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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림 May 20. 2024

아무거나용 서랍

어서 와 오랜만이지

집을 정리하다 제일 긴장되는 순간은 '아무거나용 서랍장'을 열었을 때다. 어디에도 가만 두지 못하고, 버릴지 남길지도 결정하기 어려워 일단 쑤셔 넣기 바빴던 과거의 나와 조우한 그 타이밍이다.


자, 이제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어. 내 꿈을 위한 여행, 아, 아니 반성여행 피캇츄


서랍장에 있던 물건들을 책상 위에 촤악 펼쳐둔다. “집주인은 말이야. 색깔별로 사둔 네임펜은 꼭 한 가지 색만 사용하지. 여러 가지 스타일로 사둔 머리끈도 꼭 편한 것 하나밖에 모르는 이 시대 최고의 로맨티스트란다. 맘 잡고 구매한 뜨개질 키트는 알량한 집중력에 대한 과대평가로 죄 없는 실뭉치만 뒹굴거리게 해. 귀엽다고 사들인 물건들은 또 어떻고. 그 귀여움을 끝내 발산하지 못한 채 텁텁한 지하 동굴에 갇혀 지내게 한단다. 참 못되지 않았니.” 한 차례 자조적인 마음의 소리를 읊조리며 정리하기로 한 것들을 쓰레기봉투에 털어 넣는다.


서랍을 여는 순간이 오랜만에 찾아올수록 결정권을 손에 쥔 사무라이는 냉혹해진다. 1년은 안 썼잖아, 버리자. 2년째 아깝다고 남겨뒀잖아, 버리자. 하지만 함께 지낸 시간이 짧을수록 좀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미련일까, 잘 샀다고 생각한 자존심에 스크레치가 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제 산지 1주일인데 좀 더 지켜보자. 할 때도 있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물건의 선별 작업으로 주인장은 현재 자신의 우선순위와 취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언젠가 서랍 속은 쓰임이 적은 새 물건, 취향인지 아닌지 헷갈렸던 것들, 또다시 길을 잃은 친구들, 또 저질러버린 실수들로 가득 찰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우리는 또 재회하고, 침묵하고, 이별하며 매번 지겹게 물어볼 거다.


진짜 헤어질 수 있냐고.  


연애를 끝내어 이 사람을 다시 만날지 안 만날지 결정하는 급의 심리적 에너지 소모가 상당한 이 정리라는 행위는 내 것으로 하기로 결정해 버린 물건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는 질척한 책임 같은 것이었다.


역시 인간은

내 것이 있어야 책임을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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