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로스쿨의 다사다난 했던 이야기들을 나름 이야기 보따리처럼 풀어보려고 했는데,
원래 지나고 나면 다 미화된다고 했던가?
나는 미화가 아니라 기억 상실에 걸렸다.
사실 로스쿨에서 만났던 관계 일부를 정리한 것이 나의 기억 상실에 큰 영향을 준 사건이기는 했는데
기억은 상실했어도 로스쿨 공부가 딱히 적성에 맞거나 즐겁지 않았다는 것 만큼은
아주 명확하고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원래 사건은 기억 안 나도 감정은 남는다고 했지.
아무튼 그래서, 로스쿨에서 생긴 일 시리즈는 잠정 연기하기로 하고,
3년차 현생을 사는 어쏘 변호사의 일상 일기를 이어 쓰려고 한다.
지난 주 나는 처음으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는 피의자를 대리하여 출석하였는데,
다행히 "기각 결정"을 받았다.
구속 여부를 심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나름 엄격하고 조금 무섭고,
한편으로는 내 의뢰인이 나에게 속이는 게 있으면 어쩌나 싶고 했는데.
쉽지 않다는 구속영장기각결정을 받아내어 줄 수 있어서 조금 뿌듯한 저녁이다.
사실 나는 일하면서 뿌듯함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이 일이 적성에 매우 맞지도 않을 뿐더러,
나의 의뢰인들은 누군가와 대부분 싸우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변호사가 하는 일이란,
<잘 되어야 본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혼 사건이 성공하면 당사자들이 이혼을 하는 것이고,
형사 고소 사건이 성공하면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것이고,
형사 피고소 사건이 성공하면 혐의자가 처벌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민사사건에서 성공하면 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이고,
민사사건에서 방어에 성공하면 줘야 할 돈을 덜 줘도 된다는 것인데,
어느 결과가 되었든 잘 되어 봤자 애당초 있었던
갈등 상황 자체가 갈무리되거나 봉합되거나
당사자들의 멘탈이 치유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나는 항상 내 일이 "잘 되어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다가 법적인 분쟁이라는 것이
100 : 0 으로 명확하게 이기고 지는 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변호사에게 일을 맡긴다고 해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된다는 보장은 누구도 해줄 수 없다.
심지어 때에 따라서는,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정의마저
변호사와 의뢰인 간에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속 편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일이 잘 돼도 안 돼도 찝찝한 기분이 디폴트인
나의 직업에 대해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한 건 아마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이었을 것이다.
의뢰인의 사정에 이입을 해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가도,
결과가 어떻든 나와 무슨 상관인가 싶은
양가적 감정 상태와 매일 싸우며 일하는 기분이란.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 일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 일이 좋지는 않다, 정말로.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에게 오는 의뢰인들,
내가 만나게 되는 그들의 사연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돕는 것 뿐이다.
그 결과가 보다 나은 일일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을 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