 채용할지를 결정하는 기간)에 나타납니다. 누구에게나, 늘 도움이 필요한 곳에는 항상 손 내밀고 진짜 도움을 줄 줄 아는 그녀. 본인이 모르는 것에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며 하나하나 다 배우고, 익히며 일하는 그녀를 같이 일하는 셰프들 대부분은 그냥 성격 좋은 아줌마 정도로 생각하고 그저 편하게 때로는 조금은 무례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습니다.


테스팅, 테스팅... 끝이없는 테스팅. 1시방향이냐 2시방향이냐, 작은 돔이냐 큰 돔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렇게 그저 늘 웃으면서 본인 일을 즐겁게, 좋은 기운으로 열심히 하던 그녀는, 저희 팀 내에서 승진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주방에서 일하는 다른 섹션 직원들이 어려움이 있으면 직접 가서 해결을 해주며, 매니지먼트와 헤드 셰프나 총괄 셰프의 의견 조율이 불가능한 상황에도 그녀 특유의 밝은 기운으로 회의 분위기를 화기애애 잘 마무리 지어 일을 기한에 맞게, 가장 좋은 방향으로 마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아주 바쁜 시기에는 서로 소리지르기 바쁜 키친에서 그녀 만큼 밝은 스마일이나 M&M 초콜릿, 감자튀김 모양의 귀걸이 등 하고 나타나 웃으면서 단 5분이라도 커피 한잔이라도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시간을 만듭니다. 


혼자서 4명-5명 몫의 일을 하느라 하루가 1분 1초 할 일로 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추가적으로 팀원들에게 도움이 될 레시피나 문서를 정리를 칼같이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점점 그녀가 만들고 아이디어를 내는 메뉴들의 완성도 또한 하루가 다르게 높아집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 K(케이)가 점점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케이가 저에게 보여주고 싶다며 본인 집 정원에서 따온 릴리 필리(Lily Pily). 
케이네 집에서 키우는 패션푸르츠의 꽃. 우주선같이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어요.


케이, 내가 너 나이가 되었을 때 너 같이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


흔한 장롱면허도 없는 저는 무거운 툴박스(각종 도구를 담는 큰 박스)를 들고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면 학교를 다니고, 출퇴근을 했었습니다. 그런 저를 위해 K는 제 운전기사를 자청합니다. '너네 집이랑 우리 집이랑 별로 멀지도 않고, 나 운전 진짜 잘해.'라고 했지만 저는 곧 그녀의 일상을 엿보며 그녀에게 더 감동하게 됩니다. 


매일 새벽 3시 반, 본인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크로와상과 빵을 좀 더 배우기 위해 친구가 하는 베이커리에서 일을 도와주다가, 다시 저와 일하는 일터로 오전 7시 30분까지 출근. 점심시간도 놓쳐가며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다가 그리고 바쁜 시기가 오면 밤 11시쯤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일상. 그 와중에도 쉬는 날이면 친구들이나 가족행사를 위한 음식을 완벽하게 준비하며, 임신을 해서 출산휴가를 가는 직원들에게는 직접 장소를 꾸며 베이비 샤워를 선물하기도 하고, 짬짬이 본인이 사비를 들여서 다녀온 수업에서 배운 기술이나 레시피를 아낌없이 공개하며 일하면서 도움이 될만한 책이나 자료를 팀원들과 나누기도 하고, 퇴근길에는 한국을 사랑하는 그녀의 예쁜 딸과 함께 차 안에서 한국 아이돌 음악에 몸을 흔들 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호주 모녀의 차 안에서 블랙핑크와 갓세븐 노래 메들리를 들을 줄은! ) 


20년이 넘는 경력과 그리고 본인의 사업도 크게 했지만, 그녀는 정말 늘 겸하고 노력하며, 즐거우며 모든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승진하고 1년이 채 안되어, 그녀는 조직 내에서 모든 사람들은 물론이고 본사의 매니지먼트 윗사람들에게 까지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케이와 정말 고생을 했던 시즌 중 하나. 제 사진첩에는 그녀와의 엽기 사진이 가득가득 해요.

