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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마카롱 Nov 13. 2020

이냉치냉,
동치미 국수


'한국의 김장 문화'는 유네스코에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거 아시나요?  2013년 등재된 이 김장 문화는 'Gimjang'  혹은 ' making and sharing Kimchi'라고 영문명이 표기되어있더라고요. 요즘 워낙 혼자 사는 가구들도 많고, 한국에 있는 제 친구들 대부분 김치를 시댁이나 친정에서 얻어오거나 아니면 사 먹는 경우들이 많지만, 매년 김장시기에 저희 엄마나 이모들은 외갓집에 모여서 김장을 했다고, 올해 '김장원정대' 멤버를 일일히 전화하면서 말씀하곤 하세요. 마지막으로 맛본 엄마의 김장김치는 15년 전 쯤인 것 같은데, 그 감칠맛 가득한 맛깔나는 김장김치는 여전히 생각만 해도 침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이기도 해요.


집에서 해먹는 김치들. 집에 김치만 4종류가 냉장고에 있는 프랑스 남자.


저도 어릴 때, 김장하는 엄마를 도와 종일 배추 나르고, 다듬고 절이고 하는데 손이 벌게지도록 일하시는 엄마를 보며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들게 집에서 다 하시나 싶었거든요. 그렇게 일하다가 노오란 배춧속 달콤한 고소한 배추꼬갱이에 김치의 속을 쓱쓱 올려, 야들야들한 수육 한점을 올려서 먹는 그 맛에, 힘들더라도 한 번 이 맛에 빠지면 집에서 김치를 늘 해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죠. 그리고 타지에서 살다 보니, 뜨끈한 밥에 김치 한 조각을 올려 먹는 게 나 스스로 해줄 수 있는 소박한 보약이자, 꽤 큰 위로라는 것도요.



며칠 전에 한국 무를 우연히 발견해서 서너 개를 사 왔어요. 통통하니 꽉 차서 김치를 담그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이파리는 햇볕에 말려 시래기를 만들어두고, 배와 양파, 무껍질, 파를 갈아서 유자청 한 스푼으로 단맛을 더해 동치미를 담가 놨어요. 그렇게 이틀 정도 밖에서 숙성시킨 동치미 통 뚜껑을 여니, 뽀글뽀글 동치미가 잘 익었다고 냄새와 소리로 신호를 보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냉장고에 시원하게 맛이 올라온 동치미 통을 꺼내서 동치미 국수 한 사발을 말 준비를 합니다



동치미국수


소면을 잘 삶아준 뒤, 냉동실에서 막 꺼낸 얼음으로 얼음물을 만들어 면발을 시원하게 헹궈줍니다. 쫀득한 면발 사이로 참기름을 살짝 부어준 뒤, 채 썬 오이와 깻잎, 계란 반 알, 동치미 무와 집에 있던 토마토 한 알과 매운 고추도 넓죽하게 썰어서 자리를 잡아 준 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낙낙하게 부어주고 깨소금을 올려줍니다.



고랑이는 국수를 받자마자 동치미 국물을 한술 뜨더니 엄지손가락 두 개를 내밀며, '맛있다'를 연발합니다. 이 맛에 집에서 밥을 하는 거죠. 후루룩 면치기를 하며, 중간중간 아삭아삭한 무와 오이도 먹어봅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한국은 겨울이 다가오니 김장철이지 않냐'고 고랑이는 저에게 묻습니다. 


완성입니다. 동치미 국수!


천연소화제, 동치미 국물


이 동치미는 겨울 무를 가장 맛있게 오래도록 먹기 위한 김치라고, 동치미를 꺼내러 가면 살얼음을 살짝 비집고 꺼낸 통통한 무를, 모범생 친구의 머리처럼 단정히 묶은 머리처럼 잘 묶여있던 파와 큼지막한 배와 함께 나박나박 썰어 오목한 그릇에 담아냈던 시간을 꺼내어 봅니다. 비트를 살짝 넣어서 분홍보랏빛 색을 내고 절임 고추도 넉넉히 넣어 쏙쏙 빼먹는 재미가 있던 엄마표 동치미. 하루는 고구마를 먹고 목이 막혀 켁켁 거리는데, 엄마가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을 떠서 건네시던 그 뽀오얀 사기그릇이 생각이 납니다. '동치미 국물은 천연 소화제이니 속 편하게 먹고 트림이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라고 말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말이 끝나자마자 꺼억-트림이 나온다고 입을 막고 민망해하는 고랑이의 모습에 결국 웃고 맙니다.




요 며칠, 동치미 위에 올리던 그 묵직하고 커다란 누름돌처럼 눌러온 가슴속의 답답함을 이 동치미 국수 한 술과 시원한 웃음소리로 쑤욱 내려보내 봅니다. 김칫소를 몰래몰래 집어먹다 밤새 물을 들이켜던 시간을, 도마를 받혀둔 야들야들한 수육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집어서 동생 입에 넣어주던 기름 묻은 손을, 처음 타지에서 같이 살게 된 한국 언니가 제육볶음과 함께 내주던 그 김치 한 종지를 추억으로 반찬 삼아 동치미 국수를 깔끔히 비워봅니다.



벌써 타지에서 다섯 번의 겨울을 보내다 보니 여전히 마음이 무척 추운 날에는 뜨끈뜨끈 마닐마닐한 군고구마 같은 음식으로도, 머릿속까지 시릴 정도로 살얼음이 살짝 낀 동치미로도 몸의 겨울을, 마음의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손발이 유난히 차가운 저는 아직은 보글보글 끓는 삼계탕을 한여름에 챙겨 먹는 이열치열이 더 좋지만, 이런 동치미 국수라면 이냉치냉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누가 뭐래도 동치미 국수이니까요. 속이 꽉막힌 듯 답답한 날, 사이다 마냥 시원한 동치미 국수 어떠세요?


이냉치냉 맞죠? 이 정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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