그녀와 3년 내내 일했던 동안, 저는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다른 팀원들에 비해 경력이 현저히 낮은 저에게 꾸준히 도구 하나라도 제대로 쓰는 법을 알려주고, 제 생일 때면 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셰프가 되라며 저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사주었으며, 타지에 혼자 돈 벌어서 학교 다니고 열심히 일하는 게 기특하다며 제가 학교 마지막 학기를 마친 주에는 저를 위해 깜짝 파티를 다른 직원들과 준비해서 샴페인을 터뜨려주며 축하해했습니다. 


다른 상사들에게 왕창 깨진 날에는 집에 가는 길에 집 가서 한 잔 마시고 풀라고 맛있는 와인 한 병을 선물해주기도 하고, 워낙 정치도 못하고 마음이 여린 제가 걱정이 되었는지 호주인들이 쓰는 욕이라며 누가 못되게 굴면 이렇게 욕을 해주라며 저에게 호주식 영어 욕을 알려주기도 한 그녀. 그녀 덕에 저는 조금씩 파티시에로써 윗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큰 프로젝트들이나 VIP 행사에 상사인 그녀와 함께 메인 담당으로 참여를 하게 됩니다.


K와 헤드 셰프 E 덕에 모네 전시회에서 오프닝 VIP 행사에 나갔던, 모네의 수련을 담은 제가 만든 마카롱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저는 그녀가 공들여 만든 제 송별 파티 초대 동영상과 많은 직장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송별 파티를 한 뒤, 다른 도시로 이사와 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K의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연말에 한국에 가게 되면 지난번처럼 K의 딸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굿즈를 사 갈까, 아니면 K가 좋아하는 김치전이나 모둠전을 해서, 우리 둘 다 좋아했던 와인 한 병을 사 갈까 싶었는데... 다른 동료에게 들었던 K의 건강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도저히 무슨 말로 연락을 해야 할지 몰라서 간간히 서로 평소처럼 사는 이야기로 메시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제 생일이 지나고 며칠 뒤, K의 생일이어서 연락을 해봅니다.


"... 병원에서 나와서 치료를 몇 가지 받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나에게 효과가 없었어.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나는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날들을 즐기려고 해. 지금은 집 앞 작은 공간에, 음식에 쓸 채소를 가꾸며 내가 늘 좋아하는 정원을 가꾸는 일은 하고 있어....(2020년 8월 29일, 케이(K)가.)"


K의 긴 메시지에는 그녀의 밝고 쾌활하며 긍정적인 목소리가 담겨 있는데, 저는 자꾸 눈물이 앞을 가려서 

몇 시간 뒤에서야 그녀에게 답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너와 너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너의 정원에서 자라는 꽃들과 열매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기억이 난다고, 야채들이 잘 자라면 자랑해달라고-' 그렇게나마 저는 답을 보내며 그녀에게 조만간 보낼, 밝고 좋은 기운을 줄 작은 선물과 카드를 오늘 골라봅니다. 그녀의 신혼여행지였던 이탈리아의 고풍스러운 색감의 카드를 보낼지, 아니면 저희 집에 자주 놀러 오는 호주 새 로리켓이 예쁘게 그려진 카드를 보낼지 고민을 해봅니다.


정원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K와 정말 즐겁게 작업했던 디저트.


회사는 사람을 사귀는 곳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인생에서 그저 스쳐갈 수도 있는 사람을 좋은 직장 상사, 직장선배로 혹은 인생 선배로 만날 수 있는 곳이 회사라는 곳이었기에, 그래서 저는 제 인생에 많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힘들거나 지칠 때, 저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도, 자신의 삶의 방향을 올곧게 보며 열심히 사는 제 인생 선배들을 직장상사들을 늘 생각합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그렇게 작고도 큰 소망을 담아 감사와 바람으로 이 글을 마무리 지어봅니다.


여러분의 인생선배는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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